- 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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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푸른 밤, 환상의 멸치국수
제주도 푸른 밤, 멸치 국수
떠나요, 둘이서
모든 것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제주도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자동플레이 모드에 돌입하는 나의 뇌는 나른한 여름 오후를 닮은 최성원의 목소리로 ‘제주도 푸른 밤’을 들려준다. 제주도는 내게 푸른 바다, 푸른 하늘, 푸른 밤이 아득한 여름의 섬이다. 물을 좋아하는 아이가 뒤뚱대는 걸음걸이로 모래사장을 헤집고 한참을 걸어나가도 허리를 넘지 않는 낮고 잔잔하고 투명한 바다가 있는 그 곳. 두 아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머물러도 싫증나지 않을 해안을 찾아 우리는 거의 매해 제주도를 찾았고 함덕해수욕장에 머물렀다. 산호가 부서져 생성된 눈부신 백사장과 투명한 에머럴드빛 바다는 몰디브니 보라카이 같은 남국의 해안도 부럽지 않을 절경이었다.
파도 없는 잔잔하고 얕은 바다가 어찌나 맑은 지, 이제 두 돌이 막 지난 아이는 물 속 모래를 밟고 선 제 발가락이 꼼지락대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나지막한 바위 해안 쪽으로 다가섰을 때, 아이의 오동통한 다리 사이로 정체 모를 은빛 물체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게 뭐지 싶어 들여다 보는데 어느새 떼를 지어 이동 중인 녀석들! 어른 무릎을 간신히 넘는 얕은 해안까지 진출한 이 용감한 물고기들의 정체는 다름아닌 멸치였다. 이런, 늘 바짝 말린 상태로 상자 속에 들어있던 녀석들을 물 속에서 헤엄치는 생물로 보게 될 줄이야. 성질이 급해서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순간 제 명을 다한다는 멸치가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일평생 서울 촌것들로 살아왔던 우리 가족이 바다 속을 유영하는 멸치를 보게 될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건만. 자세히 보니 바위 옆 해안 전체가 멸치 반 물 반이었다. 아이들은 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고기가 뭔지도 모르고 환호성을 지르고, 남편과 나는 우리들의 맥주 안주가 단체로 이동 중인 장관에 입맛을 다시며 녀석들을 관찰했다.
끊임없이 움직이기에 옛 사람들이 행어(行魚) 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이렇게 정지해 있는 것들, 제각기 대가리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생의 마지막 표정을 이 애들처럼 적나라하게 가지고 있는 것도 없다.
– 한창훈,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 중에서
대가리마다 간직한 제 숨 끊어지는 순간의 모습이라니, 생계형 낚시꾼이자 소설가인 한창훈의 묘사력은 바닷것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덕분에 육수를 낸답시고 멸치 배를 가르고 똥을 빼 낼 때마다 요 쬐그만 녀석들이 부관참시를 당하는 제 모습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상상을 하게 되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녀석들은 이렇게 힘차고 날렵하고 예쁜 물고기들이었던 거다.
사람들이 노니는 얕은 해변까지 출몰하는 멸치 떼를 목격하고 나니, 제주도의 멸치 맛이 각별하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기대를 뛰어넘는, 면식인생 40여 년을 통틀어 최고의 멸치국수를 이 곳에서 만났다.
제주도에 오면 늘 서귀포 어디쯤의 소박한 펜션에 여장을 풀었던 예년과 달리, 그 해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표선면에 생긴 새 리조트에 묵었다. 평상시 같으면 언감생심이었을 5성급 호텔 리조트는 해수욕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대신 시설과 경관이 대단히 훌륭했고, 홍보기간 중 직원할인가를 적용해 숙박비도 꽤나 합리적인 수준이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지만 문제는 식사였다. 식성 좋은 네 식구가 한 끼만 호텔 레스토랑을 이용해도 하루 숙박비를 훌쩍 넘길 상황이니. 먹는 건 싸고 맛있는 현지식당을 이용하자는 생각으로 계획 없이 나간 표선 읍내에서, 운명의 그녀를 만났다.
가볍게 국수로 한 끼를 때울 심산으로 시내를 천천히 드라이브하다 발견한 곳은 한 눈에 보기에도 좁고 허름한 외관에 간판도 없는 국수집. 생뚱맞게 불그죽죽한 비닐 쇼파를 문 밖에 내놓은, 흑백 TV에서 튀어나온 듯한 식당이 왠지 궁금했다. 들어 가볼까? 미닫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식당 안은 기껏 길쭉한 나무 탁자가 달랑 두 개 놓여 있었다.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 TV를 보던 주인아주머니는 아이 둘을 대동하고 들어서는 우리 내외를 보고 주섬주섬 일어섰다. 보통, 곱빼기, 콩국수가 전부인 메뉴에서 이천오백원 하는 보통을 네 그릇 시켰다.
십 분이 채 안 된 것 같은데, 손잡이 달린 노란 양은냄비 네 개가 나란히 식탁에 놓였다. 진한 멸치 냄새가 훅 끼치는 데, 비리지 않고 구수하게 풍겨오는 훈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보통의 맑은 멸치국물에 비하면 국물이 뽀얗고, 중면보다는 굵고 우동면보다는 가는 동그란 단면의 면발 위에 고추가루와 쪽파가 듬뿍 올려져 있었다. 이 독특한 굵기의 면은 제주에만 있는 ‘왕면[1]’이란다. 계란지단이니 호박 같은 고명은 일체 생략, 오로지 면발과 육수로만 승부하는 단순한 구성은 그만큼 기본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렸다!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닌데 왠지 마음이 다급해지는 비주얼이랄까. 얼른 고춧가루와 쪽파가 국수와 섞이도록 대충 휘젓고 양껏 한 젓갈을 들어올렸다. 국물을 듬뿍 머금은 두툼한 면발을 들이키는데… 세상에, 멸치가 이런 맛을 내던가? 개운하고 은은한 감칠맛으로만 알고 있던 멸치 육수가 이렇게 깊은 맛을 내다니. 국수 한 그릇이 어디로 들어가는 지 모르게 사라졌다. 아이들마저 제 것을 다 해치우고 한 그릇만 더 시켜달란다. 그래! 까짓 거 인심이다! 다시 나온 한 그릇을 두 아들에게 갈라주고, 나는 국물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넷이 이렇게 배터지도록 맛난 점심을 먹고도 단돈 만이천오백원이란다. 이토록 탁월한 맛에 참, 터무니없이 황송한 가격이다. 식당을 나서는 기분이 어찌나 흐뭇하던지. 나란 인간은 역시! 제주도까지 와서 이런 숨겨진 면식성지를 찾아낸 눈썰미에 자부심을 느끼고 말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사실 그곳은 소설가 성석제의 산문을 통해 널리 알려진 전설의 멸치국수집, ‘춘자싸롱’이었다. “나는 제주도에서 춘자싸롱 국시 말고는 국시로 안 보네.” 글 속에서 오직 국수 때문에 제주도를 왕래한다는 면식성인의 입을 빌어, 작가는 이 곳의 국수를 극찬했다. 그리고 춘자 싸롱의 국물맛을 놓고 억센 경상도 남자들이 난상토론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분명히 핵심은 멸치육수인데, 한 차원 높은 그 심오한 맛의 비밀이 뭔지를 놓고 간장이다, 물이다 온갖 추론이 충돌하는 가운데 일행 중 한 명이 유유히 비밀을 공개한다. 본인은 평생 국수집을 내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수십만원 어치의 국수를 이 집에서 먹겠다는 약속을 하고 주인장에게 캐냈다는 비법의 정체는… 제주도에서만 난다는 어떤 물고기의 새끼였단다! 그것이 진실이든, 입심 좋은 작가의 구라든지 간에, 덕분에 나는 제주의 푸른 밤에 이어 봄 제주에 대한 환상이 생겨버렸다.
봄은 슬쩍 맛보았다. 표선면 세화리 앞 연청색 바다, 초병의 이를 악물게 하는 바람으로. 무슨 물고기인지 몰라도 그 물고기 새끼에 봄이 들면 춘자국수도 더 맛있어지겠다. – 성석제, 소풍
아, 맛있겠다 그 봄!
[1] 멸치국수 외에도 고기국수, 성게국수 등 육지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국수를 내는 제주도의 국수집들은 일반적인 소면이나 중면보다 이 ‘왕면’을 많이 사용하는데, 해방 후 한국인이 세운 제주도 최초의 국수공장이자 지금까지 건재한 60여 년 전통의 한성국수공장에서 생산한다.
울그이 고향 표선면 세화리.
종종님 글읽고 물어보았다.
여보, 춘자쌀롱 국수집 알아?
진짜 국수 끝내주는 집이지. 그 집 만큼 맛있는 집 아직 못 봤어.
결혼 15년차, 근데 왜 한번도 말 안 했어? 왜 안 데려갔어?
없어졌어. 없어진지 한 30년 되었을걸.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먹었으니까.
아냐, 이번에 누가 먹고 왔대.
다른곳에 새로 생겼나 보네. 딸이 차렸나?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대학 다닐 때도 없었어. 자기랑 나랑 집에 가려고 택시 기다렸던 곳 있지. 거기서 좀 위에 약간 들어간 곳에 있었거든. 내가 그때 말은 안 해도 거기를 가봤겠어? 안 가봤겠어? 가봤겠지. 춘자쌀롱 맞은편이 지금은 면사무소지만 그땐 버스가 스무 대 서있는 정류장이었어. 그 정류장이 없어지면서 춘자쌀롱도 없어진거 같애.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어. 국수 먹고 싶어 가도 없었으니까. 춘자쌀롱은 간판도 없어.
그런데 자기는 거기가 춘자쌀롱인지 어떻게 알았어?
애들이 춘자쌀롱 춘자쌀롱하니까 알았지. 충민이 알지? 난 충민이가 말해줘서 알았어. 아줌마가 춘자인지 딸이 춘자인지는 잘 모르겠어. 확인해보지 않았으니까. 아마 그 아줌마는 돌아가셨을걸. 아줌마는 종종거리며 다녔어.
종종거리며 다닌다는게 무슨 뜻이야?
다리를 절었거든. 딸은 나보다 약간 몇 살 위 같은데 썩 잘 도와주는 편이 아니었어. 옆에 있으면서 한번 반찬을 갖다 주는 정도. 춘자쌀롱은 한 10명이 앉으면 꽉 차는 곳이었는데 그 집 국수맛 엄청 맛있었어. 국물이 정말 끝내줬어. 버스타려고 기다리면 구수한 국수냄새가 풍겨서 모두 환장했지.
비결이 뭐래?
모르지. 암튼 국물이 깊고 맛있었어.
어느 작가가 가서 장사안한다하고 물어봤다는데 멸치랑 뭐 작은 물고기를 넣는대.
에이,그건 작가니까 그렇게 말한 거지. 야구에서도 경기를 말도 안되게 확뒤집는 선수는 작가라고 해.
근데 왜 춘자네국수집도 아니고 춘자쌀롱이야?
나도 몰라. 그걸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근데 나도 왜 춘자쌀롱일까? 두고두고 생각해봤는데 애들이 지은 거 같애.
그 당시 버스비가 70원, 나중엔 120원 했는데 국수는 300원인가 500원했던거 같애. 30년전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학생이 버스비 받아서 국수 한그릇 먹고 나면 3,4일은 걸어다녀야 했으니 쌀롱가는 것처럼 비싸게 여겨졌던거지. 4키로를 3일 동안 걸어 다닐거 생각해봐. 집에 올땐 많이 걸어오긴 했지만. 그때도 돈 있는 애들이 춘자쌀롱에 자주 갔지 나는 몇 번 못 갔어. 3년 동안 한 10번 갔나? 룸쌀롱 비싸서 자주 못 가듯이 국수집도 한번 가면 주머니가 텅텅 비게 되니 애들이 춘자쌀롱이라고 붙인거 같애. 애들 입장에선 국수집이 룸싸롱 가는 거만큼이나 비쌌던 거지. 그래서 우리 몇 대 선배들이 지어서 구전으로 전해진거 같애. 맞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쌀롱이겠어.
하하하, 그 생각 정말 재밌다!!
나 솔직히 자기가 춘자쌀롱 말 꺼내서 국수집이라고 까지 해서 속으로 놀랐어.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런 사람이야. 자기가 알려주지 않아도 다 아는 사람!
하여간 육지사람들 대단해. 그 구석에 있는 것까지 다 알다니. 자기네 집 식구들이랑도 친근하네. 춘화, 춘연, 춘희.....춘자!
뭐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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