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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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에게는 아들이 없다. 엄마의 삶에 대한 한과 서러움의 본격적인 시작은 아들이 없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런 엄마의 한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첫째 딸인 언니는 시집을 가자마자 아들을 순풍 낳았다. 엄마는 마치 자기가 낳은 듯이 기뻐하며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런 언니의 아들이 벌써 군인아저씨가 된단다. 엄마에게는 첫 손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 아이였기에 입대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언니보다 더 우울해 하셨다. 엄마는 그 우울함과 아쉬움을 입영 일주일 전부터 고기반찬을 식탁에 올리는 것으로 대신하셨다고 했다.
엄마는 올해로 69세이다. 엄마는 내 친구들한테는 감성소녀로 통한다. 먼 길을 가실 때면 나의 책장에서 항상 책을 들고 길을 나서셨다. 절판이 된다고 사 놓은 법정스님의 책을 나보다 더 많이 읽으신 분이다. 엄마는 호기심도 왕성하다.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너무도 궁금해서 의자에 앉아 있질 못하셨다. 또한 산책길에서 만나는 이쁜 돌이나 나뭇잎을 그냥 지나치질 못하시기도 했다. 꼭 들고 들어와 집안 한 켠에 모아두는 것을 취미로 삼기도 하셨다. 엄마는 영화도 좋아하신다. 두 딸을 시집 보내고 적적함이 다가왔을 때, 산책과 영화로 마음을 달래시곤 했다. 혼자도 영화를 보러 다니시는 감성파 할머니에 요즘은 나보다 더 많은 영화를 섭렵하고 있는 상황이다. 엄마는 음식솜씨도 좋고 시댁식구들에게도 착한 며느리로 인정받은 분이었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귀하게 여기는 남자를 만났다면 한없이 사랑 받으면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고난이라는 두 글자로 단정짓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인다.
엄마가 태어났을 때 집은 부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놀음을 하셨고, 궁핍해진 살림살이 때문에 배움의 기회는 두 외삼촌들에게만 주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에 대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겼을 때, 언니도 같이 잉태되었다고 했다. 엄마의 배가 남산만해졌을 때,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고, 연년생으로 둘째 딸인 나도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엄마의 평탄한 결혼 생활은 아주 짧았다고 했다. 엄마는 서른 한 살부터 혼자 우리를 키웠다. 바람기 충만한 남편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핑계로 피워대는 바람을 착한 엄마는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는 아무 말없이 남편의 선택을 오롯이 감당하셨다.
배움이 짧은 여자가 어린 두 딸을 키우면서 살기에는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엄마의 삶은 소설에서나 아니면 텔레비전의 시대극에서나 나올법한 스토리의 주인공같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우리 앞에서 삶의 고통을 눈물로 표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험난한 세월의 흔적을 거칠고 억세다는 이름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소박한 자유를 사랑하시고 아직도 마음속에 소녀와 함께 살고 있는 감성 충만한 분이다. 자신만의 완고한 삶의 세계를 건설했고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철학을 실천하며 사신 분이다. 엄마가 지나간 나이를 여자의 이름으로 살게 되면서 나는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엄마의 삶이 얼마나 암담하고 막막했을지 말이다. 그 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엄마가 되었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그것이 엄청난 삶의 무게였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엄마라는 이름과 여자로서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는 항상 엄마의 자리가 되었다.
그런 삶을 사신 엄마와 처음으로 진주를 갔다. 엄마의 한을 풀어준 첫손자의 군입대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루 먼저 가서 맛있는 것들을 먹고 숙소에 들었다. 누구도 아쉬운 마음을 입 밖으로 내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오랜 만에 가족 나들이를 한 것처럼 연신 웃고 떠들었다. 그 중심에는 엄마가 있었다.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시면서도 할말을 다하시는 엄마의 모습은 당돌한 소녀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힘든 삶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힘을 갖고 계신 분이었다. 그 웃음은 부드럽지만 강했다. 시간을 돌이켜보니 어려울 때도 우리는 언제나 웃었다. 그 웃음은 언니의 삶에도 나의 삶에도 깃들었다. 엄마는 존경이라는 마음을 우리에게 심으셨고, 웃음이라는 행동철학을 몸에 익히게 만들어준 분이셨다. 누가 봐도 한 눈에 식구라는 것을 알아볼만한 외모를 가졌지만 웃음코드는 더 비슷하다는 것을 진주에 와서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힘든 삶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웃음을 주신 엄마한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이 솟아올랐다. 참으로 귀중한 선물을 받았구나! 나는 내가 받은 선물을 남편과 아들에게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헌 중에 하나였다. 그들의 표정이 건강해질 때마다 나는 선물의 힘을 느꼈다. 엄마의 선물은 그렇게 생명력을 가지고 번성해갔다. 시간이 흘러 나의 아들이 거친 세상에서 파도타기를 할 때 외할머니가 준 선물이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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