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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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아, 산아 안녕.
첫번째 새벽편지 : 제주로 이동, 산굼부리
제주도에 와 있단다. 폐교를 개조한 듯한 한라산게스트 하우스. 우린 오늘 새벽 6시 50분에 김밥 2줄씩을 받고 관음사에서 올라가 성판악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한라산을 간다. 아빠와 나는 각각 남자와 여자 숙소로 갈라져 들어와있어. 그는 10명 묵는 곳의 이층 맨 가 자리고, 나는 6명이 묵는 1층 자리다. 내가 묵는 데가 3000원 더 비싸서 나는 28,000원, 그는 하룻밤에 25,000원짜리 잠자리다. 김밥 2줄을 주고, 새벽에 한라산까지 차로 픽업해 주는구나. 남녀가 따로 들어가는 도미토리형 숙소야. 공용으로 쓰는 라운지와 화장실 겸 세면실이 있어. 샤워실은 사용을 안 해봐서 모르겠다. 주로 한라산 산행을 하는 이들이 이용하는 지 등산화나 신발은 밖에 벗어두고 실내화를 신고 다니게 되어 있네. 종일 산을 타고 왔다면 신발 냄새가 엄청나겠지. 개인 공간은 이층으로 되어있고, 나무로 짠 데다 개별난방이 스위치가 있고 베낭을 세워둘 쏙들어간 공간이 있어. 어제 밤 8시에 산행 브리핑이 있었는데 나는 못 듣고 말았구나. 닭요리가 유명한 근처에서 교래마을에서 닭칼국수와 바지락칼국수를 먹고 돌아와 바로 잠들었어.보증금을 내고 대여하는 수건을 가져가라고 아빠가 전화를 했는데 나는 "이따 브리핑 때요" 말만 하고 잠들어버렸구나. 새벽에 일어나니 그의 부재중전화가 딱 1통 와 있네. 예측한 듯 해. 낮동안 비행기에서 내려서 산굼부리 분화구를 돌아보았어. 무거운 베낭을 지고 비를 맞으면서 다녔더니 볼이 빨갛다. 한숨 자고 일어나 여기서 새벽일과를 했어. 그가 새벽에 절을 하는 나를 위해 일부러 사람이 적은 방, 그리고 삐걱거리는 소리로 다른 이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1층 자리를 예약을 했다는 걸 알았어. 그의 배려가 느껴져 고마왔어. 아침일과를 마친 후 어쩐지 감회가 새롭다. 새로 산 노트북으로 너희에게 편지를 쓴다. 이 노트북에는 아직 문서 프로그램이 안 깔렸어. 나는 와이파이가 되어 인터넷 블로그를 연결해서 편지를 쓴다. 노트북을 들고 온 건 옮겨가는 곳에서 새벽을 보내며 너희에게 편지를 쓰고 싶기 때문이었어. 우리는 이 여행의 목적을 4차 시험관을 시작하기 전 화이팅으로 삼았거든. 편지 속에 우리의 여행이 담기겠구나. 편지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 좋은 점은 너희와 연결된다는 느낌이 들고 내 안의 엄마마음을 활성화시키는 훈련을 하는 듯 한거야. 나쁜 점은 아무래도 포장을 하게 되는 듯 해. 그러나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이 말을 하든 포장을 하든 부모님의 실상을 자식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비가 듣는 소리가 들리네. 지금은 새벽 4시 반이다. 옆 칸에 한사람만 들어서 4자리가 비어있어.
나는 36리터, 그는 45리터 베낭을 꾸렸어. 트레킹화는 신고 등산화는 가방에 넣어왔어. 산 밑의 비는 산을 오르며 눈이 될거라서 스패치와 아이젠도 챙겨왔지. 아빠는 야간근무하고 퇴근하는 날이었어. 3박4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집을 깨끗이 치웠어. 빨래를 해서 널고, 대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싹 버렸지. 남은 음식도 처리했어. 마지막 남은 팥죽을 데워서 그에게 차려주었어. 짐 쌀 목록을 적고, 갈아타는 버스에 대한 정보를 출력해서 왔더구나. 하나씩 체크하면서 가방을 꾸렸어. 이 여행의 기획자는 아빠다. 그가 루트를 짜고 예약 및 모든 공정을 손보았어. 나는 "성산 일출봉과 섭지코지에 가고 싶어요. 최근에 읽은 설문대할망신화에서 성상일출봉을 등경대로 삼아 할망이 길쌈을 해서 제주를 창조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섭지코지는 제주 최대의 어장인데요, 거기에서 하루방이 음경으로 몬 고기를 할망이 음문으로 잡아올렸대요. 제주에서 섭지코지가 가장 풍요로운 곳이니까 거기 가고 싶어요. 그리고 김영갑 갤러리요. 제주를 사랑했던 사진가가 만든 갤러리래요. 거기서 아름다운 제주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말했지. 이게 우리의 여행이나 이벤트 방식이야. 나는 브레인 로망을 브레인스토밍 식으로 실제성과 실현성에 대한 고려 없이 읊어대고, 그는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채택해서 실현시켜. 나는 혼자라면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 눈 앞에서 진행되는 걸 보면서 감탄한다. 그가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사이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는 동안 나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워만 했구나. 그의 최대 로망은 한라산 등반과 우도에서 방어회 먹기였어. 우린 여행 안내서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로망을 먼저 살폈구나. 공항철도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어. 표를 받고, 짐을 부치고서도 시간이 남아 위로 올라가서 돈까스우동정식과 메밀소바알밥정식을 먹었어. 뜨거운 뚝배기를 만지다 그가 가벼운 화상을 입었어. 찬 물에 손가락을 담궈서 화기를 뺐어. 평일이라 비행기의 옆자리는 비어있었어. 우리 오른쪽 옆에는 50대 여자분들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있었어. 아이들도 거의 키운 그 나이가 되면 남편보다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지. 하지만 인생을 늦게 시작한 나는 남편과 다니는게 더 좋다. 아직까지는 그가 제일 친해지고 싶고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은 친구다. 제주여행 일정 중에 그의 지인이 내려온다는데 나는 조인은 절대로 안된다고 못 박았어. 만약 그렇게 하면 내가 바로 짐싸서 서울로 돌아가버리겠다고 말했어. 한 번 허용하면 사람 좋아하는 그는 둘이서 하는 여행에 타인을 끼워넣을 것 같았거든. 난 그런 건 사절이야. 그는 세번째, 나는 두 번째 제주도 여행이야. 한라산을 나는 처음 가본다. 1시간 정도 졸고나니 제주공항에 도착했어. 시외버스터미널까지 100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서 또다시 교래로 가는 700번 버스로 탔어. 버스는 비가 내리는 삼나무 길을 달렸어.
산굼부리 분화구를 보았어. 제주도의 360개 오름은 설문대할망의 설사탄으로 만들어졌어. 똥구멍으로 창조한 이야기는 힘이 느껴지고 시원해. 화산 폭발을 '설사'로 표현한 것 같지? 나는 드라마 촬영장이었다는 억새밭보다 산굼부리 분화구가 장엄하게 느껴져서 한참 쳐다보았어. 그는 20대때인 15년 전에 친구들과 여길 왔었다는 거야. 배가 고파서 군고구마와 보리빵을 두 개 먹었어. 비가 와서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지. 삼나무가 심어진 길을 걸어다녔어. 물안개가 올랐지. 산굼부리에서 대구 마리아의 전화를 받았어. 자궁경을 생리 7~9일 사이에 해야하는데 그게 내일이었어. 제주도에 여행 와 있다니까 다음 달로 미루자는 거야. 기분이 언짢았어. 한 달이 미뤄지면 나는 44살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자궁경 일정을 놓친 건 9월 시험관 이후 생리 일정이 뒤죽박죽이 되어서야. 과배란 후에는 호르몬의 작용이 좀 불안정해져서 생리주기가 짧아지거나 늘어지더라. 이번 여행 역시 생리주기를 예측해서 1달 전에 얼리버드로 예약한 거야. 결국 여행일정 때문에 자궁경을 못하게 되고, 그 역시나 노조의 대의원대회를 놓치고 왔어. 생각해보기로 했어. 많은 에너지를 들여 반복착상실패 검사를 했는데, 거기서 지적된 폴립제거를 안하고 이식을 하는 것 보다는 지적된 장애물들을 해치우는 쪽이 나을 것 같긴해. 오늘 한라산에 간단다. 기대가 된다. 개똥아, 산아, 잘 있거라.
두번째 새벽편지 : 한라산 산행 (관음사~백록담~성판악)
제주도에서 맞는 두번째 새벽이다. 게스트하루스의 커플룸이 있는 안채에 나와 있어. 주변을 둘러본다. 김치냉장고가 최소한 2대에다가 냉장고도 3대나 되네. 살림사는 부엌이야. 빨개 건조대에 수건이 가득 널려 있고, 개인용 이불이 개어져 쌓여있어. 씽크대에는 김가루에 밥을 비벼먹고 설겆이 안 해 둔 그릇과 한 들통의 깍은 무, 그리고 계란 3판과 식빵 여러줄이 있다. 아침식사로 토스트를 준다더니, 계란을 삶아서 주나? 여긴 게스트하우스의 관리동인가보다. 이 독채에는 방이 3개 있다. 그 중 제일 안 쪽 방에 들었다. 어제밤에는 여기가 마음에 안 들었어. 남편에게 성질이 났다. 종일 비를 맞으며 한라산을 올랐기 때문에 우리 옷은 거의 젖어 있었고, 등산화 안에서 불은 발은 울퉁불퉁하고 냄새가 아주 끝내줬다. 무거운 짐에 어깨가 빠질라 하고, 다리는 떨어져 나갈 것 같았어. 생전 가 본 게스트하우스라고는 이게 처음이면서 깜깜해서 도착한 게스트하우스의 예약된 방이 서글펐어. 커다란 창이 났는데 미닫이 출입문은 간유리로 문이었어. 불을 켜면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어. 이건 도저히 손님에게 주는 방 같지 않았어. 방음이 안되고 바닥은 냉골이었어. 개별 난방을 켜도록 되어 있었어. 알뜰한 이 남자가 또 돈 아끼려고 싼 데 숙소를 구했나 싶어 혼자 부르르 했다. 우리가 들어온 광치기해변의 게스트하우스는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 사이에 있어. 일출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며 그가 이 지점을 선택했어. 어제 다른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서 잤기 때문에 남은 이틀동안 머물 숙소는 아늑하고 사적인 공간이길 바랬어.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냄새나는 양말만 빨아서 널고, 손발 씻고 이만 닦았어. 눕자 마자 잠들었어. 아침에 일어나니까 그가 방에 널어두었던 옷들을 모두 옷걸이에 걸었더구나. 비에 젖은 등산복들은 거의 말랐더라. 나는 지금에서야 찬찬히 내가 있는 곳을 탐색하는구나. 새벽에 혼자 있는 시간에야 나는 말미잘처럼 자유로워진다. 내가 가방에 구겨져 담겨온 것 같더니 이제서야 제 모양을 회복한다.
어제 우리는 한라산을 등반했단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아 계단길이 온통 물길이었어. 우비를 입었지만 여름우비라 짧았어. 바지 안으로도 물이 흘러들었어. 아빠는 한겨울에 친구들과 올라온 적이 있었다는구나. 성판악으로 올라갔는데 눈과 산죽만 기억이 난대. 고생을 해서겠지. 이번에는 그래서 관음사코스로 잡았대. 나는 김삼순 드라마에서 한라산 산행을 보았어. 삼순씨는 사랑을 잃고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서 한라산을 울면서 올랐지. 우리는 남한에서 제일 높은 이 산에 왜 왔을까? 언젠가 설악산 봉정암에 가는 길에 만난 할머니는 딱 1가지만 기도하면서 산에 들라고 했어. 12시까지 삼각봉대피소에 도착했어야 했어. 하산 때문에 그 이후에는 산장에서 등산객을 차단해. 어제 밤을 새다시피한 나는 오전 내내 고전했다. 걸음이 느려서 아빠는 나와 보조 맞추기보담 시간을 관리하면서 앞서 갔어. 내가 그의 옆에 도착하면 그는 다시 출발했어. 그의 노랑 베낭커버가 나의 이정포였어. 스틱을 양 손에 쥐었지. 우린 11시 30분에 겨우겨우 마지막 대피소에 도착했어. 보온병에 담아간 뜨건 물을 부어서 컵라면을 말고, 김밥을 적셔 먹었어. 판초우의를 벗은 두 사람의 몸에서 김이 무럭무럭 났어. 장갑을 벗어 짰어. 등산화는 이미 빗물에 풍덩 빠져버렸어. 손가락과 발가락이 곱았어. 친구따라 왔다가 되돌아간다는 아저씨한테 땅콩막걸리 한 잔을 권하자 아저씨가 과자랑 김밥을 주었어.
1950미터의 한라산은 끊임없는 오름길이었어. 정상이 가까와지자 비는 진눈깨비로 변하더니, 발 밑에 젤리처럼 얼어붙었어.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에 쌓인 눈이 두껍다. 내려오던 사람들이 "1시 30분 통제해요. 내려가라던데요" 말할 때도 그와 나는 한번도 정상까지 간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어. 우리를 막는 그 말을 하는 그 사람 곁에까지 갈거라고 했어. 힘이 드니까 "수고했어. 이제 다 왔어요. 조금만 힘내요" "안녕하세요." 인사가 고마왔어. 응원의 마음이 느껴져 힘이 났지. 나는 '관세음보살' 염불 하다가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황소걸음을 떠 올리다, 어떻게 이 작고 나이든 몸으로 히말라야를 넘어왔냐는 질문에 '한걸음씩 걸어서 왔지'라며 수줍게 웃었다던 80 티벳난민 할머니 스님을 생각했어. 그래, 힘들지만 '한 발씩 계속 걸으면' 정상에는 언젠가는 도착하겠지. 제한시간이 있는 것까지 난임하고 같구나. 계속 시도해볼수 있는 게 아니라 제한시간이 있지. 우리는 과연 이 진눈깨비 속에서, 시간도 촉박한데 체력도 떨어진 상태에서 정상을 밟고 너희를 만나 안고 하산할 수 있을까? 어느새 한라산 산행은 나에게 난임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러자 더 포기할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미신이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으면 실제로 너희를 만나는 길에서도 나는 포기안하고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개똥아, 산아, 우리는 결국 백록담에 도착했단다. 내려가라고, 1시 30분 하산인데 2시가 넘었다고, 산에서 해지면 큰일난다고 산지기가 하산을 재촉하는데 아빠가 "저의 아내가 저 밑에 바싹 오고 있어요." 라며 시간을 벌어 주었어. 나는 종종걸음으로 올라갔어.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더 춥고 바람이 불고, 미끄럽고 가팔랐어. 정상지기가 지켜보는 동안, 우리는 백록담 이정표 앞에서 셀카를 찍었어. 그리고 내가 백록담이라고 추정되는 안개 더미를 향해 "개똥아, 산아 곧 만나자" 소리쳤단다. 곧장 그 말이 튀어나와서 목이 메었다. 나보다 먼저 간 그는 바람이 불어 안개를 헤쳐준 순간에 30초간 백록담을 봤대. 그가 좋은 일을 많이 했나봐. 우린 맨 나중 하산자였어. 산장지기는 안보이지만 여전히 백록담 부근인 데서 한라산 소주로 정상주를 한 잔씩 했다.
성판악 쪽 하산길은 내리막길이라 좀 수월했지만 모두가 돌길이었어. 부지런히 걷는데도 일정은 한 시간씩 늦었어. 진달래 대피소에서 1인당 딱 2개 이하만 파는 컵라면을 하나 사려는데 벌써 늦었다며 팔지 않겠다고 했어. 사라오름에는 아예 안 가고 부지런히 걸었는데도 성판악이 2.5km 남은 지점에서 해가 지기 시작했어. 우린 둘 다 지쳐있었고, 계속되는 구멍뚫린 검은 현무암 자갈 내리막길에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리고 있었어. 난 투덜거렸어. "내일 우도 안 가고 그냥 게스트하우스에서 쉬어야겠어요. 아님 갤러리에 가는 일정을 당기든지요. 너무 빡쎈 일정이예요" 노트북을 짊어지고 온 것도 후회가 되었어. 담에는 최경량으로 짐을 싸리라 다짐했지. 그때 내가 정상에서 만난 산장지기가 타고 내려오는 모노레일 소리가 들렸어. 비켜서서 구경하는데 그가 우릴 부르는 거야. "관음사에서 올라오셨다는 분들이지요?" 우리를 태워주었어. 우리 부부와 또다른 장비 없는 한 커플을 주워서 퇴근하는 거였어. 우리는 짐칸에 덜렁 올라탔어. 거기 앉아서 저무는 산을 보았어. 너무 순식간에 어두워져서 산이 무서워졌지. 7시부터 시작되어 5시 반까지 이어진 산행으로 피곤했기 때문에 추운 와중에서도 나는 꾸벅꾸벅 졸았어. 그는 덜덜 떨었지. 많이 고마웠어. 어두워지니 무섭더라. 택시를 타고 광치기해변으로 왔어. 흑돼지를 구워 먹었어. 그닥 큰 감동은 없는 무난한 맛이었어. 흑돼지집 바로 옆이 우리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였어. 산티아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산티아고에 가 본적이 없다네. 손님이 지어준 이름이래. 종일 벌벌 떨고, 기진맥진해서 우린 손, 발 씻고 이만 닦고 서둘러 잤단다. 이런 피곤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나지 않고 '그 산에 내가 있었다'는 감격이 더 크게 남겠지.
개똥아, 산아. 내가 못 본 백록담을 너희가 보겠구나. 너희가 한국사람으로 나는 이상 한라산에는 언제고 한 번은 오게 되겠지. 나는 백록담을 보는 걸 너희에게 미루지 않고 다음에 다시 올지도 모른다. 제주도가 마음에 들어. 여러번 가도 좋을 듯 해. 백록담에서 너희를 떠올린 것처럼 나는 진심으로 너희를 곧 만나고 싶다. 오늘의 여정이 우리가 너희를 만나는 여정과 비슷하리라. 오를 땐 진눈깨비가 내리고 한 발 한 발이 기도를 하면서 힘을 내고 응원을 하면서 가는 길이었지만 결국엔 정상을 보았고, 내려갈 때는 해가 비치고 비도 그쳐 있었지. 우린 너희를 만나게 될 거고, 그리고 그 이후는 또 다른 길이리라. 오르막이나 내리막이나 계속 가야할 길이겠지. 물론 우리가 나이가 많아서 너희를 기르는 과정이 남다르겠지. 해가 질테니까. 산부인과에서는 나를 노인 취급하지만 우리는 인생 시계에서 정오를 겨우 넘긴 시간을 살고 있단다.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온 분처럼 우리는 돕는 이들을 예비하셨으리라 믿어본다. 자궁경은 다른데 가서 안하고 그냥 대구 마리아에서 하기로 결정했단다. 한 달이 늦어지겠지만 내 자궁의 상태를 내시경으로 보고, 제일 잘 아는 분에게 시험관 하는게 나을 것 같아. 개똥아, 산아. 오늘은 섭지코지와 우도를 돌아볼거란다. 그럼 잘 있거라.
세번째 새벽편지 : 성산일출봉 일출, 섭지코지, 우도
개똥아, 산아 안녕.
오늘 새벽에도 일찍 일어나 게스트하우스 주방에 나와있어. 어제 새벽에 내가 만난 청년이 이집 중학생 아들인 걸 알았어. 우리 옆방에서 나온 청년을 놀라서 쳐다보던 나에게 꾸벅 인사를 했었지. 청소하던 이가 여주인이고, 빨래하던 나더러 화장실에 들어오려다 '미안합니다' 말한 게 이 집 주인남자고 말이야. 엄마가 아들과 남편에게 들기름을 발라 김을 굽고, 청국장을 끓여서 저녁을 차려주고, 도복 입은 아들을 픽업해서 학원에 데려다 주는 걸 부럽게 보았어. 여기가 그 가족의 생활공간인 걸 알았어. 그이가 예약 전화를 받는 걸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난 청년은 일하는 이고 이 분들이 주인 인가봐. 조심스러워서 오늘은 주방 전체 불은 못 켜고 헤드렌턴을 사용하고 있어. 조금 서둘 작정이야. 어제 내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우도에 늦게 들어갔고, 그래서 그가 원하던 방어회를 못 먹었거든. 그의 실망이 너무 커서 나는 오늘 새벽 내내 방어회를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을까 일정을 궁리했구나. 아무래도 다시 제주도에 겨울에 와얄 것 같아. 11월부터 먹을 수 있는 방어회를 우도의 그 집에서 한 번은 먹어야할 것 같구나. 어제는 성산일출봉의 일출을 보았고, 섭지코지와 우도에 다녀왔어. 여긴 일출 포인트야. 날이 밝아 바다와 성산일출봉이 모습을 드러내자 게스트하우스의 시설에 대한 불평이 쑥 들어갔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광치기 해변(이때의 '광'은 빛이라는 뜻이겠지?) 에서 해님을 기다렸어. 일기예보에는 일출이 7시 17분에 있다고 했어. 평소에 늦잠을 즐기는 아빠가 알람을 설정했어. 기모 달린 두꺼운 옷을 아래위로 입고서 우리는 해를 맞으러 해변에 나갔지. 도미토리에서 잔 많은 20대의 여행객들이 나와 있었어.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사이에서 뜬 해를 우린 보고 마셨어. 포항 영일만에서의 일출은 연오랑세오녀의 베를 생각하며 혼자서 본 일출이었어. 주로 나에 대해 생각했어. 어떻게 나의 왕국을 건설할까? 어떻게 하면 그 왕국에 해를 모셔올까 궁리했지. 성산일출봉의 일출은 설문대할망 신화를 생각하며,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는 일출이었어. 우리 가족에게 새 날이 밝길 기원했어.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길, 개똥이와 산이가 몸과 마음 건강하게 선연으로 우리를 찾아와주길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빌었다.
고혜경의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책에 보면 설문대할망은 위대한 여신 원형이 한국에서 드러난 모습이야. 할망은 성상일출봉을 등경대 삼아서 길쌈을 했댔어. 그 길쌈이 제주 자연에 대한 창조였겠지. 해뜨기와 길쌈이 연관된 게 연오랑세오녀와 설문대할망의 등경대 이야기일거야. 길쌈은 참으로 여성적인 일이다. 해를 뜨게 하기 위해서는 세오녀의 베가 필요하다는 것과 등경대에 불을 밝히고 길쌈을 한다는 것은 비슷하면서, 선행사건과 후행사건에서 다르다. 문명의 시작은 '불'과 관련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에게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많은 신화에서는 벌새나 코요테들이 불을 훔친다. 또 할머니의 손톱 10개를 빼서 불을 전달한 손자도 있었지. 창조신화에는 불이 등장한다. 불 또는 등불은 언제나 의식의 밝힘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과연 '개인의 신화'에서 불은 무엇일까? 그리고 길쌈은 무엇일까? 길쌈은 씨줄과 날줄을 교차해서 직물을 짜는 거다. 거기 새겨지는 무늬를 미리 예측하고 실을 바꾸면서 짜야한다. 그건 길쌈 전에 머릿 속에 어떤 그림이 있어야 가능하다. 길쌈의 무늬는 철저히 계산적이다. 더 공부해봐야겠지만 어렴풋이 이건 미래를 미리 선명하게 꿈꾸면서 하루하루 일정한 시간을 들여 준비해 가는 것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이건 1만 시간의 법칙, 양질전환의 법칙이 가동하게 할 매일의 실천과 관련된다. 세오녀처럼, 설문대할망처럼 나도 나의 길쌈을 해야겠다. 나의 왕국을 만들고, 거기에 해를 불러 오는 것에도 길쌈이 필요하고 아이 낳는 일에도 길쌈이 필요하다. 나는 여자가 아이를 낳는 이 일이 최고의 창조라고 생각한다. 개똥이, 산이 너희를 초대하려는 소망을 품고 병원을 방문하고, 음식과 영양제, 운동을 챙기고, 미래와 접속하는 이 편지쓰기 과정 역시 나의 베짜기다.
들어오면서 게스트하우스의 바다 보이는 데서 아침을 먹었어. 20대의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어. 도미토리는 남녀로 구분된 숙소야. 이 게스트하우스는 2개의 동이 있어. 우리가 묵은 데는 커플룸이고 바닷가는 도미토리였어. 빵을 두 쪽씩 토스트기에 구워서 잼과 생크림을 바르고 제주감귤쥬스와 먹었어. 설겆이를 해 놓고 나왔어. 아빠와 나는 귀가 활짝 다른 여행객들에게 열려 있었어. 그는 살발이로 사진을 찍는 세 명의 청년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사진이 잘 찍혔다고 아는 체를 하고, 나는 요청받지도 않았는데 생크림 통을 밀어주고, 스푼은 한 개로 잼과 생크림을 다 바르는 것 같다고 말했어.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처럼 진짜 세계여행자들이 모이는 숙소에서 묵어 보고 싶었구나. 세탁기를 돌리고, 등산화를 빨아서 개집 위의 빨래줄에다 널었어. 바람이 불어서 빨래들이 펄럭였단다. 아빠는 이 집의 개들을 아주 이뻐했어. 그는 길냥이, 개, 모두를 사랑한다. 지나치지 못하고 쓰다듬고, 말을 걸고, 한 번씩 놀린다. 아기도 참 좋아하고 사랑할 사람이야. 나는 너희를 그를 짝궁으로해서 초대하는 걸 참으로 다행으로, 든든하고 기쁘게 생각한단다. 그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할 사람이어서 안심이다. 너희도 믿고 찾아오길 바란다.
출발하기 전에 우린 사랑을 나눴어. 자는 방에 커튼이 없어서 불안했어. 골목 끝에 쟁여둔 것들을 찾자면, 청소를 하자면 그리로 와야했어. 욕실을 철수세미로 닦고 샤워기 꼭지로 물을 뿌리는 소리가 옆방에서 청소기 끝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로 가까이 들렸어. 이정재와 이미숙의 영화 장면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 음악을 틀어놓고, 옆방에서 소리가 들리면 자제하거나 이불을 당기거나 가지런히 했어. 나는 깔깔거렸지. 나는 곡식의 풍작을 기원하며 씨를 뿌린 밭 옆에서 섹스를 하던 옛 이야기 속에 들어와 있는 거지. 섭지코지는 하루방이 커다란 음경으로 휘저어 몰아온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할망이 음문으로 잡았다는 신화가 있는 곳이야. 이걸 풍요로운 섹스의 상징이라 읽은 건 고혜경박사의 시선에 동의해. 우리가 불모의 땅이 되지 않기를, 아니 내가 불모의 밭이 되지 않기를, 늦게 만난 이 좋은 사람과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기를, 생명의 도구로 쓰이길 몸으로 기원하는 일종의 기도의례라고 생각했어. 성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이 사람 덕분이다. 썸타는 20대는 바닷가 게스트하우스의 저녁 파티에서, 배 안에서 눈을 맞추며 장미가 여우에게 가르쳤듯 조금씩 다가 앉는 맛이 있을테고, 그런 과정을 다 거쳐 결혼한 사람과 여행하는 건 이런 게 좋네. 사랑이 그들에게만 있다면 부러워해야겠지. 결혼이 사랑의 무덤이 아니도록, 우리를 가깝게 했던 '사랑'이 이 안에서 맛들도록 해야겠지.
9시 첫 배를 타는 이들을 항구로 차가 실어나를 동안 우린 태평히 움직였어.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빨래를 했지. 제주의 바람과 햇볕이 우리 등산화를 뽀송하게 말릴 동안 이 근처에서 놀거거든. 짐을 방에 늘어놓은 채 해변을 걸어서 섭지코지를 찾아갔다. 중국인들의 관광차가 가득하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흥이 가ㅅ니다. 경치 좋은 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린 땅콩 막걸리를 한 잔씩 마셨다. 여행의 컨셉은 주유다. 술 주자 주유. 경치 좋은데서 한 잔씩 하는게 우리의 모토다. 오늘 안주는 깨공주, 제주 오메기떡, 번데기 한 컵이다. 그는 번데기를 못 먹어서 내가 다 먹었다. 오메기떡은 차조와 팥으로 만들었다는데 수수팥떡을 연상시키네. 지름길을 가로질러서 콜택시를 불러타고 배타기 전에 문어라면을 먹으러 갔어. 성게비빔밥은 없어서 나도 문어라면을 먹었어. 다시 콜택시를 불러서 성산항으로 갔어. 호박엿을 사서 입에 넣었어. 우도 들어가는 배의 선실이 따뜻해서 잠깐 눈을 붙였다. 남녀가 같이 움직이니 상대를 바리케이트 삼아 어떤 성의 여행자 옆에 가도 편안했어.
우도에서는 섬 전체를 도는 버스가 있었어. 한 명이 5천원 표를 사면 원하는 곳에 내려서 구경하고 다음 버스를 탈 수 있어. 우린 세 군데에서 내렸어. 우도봉, 검몰래, 서빈백사 해수욕장이야. 쪽파가 자라는 밭이 모두 검었어. 무덤을 싼 담이 인상깊었어. 옛날에는 말이나 소가 무덤을 훼손할까봐 둘렀다는데 마소가 사라진 지금까지도 시멘트로 무덤을 싸는 전통이 유지가 되니 이상했어. 우도봉에 올라서는 우도 전경을 봤어. 우도봉 정상에서 셀카봉을 파는 청년이 있어 재미났고, "여기까지 왔으니 사진 좀 찍자"는 부인, 또는 여친에게 "사진 빨 안 나온다. 찍길 뭘 찍어?" 라며 무안을 주던 남자에게 부르르 했다. 그런다고 핸펀 사진도 안찍고 단념한 그녀에게도 화가 났어. 사진 찍는 그의 눈에는 자기 옆에서 나이드는 여자의 아름다움, 세월과 자연의 흔적은 보이지 않나봐. 그녀가 세탁소에 맡기며 수발을 했을 뒷모습에 대고 차가운 레이저를 쏘았다. 그의 목에 걸린 니콘카메라가 사치스럽다고 느꼈어. 검몰래에서는 보트를 탔어. 놀이동산보다 더 재미있더라. 우도 팔경 중에 여러 개를 본 셈이야.
'회양과 국수군'은 아빠가 방어회를 먹기 위해 검색해둔 집이야. 그는 산호로 만들어져 흰 서빈백사 해변에 도착하자 마자 거의 달리다시피 식당으로 들어갔어. 하지만 회는 시간이 부족해서 시킬 수 없다는 거야. 결국에는 방어 조각이 들어간 회국수만 시켰어. 그가 너무나 아쉬워해서 노량진수산시장에서 1kg 떠다 먹자, 이사하고 생일주간에 친구 불러서 한 상 차리자 해도 위로가 안되는 듯 했어. 결국 성산항으로 들어가서는 하나로마트 가서 방어회를 사 왔어. 바람이 부는 게스트하우스 앞 테이블에서 소주 곁들여 둘이서 먹었지. 먹으면서도 말했어. "이건 우도에서 먹은 것과 달라. 생선 크기가 달라. 거긴 대방어를 잡아서 회를 친거고 이건 잔챙이야. 세상 어디에도 그 가격에 그만한 질의 방어회와 머리구이, 회국수, 매운탕을 주는 데는 없을 거예요."
아무래도 방어회가 충족이 안되는거야. 나는 당황하고 미안했어. 또 하나 미안한 게 있어. 회국수에 배가 불러서 저녁의 흑돼지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가 이 게스트하우스를 선택한 건 사실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어. 그것도 못하고 말았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는데 말이야.
내 마음이 다음에 있을 시험관, 이사, 집들이로 오락가락 하는 동안 그는 오롯이 현재를 즐기는 듯 했어. 아빠가 말했어.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해요. 아이가 있든 없든 그렇게 살아요." 나로서는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보다 이 말이 더 고맙단다. "괜찮다. 아이는 꼭 오니까, 또 너희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잘 되겠지. 어디 병원이 좋으니 거기 가봐라"라는 말보다 "둘이서 행복하게 살면 돼. 그거면 돼." 라고 어른들이 말해주는게 훨씬 마음을 편하게 한다. "수고한다. 힘내라" 한 마디면 충분해. 오늘은 김영갑갤러리에 들렀다 2시 반 비행기로 집으로 돌아간단다. 개똥아, 산아, 그럼 잘 있거라.
네번째 새벽편지 : 철새 대형, 김영갑갤러리, 집에 돌아오다.
개똥아, 산아. 네번째 편지를 서울의 집에 돌아와서 쓴다. 원래는 어제 도착하자 마자 김장하러 외할머니댁에 내려가려고 했어. 그랬다면 이 편지는 거기서 쓰게 되었겠지. 하지만 여행짐을 풀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다른 데로 떠나는게 피곤하더라. 아빠는 어제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야간 출근하셨어. 나는 삼박사일만에 돌아온 우리집에서 편하게 잤다. 김장하러는 오늘 내려갈거야. 비가 오고 기온이 떨어진다고 김장 날을 하루 땡기셨어. 그래서 내가 가봐야 할 일이 적을 것 같아서 늘잡는 면도 있지. 아빠는 퇴근해서 쉰 다음에 우리가 새로 이사갈 집 전세 계약을 할거야. 공동명의로 해달라고 내 도장을 꺼내 놓은 우리집 익숙한 내 자리에서 너희에게 새벽편지를 쓴다.
어제는 일출을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방식으로 보았어. 그는 성산일출봉에 가서 일출을 보고 싶어했어.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나는 새벽에는 모닝페이지하고 절하고, 그리고 노트북에다 너희에게 편지를 쓰는 내 방식대로 안온히 보내고 싶었어. 그걸 희생하고 그에게 맞추기가 싫더라. 결국 나는 광치기해변에서 일출을 보기로 했어. 이건 우리 두사람이 같이 여행하는 과정에서 따로 보낸 일정이야. 같이 하면서 따로 할 수 있는 이런 게 나는 진화라고 생각해. 그는 6시 10분 알람에 일어나 걸어서 출발했어. 결국 흐려서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는 못 보았지만 일출 부근의 하늘을 찍어서 돌아왔어. 전화를 거니까 비가 와서 그치길 기다리며 소주를 곁들여 문어라면을 먹고 있댔어. 결국 콜택시를 탔어.
나는 일출시간 맞춰 바다로 나갔어. 새떼들이 가득 하늘을 가로질렀어. 저 새들은 겨울을 보내러 남쪽으로 가는 걸까? 한 무리가 아니라 여러 무리가 연달아 일출을 보러 나간 나의 앞에서 날았어. 그게 일종의 오라클처럼 생각되었어. 고혜경선생님은 신화를 전공하는 자로서 설문대할망신화를 살려내는 답사여행에서 우도를 방문했지. 그 배에서 돌고래를 보았다고 했어. 돌고래는 그녀에게 무척 특별한 동물이지. 나에게는 철새들이 매우 중요한 아이콘이야. 나는 '콩두'라는 닉넴을 사용해. 서른다섯살 즈음에 시작된 중년기전환(이건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야. 마흔을 두번째 사춘기라고 하지.) 초입에서 나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지. 이름을 스스로 짓는다는 건 아버지나 스승님이 주시는 이름을 받을 때처럼 의미있는 일이야. 동음이의어인 이 이름에는 여러가지 풀이가 있어. '콩쥐의 두꺼비,' '콩닥콩닥 두근두근(follow your bliss!)', '콩豆' 와 함께 네번째 뜻은 '두번째 콩새'야. 콩새는 참새와 닮은 작은 새지만 철새기 때문에 자신의 하늘길을 날아서 멀리 다녀와. 철새들은 V자 편대를 이뤄 무리로 이동을 하지. 이 대열은 앞의 새의 날개짓 덕분에 생기는 상승기류를 이용할 수 있고, 바람의 저항도 줄이는 매우 경제적인 방식이야. 함께 가면 멀리갈 수 있는 이유지. 선두에 선 새가 있어. 그 새가 가장 위험에 많이 노출되고 바람의 저항도 세게 받아. 콩두라고 이름을 지을 때 나는 선두에 선 새가 아니라 두번째 새가 되겠다는 거야. 이 말은 어쨎든 무리로 이동하면서 내 동아리 안에서 역할을 다하겠다는 의미였지. 그런데 이거 아니? 철새들의 선두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무리 안의 새들이 교대로 맡는다는 거야. 그 바닷가 일출을 배경으로 내 앞에서 날아가는 새떼를 보면서 '콩두'라는 내 이름을 생각했단다. 선발대이든, 후발대인든, 본대든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역할에 충실할거라는 거야. 그리고 혹시 두번째 콩새가 아니라 첫번째 콩새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시기라면 기꺼이 소임에 충실하리라 나는 다짐했단다. 언뜻 변경연에서 사부님이 나에게 했던 당부 '모두가 일정한 속도와 보폭으로 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라'는 게 떠올랐어. 나는 올해 목표로 '1주 1책 1칼럼, 새벽 4시 무렵의 두 시간 글쓰기, 1일 1문장'을 꼽았었어. 그건 매일 읽고 쓰겠다는 다짐이었지. 어느 새 나는 그걸 놓치고 있었지. 같이 가는 이들이 없다는 이유였어. 놓치고 있던 그 역할로 다시 돌아가리라 다짐했단다. 감동을 잘하는 나는 눈물을 흘렸단다. 그리고 두 팔 벌려 해를 안았어. 두 팔을 아주 번쩍 쳐들었지. 입을 벌려 해를 삼켰어.
직장에서 메일로 도착한 다면평가 서류를 작성해서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컴퓨터로 메일로 보냈어. "난임을 사유로 한 질병휴직중임. 업무, 목표, 추진상황, 성과 및 실적 없음"이라고 썼어. 토스트를 먹는데 보니까 내 또래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분이 도미토리에서 나오고 있었어. 나는 남편과 같이 왔고, 그가 전반적인 것을 검색해서 무임승차하듯 왔지. 혼자서 여행을 떠나고 20대들만 있는 저 숙소에서 묵을 수 있는 그 분의 용기가 경탄스럽고 부러웠어. 10시가 체크아웃이어서 우리는 짐을 모두 싸짊어지고 콜택시를 불러서 김영갑갤러리로 이동했어. 제주에서는 외진 곳인 중간산 오름이 보이는 삼달리의 폐교를 개발해 만든 갤러리였어. 그의 말대로 외지든 시내에 있든 그의 사진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소수일테고 그들은 어디에 있든 찾아오겠지. 우리처럼 말이야. 1957년 서울생인 그는 20대 후반에 제주를 접한 뒤 몇년은 서울과 제주를 오가다가 아예 제주에 정착했어. 결혼은 하지 않았고, 일반인들이 말하는 일상은 없이 오로지 제주의 오름을 찍었어. 많은 전시회를 했어. 마지막 전시회는 2005년 3월에 있었어. 그는 그때 루게릭병으로 투병중이어서 그 전시회에 갈 수 없었어.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 그는 자신이 손수 일군 갤러리의 마당을 걷는게 투쟁이었어. 건강할 때나 병이 들었을 때나 그의 눈은 열정으로 빛이 나더라. 그는 제주에는 그를 편안하게 하는 '평화로움'이 있댔어. 그가 사랑한 중간산 오름 용머리오름의 모습은 마치 여인의 누드화같았어. 20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 찍었댔어. 오름을 볼 때처럼 감동스러웠단다. 그의 사진 속 오름을 그가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 지를 나는 알 수 있었어. 아름다웠어. 나는 그의 작업실처럼 이사가는 집의 작업실을 꾸미려고 작업실 사진을 많이 찍었단다. 한 벽은 책으로 가득해. 창문턱에는 그가 손수만든 테라코타 조상이 있었어. 정 가운데는 창문이 있어서 현관으로 들어오는 손님들과 손수 가꾼 정원과 학교였을 때부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나무들을 볼 수 있었어. 그의 자리 앞뒤는 카메라와 현상물품이었어. 나는 새로 이사갈 집의 작업실을 이렇게저렇게 상상하면서 그 공간에 있었단다. 사부님과 약속한 나의 첫 책은 '신화' 주제야. 이건 정말 소수만 관심심을 가진 주제지. 나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딴 사진 갤러리를 삼달리 오지에 두고서도 '올 사람은 다 온다.'고 믿었던 것처럼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을 생각하며, 내가 본 아름다움을 성실히 보이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언제나 무게나 두려움에 의한 뒷걸음질은 내가 '저자'나 '창조자'라고 생각하는데서 온다고 한 건 줄리아 카메론이다. 그녀는 자신을 '창작의 도구' 또는 '통로'라고 개념하길 권했지.
김영갑갤러러 건너편에 흑돼지 돈까스를 하는 집이 있대서 찾아갔어. 식사 메뉴는 중단되었다네. 귤나무가 싱그런 귤을 가득 매달고 있었어. 김영갑갤러리 쪽 라인의 식당에 갔어. 나는 고기국수를 시키고 그는 떡만두국을 시켰어. 알고 보니 서울서 내려온 자매가 식당과 옆의 편의점을 운영하는 거였어. 이모는 사진을 찍는 분이었고, 제주도에 내려온 지 28년이나 되었고, 엄마는 작년에 내려왔다는 거야. 이건 우리를 공항까지 태워준 젊은 부부가 알려준 말이야. 우린 차를 얻어탔지. 비행기를 타고 친척의 장례식에 가는 길이랬어. 그 부부도 올해 제주도로 이사를 했댔어. 카라반을 두 대 들여서 여행객을 받는다고 했어. 6살난 딸아이가 재롱잔치에서 발표할거라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내내 소고 가락을 손으로 연습하고 있었어. 많이 고마웠어. 제주도 여행에서 고맙다는 문자나 선물을 보낼 데가 두 군데 있다면 이 가족과 한라산 하산할 때 모노레일을 태워준 분이야. 그런데 우리를 태워주었다고 혹시나 그 분이 말을 듣지 않을까 아빠는 염려한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제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표현하고 싶은데 그런 점도 있을 것 같아 조금 망설인다.
개똥아, 산아, 이번 제주도 여행은 두 사람을 더 짙게 묶어주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했던 여행이었어. 한라산, 해변의 게스트하우스, 성산의 일출, 새떼들, 김영갑작가님...우리에게 힘을 주는 많은 이들을 만났다. 엄마와 아빠는 행복했구나. 이런 시간들이 풍부한 영양분을 우리에게 공급한다. 힘을 많이 충전했다. 개똥아, 산아 곧 만나자. 백록담에서처럼 소리쳐본다.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울린다. 오늘 계약을 하고, 12월 5일에 이사갈거란다.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구나. 그럼 잘 있거라. 사랑을 보낸다. 2014. 12.1 엄마가
ps.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여행 잘 다녀왔어요. 제주 참 아름답네요. 여행을 그닥 좋아하지도 않고, 해 본적도 없는 저인데요, 저 사람 덕분에 잘 다녀왔어요. 여행기를 쓰면서 또 한 번 즐거웠네요. 시작하기 전에 일부러 이런 여행을 만들어준 저 사람에게 많이 고맙습니다. 정말로 충전이 제대로 되었어요. 1차 시험관을 시작하던 5월 전에는 봄꽃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그때 정말로 행복했어요. 그 덕분에 1차 채취에서 냉동이 나왔죠. 냉동이 있는데도 1차 시험관의 실패는 깊은 우울과 실패감을 불러왔습니다. 3차를 실패하니까 또 우울했어요. 4차 시험관은 1달이 더 미뤄졌습니다. 자궁경을 다음달에 해야한다는군요. 게다가 인제 신선1회, 냉동2회 지원이 남아있는 상황인데요, 어머님의 의료보험을 우리와 같이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겼어요. 지금은 3인 가족으로 지원을 받고 있어요. 바라기로는 대구 마리아에서의 첫 시술에서 아이를 만나면 되는거지요. 어차피 정부지원은 저걸로 끝이니까요. 대구 마리아는 5일배양으로만 냉동한다고 합니다. 몸을 잘 만들어서 냉동이 나오길 욕심내어 봅니다. 4차, 5차, 6차 이런 식으로 차수가 계속 쌓인다면 저 사람이 지치지 않을까요? 저는 조금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시험관을 쉬는 동안에 자임을 노력하는데요, 배란일을 체크하는 게 좀 지쳐요. 너무 지치기 전에 우릴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해가 질까 불안하거든요. 복직을 할거면 1월 15일 이전에 직장에 알려달라고 합니다. 저는 휴직을 연장할 작정입니다. 그래도 이사갈 생각에 설렙니다. 이사가면요 햇빛를 받으며 매일 걷기운동하러 나갈 겁니다. 개똥이와 산이를 몸과 마음 건강하게 선연으로 만나기를 발원합니다. 저희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길 빕니다. 저희를 지키고 옹호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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