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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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한국화’를 그려보자
없는 듯 하면서도 있고, 있는 듯 하면서도 없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밤에 보는 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혹자는 ‘마누라!!’라고 강한 어조로 말하겠지만 그것 역시 아니다. ‘밤에 보는 꽃’도 낮과 마찬가지로 어둠과 함께 화려하다. ‘마누라’는 없어서도 안되며 ‘있는 듯’해서는 더더욱 안되는, 항상 생각나고 노상 아름다운 존재 아닌가. (전적으로 개인적 견해임)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채색을 하지 않은 수묵화는 한국화의 절정 아닌가. 흰 비단에 먹의 농담으로만 표현한 절제미는 아름다움 그 너머의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흑백의 절묘한 조화요, 여백의 미라고 말한다. 단조로우면서 지루하지 않다. 꾸미지 않았는데 찬연하다. 비움으로 담백하며 흥취가 돋는다.
오전 8시 반이 가까워진 시간, 지하철 2호선 9-3번 플랫폼, 만원의 지하철.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아마도)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있어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례’다. 그날도(5/31) 어김없이 ‘나만의 의식’을 행하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름 없는 이 공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보았다.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출근시간’이라는 특수성으로 무장하여 ‘비움’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 공간이 비어 있었다.
그것은 한 폭의 아름다운 ‘한국화’였다. 비어 있는 좌석은 흰 비단이었고 사람들은 수묵이었다. 한동안 그 여백의 미를 음미했다. 인위적인 상황임에도 자연스러웠고 사람들의 무표정에서 흥취가 돋는 것 같았다. 기교를 부리지 않아 담백했고 바쁜 시간임에도 여유롭고 안정감이 있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한국화에도 뒤지지 않는 수작이었다. 이 아름다운 작품을 그린 사람은 유명한 화백도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였다.
대한민국 지하철에는 정부의 정책운영에 따라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 좌석의 4~5% 수준이라고 한다. 이 수치가 적절한지 아닌지 내가 판단 할 수는 없다. 이 제도에 대해서도 논란이 참 많다. ‘비워 둬야 한다’와 ‘앉아 있다 양보하면 된다’가 그것이다. 무엇이 정답일까? 한 쪽은 염려와 걱정의 시선으로, 다른 한 쪽은 효율적 측면으로 맞선다. 둘다 맞는 말이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비워 둬야 한다’는 것이다. 임산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육체적인 부분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부분이다. 임산부 배려석에 누군가 앉아 있을 때 비켜 달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임산부 배려석이 있기에 일반석에서 배려 받기도 눈치 보인다. 노약자석은 말 할 것도 없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스트레스만 쌓인다.
배려는 양보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양보는 사양이다. 사양은 받지 않는 것이며 거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임산부를 진정으로 배려한다면 그 자리를 스스로 사양하고 비워 둬야 한다는 말이다. 제도의 모순해결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논란에 대한 논의와 개선은 위정자들에게 맡기자. 우리의 몫은 그 제도의 참뜻과 의도를 파악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면 감탄을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공감하고 진실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예술작품은 각자마다 다를 수 있다. 한국화일수도 있고, 춤일수도 있다. 자연일수도 있고 일상의 사소한 것일수도 있다. 일상의 사소함이 마음속에서 공명하면 우리는 ‘와! 예술이다!’라고 탄복하지 않는가.
오늘부터 지하철 안에 예술작품 하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비워진 자리를 음미하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참’에 감격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멋들어진 한국화의 화백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배려와 양보가 자연스러운 예술이 되는 그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오늘도 지하철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