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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1일 13시 00분 등록

거인의 어깨에 올라간 자, 세상을 얻는다.

11기 정승훈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내가 전기설계사무실에서 전기설계를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CAD도면이 일반화돼서 필요치 않은 작업이지만, CAD가 없었던 그땐 건축도면을 Back Drawing하는 것이 처음 내 일이었다, 건축도면을 거꾸로 베껴서 그린 후 뒤집어서 전기도면을 그린다. 그래야 전기도면이 틀려서 지우더라도 건축도면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도면엔 입면도, 투시도, 조감도, 단면도 등이 있다. 전기 설계는 건축 평면도 위에 한다. 그래서 그 시절 난 많이도 건축 평면도를 따라 그렸다. 건축 평면도는 바닥에서 1m~1.5m 높이에서 건축물을 잘라내고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을 나타내는 도면이다. 건물용도에 맞는 동선을 고려하여 공간을 배치하고 창호의 위치를 잡는다. 평면도는 일상의 눈높이에서는 볼 수 없다. 설계자가 상상력이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니 가능한 일이다.

 

공자가 나이 들어서 주역을 좋아하였다. 집에 있을 적엔 주역을 책상 위에 놓고 보았고, 밖으로 나갈 때는 배낭 속에 넣어 다녔다.” 공자는 주역의 죽간 끈을 세 번이나 다시 역었다(위편삼절韋編三絶)고 한다. 춘추시대의 어려운 난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었을 것이다. , 상 시대처럼 거북이 배껍질()과 소 어깨죽지뼈()를 보며 점을 치진 않았다. 대신 주역에서 고대의 이야기를 통해 사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논리를 보았다. 서른의 나이부터 공자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공자는 제자들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했다. 그 사람들과 했던 많은 질문과 대답들이 지금의 빅데이터다. 공자는 사십대 늦은 나이에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이 더 주어져서 쉰 살까지 역을 공부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 공자는 쉰 살 나이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 허물을 피하며, 스스로 운명을 알게(知天命) 되었다. 공자는 주역이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이라는 해결책을 찾았다. 어디에서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 십여 년을 떠돌다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쓰다 갔지만 몇 천 년 동안 동양 사상계의 거인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 한 명,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간 사람이 있다. 뉴턴은 어느 날 갑자기 사과나무 밑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만을 보며 유레카를 외친 것이 아니다. 뉴턴은 자신이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뉴턴에겐 여러 명의 거인이 있었다. 데카르트라는 거인에게 해석기하학을, 케플러라는 거인에게 행성의 운동에 관한 세 가지 기본 법칙(타원궤도의 법칙,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조화의 법칙), 갈릴레이라는 거인에게 관성의 법칙을 배워 그것들을 종합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완성했다. 그리하여 뉴턴 그 자신 스스로 과학계의 거인이 되었다.

 

공자와 뉴턴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영역에서 거인을 만났고, 스스로 거인이 되어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있다.

 

거인의 어깨.jpg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

 

매주 월요일 낮 12시부터 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간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11기 동기들의 칼럼과 북리뷰를 본다. 같은 눈높이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각 동기 글의 장점과 아쉬운 점, 좋은 표현들, 구성까지 보인다. 그리고 내 글을 보니 부족한 점과 보안해야할 점도 알게 된다. 가까이 보아야 잘 보인다지만 멀리 보니 더 잘 보였다.

 

내가 거인의 어깨위에 한 번에 올라간 것은 아니다. 처음엔 옆에 두고도 뉴턴처럼 거인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나에게 웨버라는 이름거인을 소개해준 것은 교육팀이었다. 웨버이기에 과제 시간 체크하고 독려하면서 글 내용을 보고 댓글 달았다. 의무감처럼 했다. 솔직히 내 과제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우려도 했다. 거인의 발밑에서 열심히 해보려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다 거인을 줬는데도 거인을 못 알아보는 게 안타까웠는지 교육팀 선배들이 거인 활용법에 관한 팁을 줬다. 물론 그들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칼럼 쓰는 것을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 길게도 써보고 짧게도 써보고 다양하게 써봐라.”라고 직접적으로 얘기하기도 했고, Morning Page라는 도구를 활용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그저 역시 웨버이러며 추임새만 넣어주는 선배도 있었다. 그리고 난 알았다. 거인 활용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이제 거인의 존재를 알았다. 신기했다. 존재만을 알게 됐는데도 뭔가 뿌듯했다.

 

우선 우리 교육과정 커리큘럼을 다시 봤다. 그러니 보이더라. 왜 책 구성을 이렇게 했는지, 북리뷰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쓰려고 하는 주제는 이미 세상에 다 나와 있다. 독자들은 우리가 누군지 모른다.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우린 거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인의 어깨를 빌려야 한다. 그들의 말을 내 말처럼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각자의 장점과 삶의 이력에서 주제를 찾아야 한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러기에 1년의 연구원과정이 끝났다고 저절로 찾아지는 게 아니라고 한 것이다. 6월까지 커리큘럼은 입문과정에 불과하다. 7월부터 본격적인 심화이며, 10월부턴 내면 깊숙이 본질적인 것들을 탐구하고 11, 12월 나 자신을 알고, 1월엔 책 쓰기 연습에 돌입한다. 알고 나니 책에서 뭘 봐야하고, 쓸거리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여기까지 오니 거인의 허리더라. 여기까지 오기에 시간이 제일 많이 걸렸다. 허리까지 왔더니 시야가 환해졌다. 라식수술을 하고 난 후 세상이 다 선명해 보이는 그 느낌이다.

 

직관이 뛰어났던 구본형이란 거인이 옆에 있었으면 좀 더 수월 했을까? 불친절한 교육팀 덕분에 내가 이렇게 찾게 만들었으니 감사해야하나. 다행히 직관이 뛰어난 동기의 공간에 대해 써보는 것도 좋겠어요.”라던 말 한마디에 내 주제는 문화+공간이 되었다. 좀 넓게 파는 것이 좋다. 그래야 깊게 팔 수 있는 것이다. 2주간 Morning Page1시간씩 쓰고, 글쓰기 책을 보며 고민을 하다 나만의 contents를 목록화하면서, 떠오르는 글감들은 노트에 적거나 바로 노트북에 쓰고 있다. 이렇게 하고 나니 드디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공자에게 주역, 나에겐 동기들의 칼럼과 북리뷰다. 또한 뉴턴의 거인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우리보다 앞서 경험한 선배 연구원들이다. 칼럼을 묶어 책을 출판한 선배들의 칼럼까지 보고, 선배들을 찾아가 인터뷰도 하려 한다. 그럼 지금보다 더 멀리 더 자세히 보일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책을 쓰게 되리라는 나의 천명을 알게 된(知天命) (내년이면 쉰이다), 곧 세상을 얻으리라.

 

IP *.124.22.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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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08:36:58 *.75.253.254

언제부턴가 칼럼에 사진이나 그림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사진을 올려보려 했을 때 느낀 점이지만, 쉽지 않았어요. 나의 칼럼을,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상징적으로 잘 드러낼 수 있는 사진이나 그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고민하는 것 만으로도 내가 쓴 글을 다시 곱씹어 보게 되고, 한번 더 요약하게 되고.. 그래서 칼럼에 들어갈 사진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제목을 고르고 정하는 것 만큼이나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

 

 

그리고 칼럼 중에 아래 글 읽고 고개를 한참이나 끄덕였어요.

 

"그러기 위해선 각자의 장점과 삶의 이력에서 주제를 찾아야 한다."

 

"좀 넓게 파는 것이 좋다. 그래야 깊게 팔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거인의 힘을 빌려 세상을 보고, 자기가 본 세상을 깊이 만큼 자신도 거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어요.

 

칼럼 정말 잘 읽었어요 ^_^)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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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11:21:58 *.124.22.184

사진과 그림을 같이 올리는 건 글만 보는 지루함을 커버하기 위한 전략? ㅋㅋㅋ

우리도 거인이 될 수 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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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12:48:06 *.226.22.184

문체가 바뀌셨네요.^^


'구선생님께서 계셨으면 저에게 뭐라고 하셨을까?'가 가끔 궁금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글자크기도 아주 좋아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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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14:11:01 *.124.22.184

그쵸? 구선생님 계셨으면 뭐라고 하셨을지 궁금하더라구요. 

글자 크기 업로드하면서 키웠어요.^.^


문체는, 그런가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긴 해요. 문체보다 구성과 소재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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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14:37:59 *.146.87.11

저 개인적으로 이번 칼럼 제일 마음에 팍 꽂혔습니다!!

연구원 활동을 한지 이제 2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조급함도 있고 머리가 터지길 바랬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래 구절이 가장 꽂혔습니다.


리가 쓰려고 하는 주제는 이미 세상에 다 나와 있다. 독자들은 우리가 누군지 모른다.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우린 거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거인의 어깨를 빌려야 한다. 그들의 말을 내 말처럼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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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4 20:53:14 *.124.22.184

원래 퇴고를 잘 안하는데 이번 컬럼은 여러 번 수정을 했어. 뒷부분도 추가하고...

칼럼처럼 검토하고 생각하느라 책읽기가 잘 안된 한 주이기도 했고, 대신 고민도 많고 알게 된 것도 많았어.^.^

성한한테 꽂혔다니 기분 좋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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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4 10:00:42 *.216.233.132

2개월만에 득도를 하신 것 같습니다. 웨버님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가슴 속 깊이 느껴집니다. 항상 멀리까지 보시고 계획을 세우시고 준비하시는 모습에 저도 한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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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4 20:55:39 *.124.22.184

ㅎㅎㅎ 깨달음을 얻었죠. 달라진 건 내 마음밖에 없는데도 왠지 뿌듯해요. 오히려 여유도 생기고...

 칼럼 쓸때는 너무 열정이 가득했죠. 이제 좀 느긋해지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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