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승훈
- 조회 수 1347
- 댓글 수 1
- 추천 수 0
히파티아처럼 되기를 희망한다.
11기 정승훈
월요일이면 그곳에 간다. 그곳엔 책이 있고 창밖으로 공원이 보인다. 서가로 꽉 찬 그곳엔 책은 많지만 사람은 많지 않다. 그곳은 ‘마을문고’다. 2주에 한 번 1시부터 5시까지 봉사하는 곳이다. 봉사자를 위해 종류별 커피와 약간의 간식도 마련돼 있다. 조용해서 책 읽기에도 좋은 곳이다. 예전엔 권당 100원이라는 책 대여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그런데도 이용객은 적은 인원이며 정해져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를 발판 삼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땅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그리스 문화를 널리 알렸는데, 그 중 하나가 이집트 북부에 있는 도시 알렉산드리아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이집트를 차지하고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를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학문과 예술의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고대의 가장 크고 유명한 도서관이 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지었다. 물론 최초의 도서관은 아니었다. 아테네에는 공공도서관이 있었으며 플라톤(아카데메이아)과 아리스토텔레스(리케이온)의 개인도서관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서관 분류의 원칙을 만든 사람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많은 책을 보유하고 이를 관리하는 도서관 관장과 사서도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막 관장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테온이었으며, 도서관 사서는 테온의 딸로 첫 여성 수학자인 히파티아다. 그녀는 수학과 철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녀가 수학 강의를 하는 날이면 온 귀족들의 마차가 무세이온을 향했고, 길에서 히파티아를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젊고 아리따운 여성에게 고개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미모가 워낙 뛰어나 여러 사람의 구혼을 받았고 그때마다 “저는 이미 진리와 결혼했습니다.”라는 말로 비껴갔지만, 그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비단 외모 덕분만이 아니었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아테네 학당(1511)> 원 안의 여인이 히파티아
알렉산드리아의 중심인물이던 히파티아의 존재가, 이단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매파 성직자인 주교 키릴로스에게는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상의 자유를 설파하고 과학과 학습을 형상화하는 등 이교도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히파티아를 납치하여 마구 때린 후 머리카락을 마차에 묶어 케라레움이란 교회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옷이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는 굴 껍데기로 찢겨나갔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은 불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수많은 학자들이 자유라는 학문의 연료가 사라진 알렉산드리아를 떠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알렉산드리아는 예로부터 전해 오던 학문의 중심이라는 명칭을 다시는 찾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된 것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카이사르가 이집트 함대에 지른 불에 도서관이 불탔다고 하기도 하고, 이슬람교도들이 도서관을 파괴했다고도 한다. 단지, 인간중심의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이 신성을 중요시하는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여길 수 있었음을 짐작해본다.
2002년 이집트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자리에 초현대식 도서관을 건립됐다. 건물은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 했는데, 이는 태양이 인간 세계와 문화 활동을 비춰준다는 고대의 의미를 되살린 것이다. 도서관의 외벽에는 각 언어의 글자들을 새긴 석판이 모자이크처럼 장식되어 있다.
월요일이면 난 마을문고로 간다. 그곳은 나만의 도서관이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사회를 만나는 곳이다. 연구원 과정이 끝나고 복합문화공간을 바로 시작하지 못하면 그곳은 나의 모의 시험장소가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기와 독후활동을 하고, 방학특강을 할 수도 있다. 오전 시간엔 부모 대상으로 강의도 하고 책모임도 할 수 있다. 나는 그곳에서 ‘히파티아’가 될 것이며, 마을문고는 한국의 히파티아로 시작하는 첫 무대가 될 것이다.
편협한 종교의 공격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히파티아가 훗날 계몽 사상가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패미니스트 철학계에서 부활한 것처럼 나에게도 부활했다. 언젠가 나의 복합문화공간엔 ‘마차를 몰고 히파티아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