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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4일 10시 17분 등록


영화 택시 운전사가 인기다. 19805, 서울의 택시 기사가 외국인 기자를 광주까지 태워주고 왔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 곧 관객이 천만을 넘을 것 같다고 한다. 지난 주말에는 대통령과 영화 속 외국인 기자의 모티브가 된 실제 기자의 부인이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고 해서 하루 종일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택시 기사 역을 맡은 영화배우 송강호의 팬으로 그가 찍은 영화는 대부분 극장에서 봤다. ‘밀정’, ‘변호인’, ‘관상등 최근 영화도 재미있게 봤지만, 가장 재미있게 봤고 지금까지도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반칙왕이다. 2000년에 개봉했으니 벌써 17년이나 됐는데, 아마도 이 영화를 계기로 그의 팬이 되었던 것 같다.

 

반칙왕은 무기력하고 소심한 은행원이 레슬링을 통해 변화해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다. 그는 매일 지각에 실적도 가장 낮아 부지점장에게 찍혔고, 복도에서 목조르기를 당하는 등 보잘 것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우연한 기회에 퇴근 후 레슬링을 배우기 시작했고 프로 무대에 오를 기회까지 얻게 된다. 비록 레슬링 프로모션을 위해 실력이 아닌 반칙을 주로 하는 반칙왕의 캐릭터를 해야 하지만, 대회를 위해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잃었던 활기를 되찾고, 자신에게도 꿈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매일 구박만 받던 그의 일상도 변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무대에 오르며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시합할 때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 여기서만큼은 내가 왕이다. 링 위에서만큼은 누가 뭐래도 왕이다.”

17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직장 생활을 막 시작했던 참이었다. 넘치는 의욕으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퇴근 후에도 일본어 공부 등 자기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노력을 인정 받고, 또 나름 잘나가고 있던 터라 사실 영화 속 주인공에게 감정이입 되지는 않았었다. 아니 퇴근 후에 레슬링이라는 탈출구가 왜 필요한지도 잘 이해하지 못 했던 것 같다. 그저 코믹한 분위기와 배우들의 연기가 재미있었고,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내는 그 모습처럼…’ 등의 배경음악이 잘 어울렸던 것이 좋았다. 그런데 음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찌질한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지 반칙왕은 코미디 영화라기에는 좀 더 깊은 울림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그때는 몰랐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도 일탈 또는 이중 생활에 대한 욕구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로부터 17년이 지나는 동안 나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고 변화를 거쳐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꼭 2년 뒤에 나는 한국을 떠나서 안티구아라는 생소한 나라에서 살면서 드디어 퇴근 후의 삶을 갖게 되었다. 프로 레슬러처럼 극단적인 변신은 아니었지만 일이 끝나면 야근도 자기개발도 아닌 놀자로 변신해서 비치로 클럽으로, 친구들의 파티로 놀러 다녔다. 한국의 친구나 동료들에 비해서 뒤쳐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쓸데있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쓸모가 있는지 없는 지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예술도 사랑도 우정도 모두 쓸데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돈벌이가 안되는 예술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사랑도 하면서 산다.

그렇게 놀다가 지겨워졌을 때쯤에 나는 대학원에 갔고, 졸업 후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회사를 다녔다. 아무리 외국계 회사라고 해도 한국은 한국. 우리나라에서 일을 하면서는 외국에서 일할 때만큼 자유로운 퇴근 후의 삶을 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업무와 자기개발에 도움이 안 되는 이른바 쓸데없는일들로 퇴근 후를 보내려고 했다. 기왕이면 금융회사의 마케터라는 이성적이고 딱딱한 일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리를 하고 춤을 배우기도 하고 여행을 즐겼다.

 

이제 회사를 그만둔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딱히 퇴근 전, 후의 삶을 구분할 수 없지만 여전히 돈벌이가 되는 일을 할 때의 이성적인 나와 쓸데없는 일을 할 때의 감성적인 나, 두가지 모습을 모두 유지하고 싶다.

소심한 은행원이 링위에서는 반칙왕이 되었던 것처럼 나도 우리집에서는 파티쉐이자 파티 플래너가 되고, 무대에서는 댄서가 되어 춤을 추고, 낯선 곳에서는 방랑자가 되는 삶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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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22:17:18 *.124.22.184

도입에 '택시운전사'가 나와 광주사태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반칙왕'은 예고편만 기억에 남아있어요. 영화 보지도 않았구요. 수정씨 칼럼보니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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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5 08:37:06 *.106.204.231

아마 페르소나(가면)의 역할이 커죠. 가면 썼을때와 안 썼을때의 차이. 나에게 힘을 주는 가면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상사의 헤드락을 풀기 위해 고민하는 주인공인데 정작 방법은 너무 간단했죠. 전 이영화 보면 그게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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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7 13:42:10 *.75.253.245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일탈 or 경험을 계기로, 비범한 삶을 살게 되는' 소재의 영화는 뭐든 재밌는 것 같아요. 


스파이더맨 같은 영화..? 제 기준에는 '노팅힐'도 이 범주에 들어간답니다 ㅎㅎ


일상 속에서 늘 소소한 일탈과 함께 하기를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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