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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5일 23시 04분 등록

15년 전인 2002. 비트컴퓨터에서 드러그인포라는 약품정보 사이트를 기획할 때였다. 사장님은 사이트의 수익성에 조바심을 내었고 기획자인 나에게 영업을 뛸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사이트의 수익모델이라 해봤자 배너광고 정도였는데 일단 가까운 제약회사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싶어 걸어서 10분 이내 거리인 코오롱 제약을 타겟으로 삼았다. 그 곳은 특이하게도 사장은 없고 부사장만 있을 뿐이었다. 부사장님은 흔쾌히 미팅을 수락하셨다.

 

올 해 5월 소천하신 전성수 부사장님(1937~2017)과의 인연은 그렇게 배너광고의 영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1937년 생으로 당시 66세셨는데 현업에서 뛰고 계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사장님은 그러잖아도 약품정보 사이트에 관심 있던 차라 관계자인 나의 방문을 반가와 하셨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품정보 전달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가진 사이트의 퀄러티가 그 분 눈에는 많이 부족하여 개선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 분은 배너광고는 배너광고대로 비용을 지불하셨으나 그 분의 관심사는 광고가 아니었다. 약품정보 사이트의 내용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나와의 지속적인 미팅을 통해 드러그인포의 질적 개선에 큰 도움을 주셨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 역시 진귀한 풍경이었다.

 

전성수 부사장님은 대웅제약(1979~2001)에서 22년간 근무하며 한독약품의 훼스탈에 맞서 베아제를 개발한 장본인이셨다. 220여 종의 약품개발이 이 분을 통해 이뤄졌으니 가히 한국 약품개발의 선구자이자 개척자라 할 수 있다. 여러 업적으로 회사 내 지위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겠는데 여타의 행정적인 업무는 연구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부사장 이상은 절대 수락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단다. 2001년 대웅제약에서 코오롱 제약(2001~2004)으로 가실 때에도 타이틀은 부사장이어야 한다. 사장직은 안된다가 조건이었으며 3년 후 한올제약(2004~2012)으로 이직 시에도 역시 부사장이 조건이었다고 한다.

 

나는 한올제약은 처음 들어보는 회사였음에도 부사장님이 한올제약으로 이직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한올제약 주식을 매수했다. 그 분은 수익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분이지만 그 분의 연구중심, 가치중심적인 사고는 해당 제약회사의 가치를 틀림없이 높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때문이다. 매수 당시 700원이었던 한올제약 주식이 부사장님 조인 후 수년 만에 1만원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으니 한 사람이 올릴 수 있는 기업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라 하겠다. 전성수 부사장님은 이해타산 없이 오로지 학문적인 것, 약품개발과 약품정보의 전달에 주력하시는 분이었다. 우루사, 베아제, 곰실린 등의 약품이 모두 그 분에게서 나온 것이었고 네이밍 역시 그 분의 작품이었다.

 

약품명에 다 곰이 들어가네요?”

대웅제약이니까. 그런데 지미코는 곰이 들어가지 않지요

지미코도 부사장님이 만드신 거예요? 그건 왜 지미코예요?”

내가 축농증도 심하고 코감기로 고생을 많이 해서 콧물시럽약을 만들었는데 이름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었거든. 마침 당시에 김지미가 인기가 좋았어. 그래서 지미코로 했지.”

 

2012. 부인께서 소천하셨다. 장례식장에서 상주가 되신 부사장님과 아드님을 뵈었다. 아드님을 뵙는 순간 미래의 어느 순간이 보이는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언젠가 부사장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 이 분을 바로 이 자리에서 상주로 뵙게 되겠구나.’

 

5년 후인 올 해 5 15. ‘강의를 하다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전성수 부사장님께서 돌아가셨다. 바로 그 날 오후 강의를 앞두고 돌아가셨다고 하니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현역이셨던 셈이다. 향년 80세셨다. 상주가 되신 아드님을 5년 전과 같은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뵙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누군가의 죽음을 그렇게 오래 슬퍼했던 적이 없다. 부사장님과 함께 했던 귀한 추억을 되새김질하던 어느 날, 부사장님이 남기신 노트나 책을 좀 받을 수 있을지 아드님께 여쭐까 망설이다 그만 두었다. 그런데 얼마 전 아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독문학 전공이라 하셨죠? 아버님 유품을 정리 중에 <파우스트> 독일어 원본이 있어서요. 생전에 가장 좋아하시던 책입니다.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그러잖아도 <파우스트>는 언젠가 원문으로 읽을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약속을 잡고 부사장님이 사시던 댁으로 갔다. 책이 많아서 모두 모교인 서울대 약학 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하셨다는데, 책을 넣은 박스만 수십 여개가 쌓여 있었다. 부사장님이 읽은 <파우스트>는 페이지가 닳도록 열심히 읽으신 흔적이 보였다.

 

부사장님이 독어도 하셨어요?”

아버님은 영어보다 독어를 더 편안해 하셨습니다.”

 

영어로 된 수학책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아니, 도대체 수학은 왜 공부하신 거지?” 책을 열어보니 ()은 항상 수학을 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정말이지 학문, 진리 탐구 자체를 좋아하셨던 분이었다. 방을 둘러 보던 중에 책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한달음에 썼다는 책상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다소 좁고 낮은 그 책상이 괜히 탐나서 골동품 가게에서 사야겠다 하던 차, 부사장님의 책상이 그런 스타일이었다. 부사장님의 목소리가 아드님을 통해 묻는 것인지, 아드님의 제 2인격이 내게 묻는다.


혹시 가구도 필요하시면 갖고 가셔도 됩니다. 저희는 이제 작은 집으로 이사할 예정이라서요.”

 

책 가지러 왔다가 이게 어인 일인가. 용달을 불러 부사장님의 손때가 묻은 책들, 책상, 책장 등을 모두 옮겨 왔다. 말 그대로 유품을 상속받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더 의미가 있을 거 같다며 아드님께서는 부사장님께서 쓰시던 만년필 여러 자루와 붓과 벼루까지 주셨다. 이 즈음 되면 아드님을 통한 부사장님의 인격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부사장님의 부친은 한의사셨는데 그 분의 경험방이 적힌 것은 남편에게 유용할 것 같다며 남편에게 주셨다

 

집에 돌아와 부사장님이 읽던 <파우스트>를 넘기다 책갈피에서 까만머리카락을 발견했다. 이 머리카락이 떨어졌을 때에는 몇 세셨을까? 책의 첫 페이지에 1959년이라 쓰인 걸 보면 23세 무렵에 읽으셨나 보다. 해당 페이지를 읽었을 젊은 부사장님의 모습이 마음 속 영상으로 떠올랐다. 여러 책들을 보자니 영어에 독어에 수학기호까지 있어 까막 눈까진 아니지만 흐린 눈인 나에게는 혼미한 내용들이었음에도, 마치 영화 <씨네마 천국>에서 편집된 키스씬을 보는 주인공처럼 그리움의 눈물이 쏟아졌다.

 

배너광고로 인연을 맺어 남편과 나에게 약리기전을 설명해주고 표준처방집이라는 필생의 저서까지 선물로 남겨주신 분. 약품개발의 비결은 환자의 고통 받는 증상을 마음으로 이해하면 처방은 저절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셨던 분. 이제 그 분은 내 곁에 없으나 그 분의 정신과 영혼이 책상에, 책장에, 세월을 먹은 책들의 페이지 속에 스며 들어 있다. 모태신앙이면서도 성경 한번 제대로 읽지 않은 내가 그 분께서 읽은 어르신용 큰 활자의 성경을 조만간 읽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약품개발과 약품정보전달에 평생을 바친 그 분의 유품을 받은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적 상속녀라 할 수 있다. 귀한 가르침과 태도를 마음에 새겨야겠다는 생각을 그 분의 오래된 책상에 난 기스를 보며 생각해본다. 나도 좋은 글을 쓰고 정신적 유산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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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7 11:43:34 *.223.2.87
너무도 가치있는 유품이군요.
운좋은 상속녀,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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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1 19:32:05 *.18.218.234

'운좋은'에 밑줄 긋게 되네요. 맞아요. 운이 좋았네요. 그 운 잘 살려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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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0 05:51:11 *.106.204.231

정말 주위에 많은 분들이 계시네요. 인맥 끝판왕.

값을 매길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받으셨네요. 주식과 연결하는 동물적 감각또한 부럽네요.

상속을 받은만큼 더 큰 것을 사회에 환원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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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1 19:33:42 *.18.218.234

사회에 환원할 '더 큰 것' = 가치 있는 책을 내는 것으로 이해할게요 ㅋ

기상씨 댓글 보다 <보따리아 열전>으로 말머리를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꿈. ㅎㅎㅎ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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