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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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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2일 23시 10분 등록

독일에서 치매환자들을 위한 가짜 버스 정류장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한다.   

'사려깊은 거짓말'이라며 역시 선진국의 아이디어는 다르다고 다들 흐뭇해하는 분위기다.  

또 그런 거짓말이라면 환영한다며 유럽 전역으로 가짜 버스 정류장 설치가 늘어난다고 한다.

 

심지어 치매 노인들에게 '이제 돌아갈 그 곳은 없다'는 슬픈 현실을 말해주는 것 보다, 행복한 기분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보탠다.

거짓말에 색까지 입혀 새빨간 거짓말과는 달리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니 하얀 거짓말이며 아름답지 않은가고 반문한다.

여기에 학자들까지 가세를 한다. 심리학자인 클라우디아 마이어는 '거짓말의 딜레마'에서 거짓말은 생존전략이며, 일종의 사회적 윤활유로서 거짓말은 우리 세상을 결속시킨다고 주장한다. 또 메사추세츠 대학의 어느 심리학 교수는 거짓말은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 재능이며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정신없는 환자에게나,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요양시설 직원에게나, 이 가짜 버스정류장이 확실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감동하지만 본능적으로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섞인다.

남을 돕는 일도 거짓말로 해결해야하는 고통스러운 현실때문이다, 또 그런 현실이 나아질 기미는 안 보인 채 거짓말만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 받아야하는 마음의 상처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넓게 생각하면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치매환자와 다를 바 없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서 각자에게 부여된 힘든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 삶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야할 길이 있는데 무엇을 타고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모른다.

누구나 가야하는 종착역이 있다는 사실을 애써 회피한 채 거기에 왜 가는지도 모르기에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이렇게 살아가는 자칭 정상인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환자라고 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과거를 기억 못하고 자신을 기억 못하면 다 치매환자인가?

 

자칭 정상인 사람들도 남의 마음을 모른다. 부모 마음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도 모른다. 신의 마음은 더욱 모른다.

수치스러운 과거는 모두 무의식에 구겨 넣는다. 이런 사람들이 치매환자들을 돕는다며 하는 일이 가짜 정류장을 만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슬픈 현실을 아는 것 보다 가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자칭 정상인이나 치매환자들의 엉뚱한 언행은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정형화된 일상 속에서 가끔 정신이 들 때 진리를 찾아 뛰쳐나가 보지만 곧 친절로 포장된 각종 허언에 넘어가서 시간만 낭비하다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아무 의식없이 물끄러미 창 밖을 쳐다보다가 요양시설 바로 앞에 정류장이 있으면 누구라도 나가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것은 고문이다. 환자들 눈 앞에는 늘 가짜 정류장이 있다. 환자는 눈 앞에 보이는 그게 가짜라는 생각을 못할 것이다.

진짜와 똑같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기서 기다리면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겠지 하고 나갔다가 친절하게 붙잡혀 오는 일이 부지기수.

때로 정신이 들때면 저 가짜 정류장에서 기다렸던 때를 기억하며 얼마나 더 헷갈릴지 가슴이 아프다.

치매환자들은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에 지난 날의 모든 것을 지우고 새 삶인 원점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무작정 뛰쳐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자칭 정상인 사람들이 치매환자들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가짜 정류장으로 현혹한 후 거짓말로 그들을 유인한다.

 

돌아다니는 것 보다 시설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슬픈 현실이라 할지라도 대면하여 이겨낼 마음의 근육을 키워주는 것이 시설 직원들이 해야하는 일이다.

가짜 정류장을 세워놓는 그 자리에 정신을 번쩍 들게 할 문구를 써 놓거나, 기억을 돌이킬만한 이야기, 따뜻한 사랑의 이야기를 써 놓는 것이 더 좋겠다. 아니 어디 가느냐고, 같이 가자고 따뜻한 동행을 해주기 바란다.

자칭 정상인 나도 각종 가짜 정류장에 속아서 다시는 도로 갇히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옥타비아 파스의 시가 생각난다.

 

...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그것을 꿈꿔야한다.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 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

    . . .  

세월을 담은 도도한 강물처럼

 

인간의 계절은 또 그렇게 흘러가야만 한다

 

태초부터 영위해 온 삶의 한 가운데로

 

시작과 그 끝 너머 저 심오한 그 곳으로


IP *.48.4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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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17:09:39 *.130.115.78
가짜정류장은 더이상 그것이 필요없다는 상태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걸거예요.

심신이 허약한 상황에서는 일부러 꾸며놓지 않았는데도 헛것을 만들어보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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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18:32:48 *.103.3.17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만 정상적인 세계라고 인식하는 우리 역시 치매환자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이 세계는 거짓이 더 많을지, 진실이 더 많을지,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닐지 잘 모르겠네요. 생각하면 골치아픈 일이니 그냥 덮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안으로든 밖으로든 그것을 꿈꿔야한다"


진심을 담은 칼럼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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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12:05:31 *.124.22.184

양가 부모님이 나이가 많으셔서 한 분은 치매초기이시고 다른 분들도 기억이 온전치 않아요. 기억을 맞네, 틀리네 다투시기도 하고... 치매와 기억력 부족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알려드려도, 치매에 대한 불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인 것 같아요.

 

웨버님 글을 읽으며 상담과 비슷한 점을 찾았어요. 상담사가 내담자를 공감하기 위해 하는 말, 절대 공감할 수 없거든요. 겪어보지 않고 '그러시겠어요.' 하는 그 말이 그래서 맘에까지 닿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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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23:06:08 *.148.27.35
깊은 경험을 한 사람만이 쓸수 있는 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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