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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3일 11시 50분 등록

사랑스런 나의 영웅

 

산방의 아침은 길기도 하다. 태양이 몸을 쓰다듬는 느낌에 눈을 떠 넋놓고 바다같은 하늘을 누린다. , 이 부드러운 느낌이 저기 저 바다가 품고 있는 태양의 손길이라니. 일상에서 흐트려놓았던 온 몸의 기운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조용한 기쁨에 감히 오체를 방바닥에서 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더 이상을 기대할 이유가 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정렬이 찾아온 이후에야 조심스레 몸을 돌려 또 한참을 머문다. 비로소 일어나 앉는다. 분홍과 초록이 예쁘게 섞인 탁 트인 시계가 크루즈에서나 만날 법한 로맨틱한 바다를 절반쯤 밀어올린다. 환호해야할지 탄식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눈동자에 들어온 풍경의 우열을 가려야할 이유가 있을 리가 없건만 어쩔 줄 몰라하는 삶의 관성이 귀엽다. 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산이 움직이는 소리에 이끌려 마루문을 열고 데크로 나왔다. 그가 시원스레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고 '아하!'했다. 그래서 요가의 그 자세를 '다운독'이라고 부르는구나. 수강생을 의식했건 걸까? 산이 다시한번 또박또박 시연을 한 후 턱을 바닥에 얹고 그만의 명상에 든다. 나도 더불어 평화를.  일부러 주문하려 했다면 이 미묘한 디테일을 배치하는데만도 한참을 끙끙거렸어야할 절묘한 아름다움들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걸까? 감은 눈의 스크린 위로 어젯밤의 시간들이 흘러간다. 어미짐승이 다친 새끼를 핥아주듯, 도저히 그 이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세심하고 정교하게 제자들의 마음결을 골라주던 그의 얼굴에서 한참을 머무는 카메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미 물안에 있으면서도 목이 타들어간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그들이 그는 얼마나 안스러울까? 틀림없이 함께 타고 났을 그 감각을 도무지 찾아내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애처로울까? 제 힘으로는 물 한모금 넘기기 어려워하는 새끼들을 위해 온 몸으로 길어올린 양분을 하나하나 입에 넣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놀라운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도 같다.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리 애를 써봐야 양분은 딱 본인의 기력만큼만 흡수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니 흡수는 고사하고 몸 안으로 제대로 집어넣기 조차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이 어찌 효율을 셈해 하고 말고를 결정할 할 수 있는 일일까? 내 미처 느껴내지 못하던 그 긴 시간을 단 한마디의 불평없이 기다려준 자연 앞에서 어찌 내 정성의 대가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도 백만번쯤 같은 깨달음을 되풀이하고야 어제 내가 만난 모습의 스승으로 익어왔는지도 모르겠구나.


다시 마루문을 열자 몸에 닿는 온기와 장작 내음이 새삼 포근하다. 어제 이 맘때는 상상으로도 알 수 없던 느낌. 몸은 더없이 상쾌하고 영혼 또한 충만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뿐이어도 아쉬움이 있을 리 없건만 창을 살짝 여는 순간 와락 안겨오는 비를 머금은 산바람, 불내음을 품은 온기와 시원한 바람이 절묘하게 어울려 만들어낸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속에서 넘기는 책장 소리란. 집에서 읽을 때는 도무지 뭔소린지 들어오지 않던 시인의 목소리가 별안간 가슴을 파고들어 오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문, 혹은 벽



한 시절 밀고 나갔던 길을 문이라 생각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분명했을 때였다

그 경계의 사이에 문은 언제나 빗장이 완강했다

문을 지탱하는 것이 벽이었다니

이곳과 저곳의 그 일치할 수 없는 벽이

다리에 이르는 것이었다니



어제의 날들이 오늘을 지켜준다니

이제 누구도 쓰러진 길을 일으키지 않는데

죽은 자들은 옛일처럼 산에 오른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은 흐르므로 변하지 않고

다만 쓰러진 먼 별들이 젖은 불을 밝히는

밤이다 길은 아득하고 목을 놓는 밤이다



박남준 시집『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중에서




놓여있던 시집 말고도 갖고 온 책, 그것도 무려 이 공간에서 쓰여진 바로 그 책을 거의 다 읽고 일어나 아침채비를 마치고 앉았는데도 채 아홉시가 되지 않았다. 시계 안의 태엽을 감는 요정도 산방의 아침을 즐기느라 일을 잠시 쉬고 있는 걸까? 시간요정의 일손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만큼 황홀한 시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만 느낄 수 있다는 그 신비로운 시간의 흐름을 나도 드디어 경험하고 있는 건가? 어제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센서를 또 한조각 나에게 선물하는데 성공한 거구나!


산방의 아침.png


어제 아침,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백만개쯤 읊어대는 용의 머리를 치지 않았더라면. 예약된 방에서 뜻하지 않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그러게 내가 뭐랬냐며 마을로 내려가 콜택시 번호를 따던 그 괴물의 배를 가르지 못했더라면. 속으로 전쟁을 치르느라 제풀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느라 폐를 무릅쓰고 산방에 잠시 몸을 뉘었다 나오는 밤길위, 다음달 수업 윤곽도 얼추 잡혔고 궁금하던 산방구경까지 했으니 지금이라도 돌아 가자며 집요하게 꼬셔대던 여신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보물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나의 세계로 돌아와 그 보물을 다시 한번 만끽하고 있는 지금, 내 영웅의 위대한 귀환을 의심할 이유가 있을까?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45

 


쑥스럽긴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의 영웅, 기대했던 것보다 백만배쯤 더 사랑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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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18:34:17 *.103.3.17

저도 추장님이 자랑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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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07:04:55 *.130.115.78

'추장' 재미있는 호칭이네요. 마음에 드는 듯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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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20:28:13 *.48.44.227

용과 괴물을 물리치고 여신( 남신 ? ) 의 유혹까지 뿌리친 후 

남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영웅으로의 귀환을 두 손 들어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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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07:10:52 *.130.115.78

남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지는 좀 지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제 안의 수많은 그들에게는 충분한 선물이 되었던 것 같아요.

기쁨이 터져나오는 소리가 느껴지거든요. ㅎㅎ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

부디 그들에게도 이 기쁨이 전해지기를 바라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들 역시 자신의 모험에서 승리해야 할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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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12:51:57 *.124.22.184

그 '산방'을 다음 달에 가보는 건가요? 아닌가? ㅎㅎ

여하튼 산방의 아침을 도시의 방에서 느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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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13:57:19 *.130.115.78

글쎄요. 저도 어쩌다 얻어걸린 행운이었던지라...


용규샘~ 보고 계신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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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4 23:13:44 *.148.27.35
크~ 시, 좋네. 그리고 칼럼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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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5 07:38:43 *.130.115.78
오! 드디어 제 글을 이해하시기 시작한 거? 생각보다 엄청 빠르시네요!

달콤한 나의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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