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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8일 11시 54분 등록
여성운동가로 살아간다는 것

그동안 여성운동의 주체는 여성운동단체였다. 그 속의 여성운동가란 단체의 일부였다. 우리 운동이 발전한 시기는 근대의 형성(제도화)과 해체(세계화)가 동시에 이루어진 다중적인 시기와 일치한다. 우리 조직은 여전히 근대 조직인데 활동가는 이미 다중적인 상황에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여성운동단체는 유일한 여성운동 주체에서 주체들, 심지어는 비주체로 변화하고 있다. 여성운동을 둘러싼 외부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인해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 한다. 이는 조직과 개인의 정체성 혼란과 비전 부재, 조직과 개인의 비전과 욕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의 정체성과 목표는 변하지 않는데, 운동가 자신은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이미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운동가들 개인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다. 운동가란 사회변혁을 촉진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사회 변동에 영향을 받아 자기를 재구성하는 존재다. 그래서 여성운동이 위기라고 하는 발화는, 여성운동가들이 자신의 변화를 인식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여성운동가란 무엇인가? 개인이 단체에 들어와서 여성운동가라는 정체성을 얻기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걸린다. 3년차인 나 또한 활동가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여성운동가로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여성운동단체 활동을 통해 활동가들은 자신이 여성운동가라는 정체성을 얼마나 얻게 될까?

다른 여성단체와 마찬가지로 현재 상담소 활동가들의 대부분이 90년대 후반 이후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활동가를 구하기가 어려워 공채하는 경우가 많다. 제도 속에서 활동하기 위해 사회복지를 공부한 경우도 많고, 사회복지사를 공채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여성운동을 제도화과정, 정부와의 관계로, 정부정책을 기능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생겼다. 상담소에서 일하는 것만으로 운동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사회복지기관인 줄 알고 들어온 활동가들도 있다.

활동가에게 조직의 지향과 개인의 경제적 욕구는 선택사항이다. 턱없이 낮은 활동비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 동시에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취업 준비, 공부, 취미활동 등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하고 있는 회원들이나 주위 친구들을 보면서 활동가들은 막연한 불안감과 박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활동가들은 업무과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반복되는 치루기식 사업을 해내면서 활동가들은 여성운동을 이대로 계속하면 나는 무엇이 될까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런데 그도 여의치 않다. 우리 주변에 여성운동가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는 다양한 역할모델이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역시 제도화(제도정치인이 되거나 여성주의 지식을 가진 공무원이 되거나 체제와 제도 내 스탭이 되거나) 모델밖에 없다. 이런 모델들은 대부분의 활동가들에게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활인으로 돌아갈 것인가, 힘들어도 신념을 가지고 전복을 꿈꾸는 소수가 될 것인가? 활동가에게 헌신은 희생으로, 열정은 욕심으로 가치전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제도화 시대에 여성운동은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복제하는 것이 되었다. 어느 한 단체에서 사업을 만들어내면 그대로 따라하는 식으로 여성단체의 차별성을 지워나가고 있다. 여성부에서 권익증진사업지침을 세워 내려 보내면 글자 하나 오차 없이 그대로 해야 한다. 복제는 운동의 정신보다 형식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운동을 상상하는 능력, 창의력,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치고 올라오는 반전의 힘, 사람들이 변화하는 활홀한 과정, 이런 운동의 재미가 사라져 가고 있다. 활동가의 이직이 잦은 것은 적은 급여 때문이 아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되고, 창의적이지 않으며, 갈등해결이 어려운 조직문화 때문이라고 활동가들은 말한다. 이런 조직문화가 만들어진 것 역시 제도화로 인해 자율적인 운동조직이 위계적인 기관으로 변모한 탓은 아닐까?

상담소는 자율적인 여성운동과 제도화된 상담소의 공존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젠더 과제들의 제도화가 촉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한 전국의 상담소들이 일률적인 방식을 실천하기에는 자체 운동역량, 지역의 제도화 진척상황, 지역사회의 의식 등 각자가 처한 조건들이 너무도 다르다. 목소리를 하나로 모을 수가 없다. 현실의 차이를 수용하면서 현실의 차이로부터 시작하여 그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방식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늘 나는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불확정성에 시달린다. 여성운동에서 여성의 하나는 여성운동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에서 여성운동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운동가들의 자기이해가 변화 하였다. 운동가들의 자기 확신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운동가들이 자기 확신이 약하면 사회의 시선에 흔들린다. 그렇기에 여성운동가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한다. 여성운동가는 단순히 여럿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운동을 촉진하는 구분된 힘이다. 운동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것의 동력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동시에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부단한 자기변화노력이다.

모든 경영서의 중심에는‘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 운동이다. 여성운동을 함께 할 사람, 이어나갈 사람을 만들어내는 운동이어야 한다. 활동가만이 아니라, 여성 개개인들을 가장 자기다운 삶을 위해, 주체적으로 변화가능 한 삶의 운동가로 키워내야 한다. 여성 개인이 온전히 자신의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여성단체는 다양한 역할 모델을 발굴하고 표면위로 들어내어, 여성운동가들 서로에게 힘을 주는 커뮤니티,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단체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사람' 자체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 여성단체들이 존재해야할 이유이며, 나의 사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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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08 13:46:07 *.114.56.245
소현을 글을 읽으면서 하이데거의 연인 Hanna A rendt를 생각합니다. 상반된 이해관계속에 나 자신, 여성 대해서, 그리고 결국은 인간 실존의 문제를 고뇌하면서 그 중심은 언제나 '사람'에게 귀결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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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자
2007.10.09 06:10:16 *.102.142.72
호오~언니 글 무지 빡센데??
과거의 구름빵을 썼던 사람 글이라곤 믿기지 않아요.^^
그러나 언니의 고민이 참 치열하게 담겨 있는 것 같아 와닿는다.
여성운동가라~~~~~ 요즘 내가 여성이라는 것,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조금씩 인식하고 있어요. 여성운동가라...계속 생각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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