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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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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4일 00시 39분 등록

지난 금요일의 강의는 저에게 특별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우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본사를 둔 교육기관에 있다보니 강의 대부분은 매뉴얼이 이미 정해져 있는 ‘앵무새 되기’의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이번은 달랐습니다. 주제가 한정되지 않은 ‘특강’이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제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가 그날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예전의 저와 비슷한 길을 걷는 공학도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서울대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착이 가는 젊은이들이었지요. 그 날의 강의 주제는 ‘비전, 그리고 나에게 맞는 직업찾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확신을 가지고 있는 주제입니다.

공대생 치고는 직업이 특이하다 보니, 가끔 후배들이 진로에 관해 물어오곤 합니다. 그런 경우 이미 그들은 대부분 마음을 정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독특한 길을 걷는 선배로부터 혹시나 특이한 의견은 없는지, 크게 기대하지 않고 그저 자기의 결정을 확인하고 싶어 오는 경우가 많지요.

제가 학생일 때 생각했던 좋은 직업을 판단할 수 있는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찾아오거나, 상담을 요청해오는 후배들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 그 일을 통해 나는 얼마나 많이 배울수 있는가?
- 얼마나 많이 그리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가?
- 퇴직금, 연금, 그 밖의 복리 후생은 어떤가?
- 개인적인 자유시간의 보장은? 퇴근은 언제하며, 주 5일 근무제인가?
- 함께 일하는 사람은 어떤가? 그 기업의 문화는 어떤가?

저는 그들의 기대와는 엉뚱한 답을 하곤 합니다. 강의를 하건, 일대일로 조언을 하건 저의 주장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하고 싶고, 잘하며, 가치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아래의 세 가지의 질문을 시간을 두고 스스로에게 하기를 권하는 것이지요.




언뜻보면 단순하여 누구나 품고 있는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 세 가지 질문을 ‘가장 우선적으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세 원의 공통부분 – 검은 색 부분의 ‘무언가’를 한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직업 선정의 아주 결정적인 힌트를 얻은 것이라 말해주곤 합니다. 저는 진실로 이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지요. 이 세 길문이 세상의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비현실적인듯 보이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 믿는 것이지요.

‘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분명 모순어법(oxymoron)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된 표현속에 대단히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시는 반복됩니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현대는 춘추전국시대와 가장 그 모습이 비슷하지요. 모든 나라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적 목표아래 경주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이며, 거대 담론의 시기이자, 변혁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가 깊다 하겠습니다.


그 일은 가치있는가? - 그 일을 하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

孟子曰 矢人豈不仁於函人哉
矢人惟恐不傷人 函人惟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 ―「公孫丑 上」

“화살 만드는 사람이라고 하여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불인(不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화살에 뚫려서) 사람이 상할까 봐 걱정한다. 무당과 장인도 역시 그러하다(무당은 당시 의사였기 때문에 사람의 병이 낫지 않을까 걱정하고, 장인은 관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아서 관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기술(職業)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 맹자


일전에 한 컨퍼런스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외국계 담배회사의 관리자와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입사 초기에는 담배회사에서 일한다는 것 때문에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우리 회사가 없으면 국가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으니까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담배가 잘팔려야 세금이 많이 걷히고, 국가 재정이 튼실해져 많은 사람이 행복해진다구요? 폐암에 걸린 사람들은요? 일년에 있는 수백차례의 산불에서 오는 예산낭비는 고려하지 않는가요?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그가 그 직업을 선택한 이유가 ‘국가 재정’을 위해서 였을까요? 그것은 합리화일 뿐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기의 재정을 위해 직업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고액의 연봉에, 최고의 복리후생을 자랑하는 ‘훌륭한’ 글로벌 기업이었으니까요.

그 사람은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무의식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죄의식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치는 법이지요.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는 우리가 간과하는 중요한 직업 선택의 기준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것 – 자아 존중감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일을 잘하는가? - 빠르게 배우며 지속적으로 성과를 내는가

관중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정치가이며, 공자보다 약 150년 전 사람입니다. 이번 주의 연구원 도서인 ‘관자’의 저자이기도 하지요. 관중이 제나라의 정치를 맡게 되자 보잘것 없는 나라가 부유하게 되었고, 군대가 튼튼해졌으며, 백성들과 더불어 좋고 나쁜 것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관중은 젊었을 때 포숙胞叔과 사귀었다. 그는 가난하여 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그를 잘 대해 주었고 속인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현명함을 알아주었다. 포숙이 보좌하던 공자 소백이 왕위에 올라 환공이 되었다. 이 때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그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세월이 흘러 관중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는데, 환공이 찾아와 관중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푸속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이 어떨지를 물었습니다. 관중이 대답했다.
“포숙은 군자입니다.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하더라도 정당하게 주는 것이 아니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사를 맡기기에는 적당치 않습니다. 그 성격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정도가 지나칩니다. 그래서 하나의 악을 보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합니다.”

평생 포숙의 도움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 뜻을 펼치게 되었지만 정작 기회가 되어 포숙을 추천해야 할 자리에서 관중은 포숙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관중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관중은 포숙이 그 자리와 지위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중은 ‘그 사람에게 맞는 적절한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고, 적합한 사람이 적합한 자리에 있지 못하면, 결국 개인은 몸을 망치고 조직은 일을 망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구본형「사람에게서 구하라」


저는 저의 경험으로부터 이것을 절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저는 작고 세세한 분야의 연구가 잘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크게 보고 흐름과 통찰을 얻는 것이 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작디작은 현상을 세세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공대생으로서 8년을 보냈습니다. 충분히 실패하고 나서야 제가 그 분야에 잘 맞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를 위해서도, 제가 몸담은 연구실을 위해서도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떠났지요.

사람은 일종의 그릇입니다. 태어날때 그 그릇의 크기와 모양이 결정되어 있는 초벌구이 같은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 그릇을 몇 번 다시 가마에 구워 쉽게 깨어지지 않도록 단련하고, 유약을 뭍혀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며, 손때를 묻혀 훌륭한 자기로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작고 예쁜 그릇에 세숫물을 담을 수 없고, 커다란 쟁반에 밥을 담아 내오지 않습니다. 모두 그 쓰임에 맞아야 합니다.

자신의 적합한 쓰임새를 찾는 것, 만약 우리가 신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면 스스로가 어떻게 쓰임받도록 태어난 존재인지를 찾는 것이 세상에 자신을 내보이는 사람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타고난 모양대로 그 용도에 맞는 가장 훌륭한 그릇으로 자신을 다듬어 가야 그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 일을 좋아하는가? - 지속적으로 열정을 가질 수 있는가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雍也」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 공자


제 아버지는 늘 “경제적으로 조금 부족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은 당연한 양 흘려듣곤 했지요. 허나 그 짧은 문장에 아버지의 큰 통찰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 그것이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가끔 일을 하는 친구들에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냐고 질문합니다. 대부분의 대답은 ‘아니다’ 이지요.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평생동안 바래왔던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라구요. 그랬더니 대부분 잘 모르겠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그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범하고 있는 잘못은 지금 자기가 원하고 있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정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 역시 밝고 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끔 우리를 되돌아 볼 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이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포기해 버립니다. 저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렵지만 찾아야하고, 넘어서야 하는 삶의 국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꼭 알아내야하는 수수께끼이며 과제입니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자기 책임인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마다 그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릴케가 말했듯 ‘중요한 질문을 품고 살아가면, 언젠가 그 답속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즐길 수 있다는 것 – 그것은 축복이자 기쁨 그 자체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락(樂)이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 학습과 놀이와 노동이 통일된 상태, 일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리하여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원융(圓融)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언제 이런 상태가 되는지를 눈여겨 보아야합니다. 시간을 두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 보다가 우연히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20대는 ‘실험과 모색’의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전히 길 위에서- 그리고 손길을 느끼기에

이 세 가지의 영역이 정확히 겹치는 접점(接點) – 그 지점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직업의 중요한 힌트를 얻게 됩니다. 2004년의 겨울의 어느 날이었지요. 그날 밤 천안의 나사렛 대학교의 도서관 큰 책상 앞에 저는 하얀 종이뭉치를 두 부류로 나누어 흩어두었습니다. 한쪽에는 ‘나의 욕망 - 좋아하는 것들’이라 적혀있는 종이 뭉치들이었고, 다른 쪽에는 ‘나의 재능 – 잘하는 것들’이라 적혀 있는 서너장의 메모였습니다.

저는 팔짱을 끼고 한참동안 그것들을 노려보았습니다. 눈은 흐려지고 생각은 몽롱해집니다. 순간 종이 속에서 몇몇 단어와 문장들이 크게 떠올라 하나로 뭉쳐집니다. 한데 섞이고 흥겹게 춤을 추다가 하나의 통찰로 귀결됩니다. 신의 쪽지였지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이런 것이었습니다.
“학습하고 실험하여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타인과 나누는 것” - 그것이 제가 좋아하고 또한 약간의 재능이 있다고 여겨지는 ‘그것’이었습니다. 가치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그토록 제가 찾기를 원하던 제 골수 안의 눅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일은 명쾌했습니다. 저는 어쨌든 가르치는 일과 관련한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식을 넘어선 지혜의 측면, 정신적인 성장을 위한 깨달음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다짐이었지요. 강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이룰 장소 - 직장을 찾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지만,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저는 신영복 선생님의 이 말에 공감합니다.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 밖에 없습니다. – 신영복 ‘강의’


저는 카네기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 생활도 하고 있지요. 가끔 동기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어볼때가 있습니다. “그래, 하는 일은 재미있니?” 라구요. 저는 슬쩍 웃곤 합니다. 가끔은 제 안의 누군가가 묻습니다. “그래, 하는 일은 네가 잘하는 것 같니?”라구요. 저는 안을 들여다보며 ‘글쎄-‘라며 눈웃음을 보내지요.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스스로 모색하라.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앞에 다른 길이 나오면 슬퍼하지 말고 새 길로 가라. 어느 길로 가든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있다.” – 길현모


여전히 제 앞에 놓인 길은 어둡고,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말에 다녀온 신성리 갈대숲 만큼이나 수풀이 높이 쌓여 있어 전체에서 어디쯤 와 있는지 알지 못하지요. 허나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여전히 ‘길 위’에 있음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길이 결국에는 저를 최선으로 인도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감사하게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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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2007.11.14 00:51:22 *.226.110.51
안개가 짙게 낀 퇴근길에 여러 가지 잡념이 가득했는데, 박승오님의 칼럼을 읽으니 선선한 바람 부는 강가에 선 것 같네요. 30% 여백을 인정하고 편안해지는 때가 오겠지요? 최소한 불순물로 채우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더 정신차려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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