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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9일 02시 49분 등록
어느 날 우연찮게 이 땅을 뜨고 싶어 안달이 난 적이 있었다. 20년 전이다. 그러다 어쩌다 잠깐 갔던 그 나라에 발목이 잡혀 오늘날까지 일본하고의 연결이 계속되고 있다. 학부를 다시 그곳에서 마치고 직장에 들어갔으니 학부 4년에 직장이 15년째로 20년 맞다. 그러니 일본에 대해 할 말이 많다면 참 많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실은 별로 할 말이 없다.(?)

이런 표현의 배경에는 무의식이 나를 방어하고 있다는 느낌과 또 다른 면으로는 생활인으로서 삶의 허덕거림의 와중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나 한국 사람들이 무슨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느냐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대화 같은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일종의 잔머리가 발동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본능적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잠깐의 어떤 자극으로 순식간에 공격적인 모습으로 돌변하는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정치나 역사, 종교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아주 싫어한다. 거부감이 있다. 그것은 논쟁을 싫어하는 나의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어느 선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을 설득할 만한 지식이 내게 별로 없다는 것도 그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논쟁, 경쟁. 아무튼 쟁(爭)이라는 건덕지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도망가는 편이다. 이건 성격이다.

그래서 소통되지 않는 만남은 피하는 편이다. 북적거림을 사양한 대신 외로움과 협정을 맺어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 식당에서 혼자 밥도 잘 먹으며 여행도 혼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상대가 마음이 온전하게 통한다면 맘껏 떠들고 자신을 드러내지만 조금이라도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말 한마디 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니깐 깐깐하다고 사람들이 표현하는 게 틀리지 않다.

이런 나의 성향에 대해서는 지난번 읽었던 니체의 책에서 변명할 구실을 찾아 위로를 삼고 있다. “단 한 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주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이 "느낌"을 중요시 여겨 여지껏 독신을 고수하고 있다. 엔간히 세월도 흘렀는데 아직도 그러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러하시다.

각설하고. 그러면서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글이 나의 생각을 말하는 데 있어 요즘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만큼은 “소용없는 말”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번에 읽은 책은 일본 문화를 다룬 책이었다.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당연히 할 말이 많을 터인데 사실 나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못했다. 앞서 말했지만 섣부른 일본 관련 지식의 피로는 스스로의 화를 부른다는 것을 곁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일본에서 살면서 몇 년이 지나 비로소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알아차렸을 뿐인데 한국에서만 살아 온 이들의 관념에 대해 그것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투의 이야기 방식은 옳지 않다고 본다. 타인의 관념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시각밖에 부여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굳건한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일본에서 오래 살았으니 연애도 하지 않았겠냐고 질문들을 많이 하신다. 그래 정말 솔직하게 대답하겠다. 당근 하셨다. 이 미모(?)에 안 했다고 하면 내숭떤다고 난리들 치시니 털어놓는다. 남친이었던 그는 소위 친한파였고 나를 무척 사랑했던 사람으로 내가 가진 웃기는 생각에 거의 99% 동조해주던 남자였다. 역사의식이 제대로 있었고 비교적 솔직한 사람으로 우리는 양국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통해 대부분에서 꽤 잘 맞았다고 기억한다.

지나고 나면 미운 건 생각이 안 나고 좋은 거만 떠오르는 게 사람인 듯하다. 조물주는 왜 이렇게 성가시게 사람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예 그 왠수..하면 얼마나 사는 게 편할까, 외로울 때마다 한 번씩 들쑤시고 가는 데 그러면 평소에 안 하던 짓 한번씩 하고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이 벌어지곤 하니 그럴 땐 아무리 위대한 창조주라도 한번 할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이별한 연인들에게 제발 왜 헤어졌느냐고 묻지 말기 바란다. 아픈 상처 건드리는 거 그거 이상한 취미다. 이야기가 김밥 옆구리 터지듯 자꾸 옆길로 새려 한다. 다시 돌아가자.

그 때 한창 독도 문제로 한일 간에 갑갑하던 시절이었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터지는 게 한일 양국의 민감한 이슈들로 그 사건 전까지는 남친이 나보다 더 흥분하며 일본 정부를 욕해댔었다. 사실 솔직히 일본의 언론에서는 한국만큼 대대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 이 부분 중요하다. 한국이 대서 특필하면 일본의 언론은 이런 문제로 한국에서 기사가 이렇게 났다고 조그맣게 보도하는 식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일본의 뉴스들은 한정된 시간에 전 세계에서 일어난 이슈들을 아주 꼼꼼하게 방송한다.

아주 민감하거나 커다란 이슈는 특집으로 내보내며 분석하는 데 몇몇 저널리즘은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은 매체도 있지만 일본 대중들이 많이 보는 한 방송국은 대놓고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스스로가 파헤쳐 일본의 비리를 폭로하기도 한다.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이야기를 한 학기에 걸쳐서 일본인 교수가 강의했는데 그 내용은 한국에서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또한 내 주변에 있었던 많은 일본인은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해 침통해하는가 하면 참전 경험이 있던 일본 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그의 과거 어떤 날을 이야기 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이들도 개중에는 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나라의 국정 운영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부류이거나 보통의 일본인들도 혐오하는 극우파 집단들이다.

그런데 독도 이야기가 불거진 그 날은 나의 일본 남친하고 평소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되면서 우리는 무언가 이야기의 끝을 마무리 하고 싶었었던 것 같다. 보통은 잘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말야, 도대체 일본사람들이 독도 문제 같은 것을 걸구 넘어지는 거는 뭐냐? 그거 당연히 한국 땅이잖아. 왜 그러는 거야?”
이 친구 말이 없다. 평소엔 저의 조국인 일본을 까느라 정신 없는데 그냥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이윽고 그가 무겁게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기, 다케시마는….그건 말야……..그건……잘 모르겠지만 일본땅이라고 알고 있어. 그건 한국이 뭔가 잘 못 알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태어날 때부터 그렇다고 배웠거든..”

그 때 나는 머리가 띵 하고 온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그에게도 독도는 나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그의 나라였다. 다케시마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그 나라 사람들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괴리가 있을 수 있을까? 무엇이 그와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을 이렇게 만든 걸까? 여기엔 단순히 “그나 내가 무지해서” 라고 결론을 내리기엔 내게 그 충격이 아주 컸었다는 느낌이다. 왜 우리는 옆 나라를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 수 없었던 것일까. 일반 민중들이 진정으로 전쟁을 원했던 케이스가 있었을까, 또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어느 한쪽에서는 청산된 일로 되어있고 반대 편에서는 아직도 바로 어제의 일로 남아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아마 그 때부터 좀 진지하게 양국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 망나니처럼 자신만의 감정에 질퍽대다가 어느 날 그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하는 것을 일종의 성숙의 과정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가진 국가에 대한 애정이 나를 분노하게 하고 모욕하는 그것의 근원을 찾는 것이 시민으로서의 성숙의 단계일 것이다.

그런 생각 속에서 그러한 괴리감의 가장 강력한 원인 제공 매체가 매스컴이 아니었겠나는 결론에 다다랐다. 물론 그 첫 번 째는 말할 것도 없이 반일 반공을 내세워 세력을 유지했던 정치꾼들이며, 어용 지식인의 위치에서 정치꾼에 부합한 사람들, 또 부정확한 지식으로 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방법을 사용해 한 번 뜨고 싶었던, 작가라는 몇몇 이들이 양국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들이라고 본다.

그들은 아주 교묘하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 천박한 자본주의만을 쫓아 당당하게 출세의 길로 나아갔다. 그리고 유약한 매스컴은 그 모든 것에 편승했다. 필요에 따라 아주 자극적인 기사만을 편집해 한국인의 어떤 욕구충족에 총력을 기울였다. 매우 공정하지 않았다. 나와 같은 입장에 있어 본 사람들은 이제 그런 기사를 접하면 걱정이 앞선다. 이 기사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모든 것에 의기투합하던 남친과 나는 결국 몇 번인가의 이슈에서 괴리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영 서먹서먹한 앙금처럼 남게 된다. 물론 다른 이유로 헤어지긴 했지만 당시 소통부재 기간 중에는 참으로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것 같다.
일반 대중의 순수한 애국심은 권력을 탐하는 위정자들의 욕심과 야합에 곧잘 이용된다. 그것은 나라라는 한계를 벗어나 그와 비슷한 다른 나라의 세력끼리 모여 이루어지기도 한다. 세력을 가진 계층과 일반 대중, 대중의 의식을 이용하는 자들,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권력 유지 세력들….….갑자기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나라다. 또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그들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와 밀접한 사람들이다. 한국인이 미워해야 할 대상은 일본 민중이 아니다. 미워하게 만든 어떤 세력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에서도 여전히 대중에게 털어놓지 않고 민중에게 그 버거움을 전가시키는 세력들이다. 크게 보고 정확히 분석하여 애증의 대상을 구별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분명 매듭을 묶은 부류들이 있다. 그들이 나서서 매듭을 풀어야 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에 소속된 민중의 하나이며 내가 만난 일본인 또한 그 나라의 민중에 불과하다. 50년 전에 세력을 구가하던 계급들도 아니고 한국의 어떤 세력과 밀약을 맺은 세력들도 물론 아니다. 우리가 오늘 진정으로 분노해야 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은 국가를 만든 사람들일 것이다. 평소 정치나 이즘 따위에는 눈꼽 만큼도 관심이 없는 이가 이런 글을 쓴다.

누가 내게 어느 나라 사람이세요? 하고 물으면 농담 삼아 지구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20년간 일본과 관련되어 살면서 몇 번인가는 정말 지구인이고 싶었다. 사람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대답에 비로소 편안해 하니 100% 한국산이에요. 하면 다들 만족해 한다. 그러나 지구에 사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비록 그 지역이 다르다 하여 그 원초적인 본질에서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문화 비교는 아주 흥미로운 분석이긴 하지만 더 높은 차원에서 지구인이라고 보았을 때는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는 느낌도 든다.

처음에 밝혔듯이 일본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조금이라도 “친일파” 적인 발언은 돌이 날아옴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글을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모처럼 글을 쓸 시간이 할당되어 있고 기회가 되니 이런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자는 차원이다.
결국 두서 없는 글이 써지게 되었다. 머뭇거리며 써 본 글이지만 그저 나의 희망은 사랑, 이해, 평화가 한국과 일본의 보통 사람들에게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그 한가지 바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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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일
2007.12.19 03:50:53 *.116.229.224
잘 지내시죠? 지난 번 국화와 칼 서평에서도 누나 글은 유독 관심이 더 갈 수밖에 없었죠. 이번 글도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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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
2007.12.19 04:42:52 *.177.93.244
지구인 맞네요. 지구 대기권에서 갇혀 살 수 밖에요.영어로 뭐라고 할 까요.earthling? 그럼 일어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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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2.20 17:04:41 *.48.43.19
쿨님, 질문에 대답합니다. 地球人(지큐우진). 너무 간단하지요. 이곳 날씨는 흐림, 아주 맘에 드는 날씨에요. 흔적 반갑습니다. 행복한 연말 되시길..

준일씨, 그대가 멀리 있는 게 우리 소통에는 더 좋은듯하군. 잘 되가고 있겠지?. 바쁜 와중에 나의 글을 꼼꼼히 읽어주니 고맙다. 누나도 여름에 거기 갔었는데 그대가 있는 줄 알았다면 전화라도 했으면 좋았을 뻔, 내년 여름엔 또 다른 목적으로 갈 예정이 있단다. 공부 힘들겠지만 건투를 바래. 반갑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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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자
2007.12.22 08:09:45 *.245.60.5
지구인... 좋네요.
저도 늘 제가 '세계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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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2.23 12:19:23 *.48.43.19
지난번 모임 때 못 만나서 섭섭했네요, 세계 시민, 지구인,,나도 그런 마음가짐이 자유롭게 해 주는 듯해요. 잘 지내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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