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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7일 13시 52분 등록
[모순이야기 #1] 가깝고도 아주 먼 사이


봄인가 싶었는데 겨울의 마지막 시샘이 아직 남아있다. 갑작스럽게 내린 눈발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오늘 하루는 집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한동안 마음에 여유가 없어 보지 못했던 영화 한편을 집 옆에 있는 도서관에서 아내와 함께 보았다. 영화 제목은 <밀양>이다. 작년 봄에 칸 영화제에서 배우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영화를 이제야 아내의 숙제를 핑계로 본 것이다.

경위야 어찌되었던 영화 내용이 몹시 궁금하였다. 최근 사부님의 엄명으로 <연금술사>를 다시 꼼꼼히 읽어본 이후부터는 조그만 사건이라도 우주가 내게 무슨 사인을 주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는 습관이 생겼다. 눈으로 출근길을 막으며 보게 만든 그 영화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더욱더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아야 할 사람은 아내인데 오히려 내가 빨리 보러가자고 독촉하였다. 또 조급함이란 놈이 나의 심장을 쑤셔대었다. 지금도 지겹게 다투는 아주 질긴 놈이다.

밀양(密陽), 이 영화는 한 여인이 남편과 사별하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와 겪게 되는 슬픈 상처를 그린 영화이다. 밀양 외곽의 한 국도변, 한 여인(이신애, 전도연분)과 한 아이(준)가 고장 난 차 옆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때 카센터 김사장(김종찬, 송광호분)이 나타난다. 이 일을 계기로 김사장은 이신애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자신의 연정을 표현하지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는 못한다. 두 모자의 살 집을 마련해주고 이웃들에게 피아노학원을 소개해주며 호의를 베푼다. 그런 김사장에게 신애는 그저 무관심하다. 신애의 동생 말에 의하면 김사장은 누나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라고 한다. 밀양이 아무리 남편의 고향이라고 하더라도 두 모자가 살기에는 낯선 곳이기에 신애는 그런 김사장의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는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자신에게 남은 일말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심지어 주변에 땅을 산다고 알리고 부동산 중개인이나 땅주인을 만나며 자신이 부자인양 행세하고 다닌다. 이것이 자신의 미래에 큰 화근이 될 줄은 모른다.

이신애가 돈이 많은 것을 알고 누군가 그녀의 아들 준을 납치하고 돈을 요구한다. 이신애는 놀란 마음에 카센터 김사장에게 도움을 청하려다 포기하고 어설프게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자 유괴범이 요구한 돈을 건네준다. 하지만 유괴범은 가져다준 돈이 턱없이 부족하자 신애의 애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아이 준을 돌려보내지 않는다. 신애의 신고로 경찰은 뒤늦은 수사에 착수하여 유괴범을 잡았지만 끝내 아들 준은 강가에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범인은 바로 아들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의 원장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아들을 죽인 범인임에도 신애는 얼굴조차 대면하지 못하고 피한다. 오히려 옆에 있던 김사장이 자신의 아들이 죽은 양 몹시 흥분하여 범인을 마구 때린다. 남편을 사고로 떠나보내고 유일한 희망인 아들마저 잃어버린 슬픔에 신애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화장터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누군가 옆에 기대어 위로받고 싶어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카센터 김사장은 항상 주위에서 맴돌지만 매번 무시당한다.

그러다 피아노 학원 맞은편에 있는 약국의 약사부부의 권유로 교회에서 하는 ‘상처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회’에 나간다. 신앙을 통해 한동안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찾는 듯하여 유괴범을 용서하고 하느님의 세상으로 인도하고자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하지만 죄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이미 받았다며 오히려 반대로 신애를 위로한다. 그 말을 들은 신애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자신보다 하느님이 먼저 죄인을 용서할 수 있느냐며 하느님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약국의 장로님을 성적으로 유혹하고 기도회를 방해하며 자신을 학대한다. 심지어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삶의 미련 때문에 살려달라며 다시 목숨을 애걸한다.

정신병원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퇴원하는 신애 옆에는 하나님이 아닌 주위를 맴돌던 카센터 김사장이 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슬픔을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인을 용서해보려고 하지만 머리로는 용서가 되어도 가슴으로는 끝내 용서를 하지 못한다. 머리와 마음 사이에 놓인 커다란 괴리를 신앙으로 메워보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용서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감정까지 내려놓는 것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닌가 보다.

최근 아버지의 암 재발로 마음이 심란하던 차에 다시금 삶과 죽음에 대해, 신앙과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제 더 이상 사실 날이 많지 않은 아버지의 입에서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는 자조 섞인 말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판다. 주인공 신애처럼 가슴이 꽉 막히고 미칠 것만 같다. 지금도 그 말을 되새기면 명치끝이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려온다. 아버지는 나보다 더한 심정이겠지만 가끔은 몹시 화가 난다. 암이 재발하기 전 좀 더 노력하셨더라면 조금 더 사실 날이 많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때문이다.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머리와 마음 사이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너무나 먼 거리여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일에도 몰입할 수가 없다. 작년 이맘때 남해에서 썼던 5분 장례식에 대한 글을 다시 보니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신이시여 그저 평화를 내려주소서.
신애에게, 아버지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이에게.

IP *.93.1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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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2.27 14:23:57 *.108.162.25
아버님께서는 성인의 구도와 같은 진솔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 한 말씀보다 더 절실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아버님의 인생은 코 앞의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고 또한 머지 않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일 거에요. 아버님의 회한에 서린 삶은 그 만큼 우리가 당신 등골을 빼먹은 당신 피와 살의 어느 부분들 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감히 함부로 책을 쓰기 어려우리만치... 아버님의 남은 소중한 나날들이 모쪼록 평안하시길 손모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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