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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일 00시 35분 등록
나의 탄생은 지프차를 탔다. 공무원인 아버지께서는 충청남도 청양에서 12년간 근무 하셨단다. 사남매 가운데 큰오빠만 시골 그러니까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지인 추풍령의 한 마을 죽전리라는 우리 친가에서 태어났고, 그 외 나를 비롯한 나머지 셋은 모두 충청남도 청양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단다. 나는 공교롭게도 그곳에서 우리가 대전으로 이사를 가기로 한 날 아침에 태어난 관계로 글쎄 야박하게시리 낳자마자 예정대로 그 창문도 없는 지프차에 실려 대전까지 꽃샘추위와 봄바람을 맞으며 이삿짐과 함께 실려 왔다고 한다. 어마야, 이럴 수가... 내가 평소에 유별나게 추위를 잘 타고 오싹오싹 등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한기를 곧잘 느끼며 허약한 이유도 혹시 그때 내 몸에 매서운 꽃샘바람이 들어가서 인 것이 아닐까 하고 의문을 품어 본다. 그러면 어머니께서는 펄쩍 뛰시면서 너는 그때 철저히 강보에 쌌는데 어린애가 무슨 바람이드느냐고 하시면서 바람이 들은 건 실제로 당신이었다고 아주 억울하게 사무친 듯 항변을 털어놓으시곤 한다. 그때에 너무도 고지식하게 일처리를 하셨던 답답한 아버지를 지금까지도 섭섭해 하며 원망하시는 볼멘소리로 눈을 흘기시면서.

어머니는 그날 급작스레 산기라 돌아 나를 낳고 옆집 할머니에게 겨우 미역국 한 사발 얻어먹고는 해산 후 조리도 못하고 서둘러 수십 리 길을 창문도 없는 지프차를 타고서 쌩쌩 달리는 바람에 그만 몸에 바람이 들어 애를 잡수셨다는 말씀을 생생하게 한참이고 풀어 놓으신다. 산후에 조리를 잘못하여 바람이 들면 좁쌀 같은 것들이 몸에 돋아나면서 스멀거린다고 한다. 내 아버지도 어찌나 고지식한지 산모가 얼마나 고생스러울지 보다 늘 그놈의 공직생활에만 모든 사고의 틀이 꽁꽁 박혀서는 더군다나 엄살도 못 부리고 당신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엄마의 속내도 모르고 아무 말이 없으면 답답한 것이 없는 줄 아시고 그냥 그렇게 벌어진 상황의 곧이곧대로만 실행을 하시는 까닭이다. 이럴 때 어머니의 표정은 마치 복장이 터져 죽을 노릇이라는 듯이 혼자서 중얼중얼 고개를 돌려가며 푸념을 뱉어내고는 하신다. 아버지는 지금도 그런 것을 잘 헤아리시지 못하고 또 어쩌다가 배려를 하신답시고 마치 어린아이가 치마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처럼 어정쩡한 몸짓을 하고 계시다가 도리어 엄마의 염장을 확 긁어버리는 통에 두 분은 서로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매번 잘 다투신다. 사람은 왜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시차를 적용하게 되는 개인차를 둔 것인지 이런 광경에 처할 때 마다 나는 인간을 빚은 조물주의 심술궂은 속셈이 참으로 야속하고 궁금하다.

여하튼, 나는 그래서 그 후부터 대전에서 만 세살이 될 때까지 자랐다. 네 살이 되자마자 서울로 이사를 했으니까. 나는 그곳에서 살던 생각이 참 많이도 났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나보고 너는 그때 조그만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어찌 그리 옛날 기억이 잘 떠오르느냐고 의아해 하시곤 한다.

그때 우리 집은 주인집이 새로 신작로에 붙은 대로변에 3층 건물을 지은 뒤쪽의 오래되어 낡고 허름한 별채에 살고 있었다. 지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골목길을 조금만 나가면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신작로 대로변에 요즘의 슈퍼 같은 제법 큰 당시에는 전방이라고도 하고 흔히 구멍가게라고도 하였던 가게가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 가서 과자 등을 사먹은 기억이 나곤 한다. 그 가게의 주인아주머니 얼굴은 자세히는 생각이 안 나도 둥글납데데하고 얼굴과 머리가 전체적으로 둥그렇게 보이는 파마머리를 하고 계셨고, 진열장에 과자들이 마치 평상 위에 올려놓은 듯이 유리창 가에 죽 펼쳐 놓여 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그 집은 작은 방이 두 칸 이었다. 안방과 그보다 작은 방은 안방을 거쳐서 들어가게 되어있었고 또 뒤로 나갈 수 있도록 쪽 문이 하나 달린 그런 방이었다. 그 쪽문을 열면 시커먼 블록으로 담이 있었는데 그 사이가 좁아서 깜깜했다. 그러니까 안방을 통해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볕이라고는 통 들지 않는 그런 방이었다. 안방은 그나마 볕이 들어 환했지만 곁들여 쪽방처럼 따라 붙은 작은방은 시커먼 곰팡이로 도배를 한 것 같이 벽지가 온통 장맛비에 젖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곰팡이 꽃이 피어나는 그런 시커먼 방이었다. 비가 오면 당연 세숫대야를 밭여놓기는 예사였고 찢겨진 벽지는 하수도 구멍처럼 까만 구정물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방에 들어가기를 무서워 한 기억이 난다. 안방도 그리 크지가 않아서 살림이레야 달랑 옷장 하나에 목침만한 라디오 하나 밖에 없는 방에 우리 여섯 식구가 다 한꺼번에 누워서 잠을 자기는 몹시 비좁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큰오빠는 의례 그 작은방에서 못마땅하지만 편히(?) 너른 잠을 잤던 것 같다. 아무도 그 방에서 자려고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안방 아랫목 벽에다가는 옷을 걸어놓고 허연 광목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천으로 덮어씌워 먼지가 묻지 않도록 걸어두었었다. 그 아래 아랫목 쪽 오른편으로도 창호지가 발린 작은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부엌으로 드나드는 곳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모두가 안방에서 한데 어울려 자기로 했나본데 나는 무슨 일인지 잠에서 깨어났다. 아마도 자다보니 몹시 뭐가 불편하고 갑갑해서 깨어난 것 같았다. 불이 환하게 켜진 채 모든 식구들이 이리 저리 가로 세로 모로 대강 얽혀서 자고 있었다. 나는 엄마 옆에 바싹 붙어서 잠들었다가 식구들 사이에 끼어 진땀을 흘리다 일어났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어린 아이 입에서도 한 숨이 새어나올 만 했고 실제로 나는 그때 한숨을 몰아쉬었지 싶다. 자다가 깨서 이마 위 식은땀을 소매로 훔치다가 문득 어머니 머리위에 하얀 머리카락이 쏘옥 하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마음이었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왜 어린 내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가 이제는 늙는구나 하는 안쓰러운 생각이 떠올랐지 뭔가. 나는 엄마의 흰 머리카락을 보며 난데없이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정말로 그 허연 머리카락이 고민스러웠다. 저걸 뽑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면서. 방바닥 아랫목 벽에는 여자 영화배우들의 얼굴사진이 밝은 모습으로 붙어있었고 부엌에 가마솥이 끓어오르는지 방도 절절 끓었지만 어찌나 옹색하던지 나는 도로 누워 자지 못하고 씩씩 쌕쌕 정신없이 곤하게 잠을 자고 있는 가족들 틈에서 애늙은이처럼 공연한 걱정으로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에 내가 정말 삶에 대해 절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을까? 아마 어른들의 이야기를 어디서 얻어 주워들었겠지만 툭하면 서울로 도망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노래를 부르더란다. 엄마는 서울로 이사 오게 된 이후에도 마치 우리 집 식구들이 내가 그래서 서울로 와서 살게 되기나 한 것처럼 자랑 같은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그리 욕심을 타고났던 것일까? 만약에 그랬다면 공부도 악착같이 했어야 했고 책도 많이 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 집어 치우고 영어 하나만이라도 잘했더라면 또 내가 얼마나 기를 펴고 더 나은 꿈을 꿔보았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청년시절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이후로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겉돌기 시작한 기초 부족의 공부가 원수처럼 떠오른다. 노는 것을 천성으로 타고 났나 보다. 아니 놀아보지도 못했다. 공상만 자주 하였던 것 같다. 바보같이.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보시며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가득 물고는 이 아이는 신명이 있다고 말씀 하시곤 하셨다. 신명이라... .

이왕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젖히는 김에 그렇다면 어디 다 풀어놓고 보자. 말이 좀 옆으로 새나가면 어떤가. 그게 무에 그리 대순가. 지금 나는 나의 유년의 역사적 상황들과 기억들과 추억의 한 토막의 장면이 어쩌면 더 소중하고, 더듬어 볼 수 있는 장면들을 가능한 한 모조리 끄집어 긁어모아 보는 것도 나름 의미 있지 않겠는가. 개인의 역사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대의 반영이고 한 집안의 가풍이며 삶의 애환이 녹아 스며져 있는 일상일 것이니 나의 유년에 지금의 내가 이미 존재의 뿌리를 깊이 파묻고 들어앉아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마당은 넓었다. 공터처럼. 그러므로 대문에서 방까지 제법 걸어서 들어 왔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옆 우측으로 화장실이 두 칸 있었다. 마치 공중변소같이 생겼다. 특히나 비가 오는 날에는 오빠가운데 작은오빠랑 막내오빠들이 개구리 합창이라도 하듯이 동요 <찢어진 우산>과 <송알송알>이란 노래를 목청껏 불러댔다. 내가 나중에 왜 그렇게 불렀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화장실이 무서워서 그랬다나. 아마도 추적추적 비오는 날에 마당을 걸어 나가 대문 앞에까지 가서 어두컴컴하니 불도 잘 들어오지 않았을 변소에 쭈그리고 앉아서는 이야기 속의 달걀귀신과 몽달귀신들이 아른거리듯 하면 그들을 물리쳐 쫓아 보내느라고 돼지가 멱따는 소리를 목이 터져라 목에 힘줄을 돋우며 힘껏 질러댔는가 보다. 그때에 오빠들은 대문 밖으로 나가면 갈퀴손을 한 상이용사가 돌아다닌다고 하여 나는 문밖을 나갈 엄두도 내지 않았으며 대문 앞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고, 설령 그 가까이에 갈 때면 무서운 생각에 진저리를 내듯 몹시 소름이 끼치곤 하였었다. 그래서 나는 마당의 펌프와 앞마당의 그 어딘가에서 얼쩡거리며 놀았지 싶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엄마가 장롱 깊이 찔러두는 돈을 꺼내서 아이스 깨끼를 사먹으러 친구와 함께 걸어간 것을 빼고는 별로 걸어 다닌 기억이 나지 않고 거의 업혀서 다닌 기억뿐이다.

그런데 엄마가 가끔은 나보고 걸어 다니라고 한 적이 있기는 하다. 우리 집 대문에서 길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기와집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 댁에 자주 놀러갔었나 보다. 아니면 내가 가고 싶었거나. 이따금씩 그 곳까지는 내가 앞장을 서서 혼자 갈 수 있는 행동반경 안의 사전거리 내 구역이었지 싶다. 그 댁에는 하얀 개가 있기는 하였지만 이집 개는 그다지 무섭지 않았고 또 조금 작았다. 나는 그 집 대문이 아주 인상적으로 남아있는데 두꺼운 황토색의 누런 나무대문이 앙팡지게 꽉 짜여 있었고, 니스 칠이 잘 발라져 있어서 윤기가 반질반질 했으며 집안이 정갈하고 깨끗하였다. 기왓장은 짙은 회색이었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도 별로 없이 한가운데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오돌도돌한 허연 대리석 같은 계단을 몇 계단 오르면 역시 누런 나무로 된 미닫이문이 있었고 그 안에 나무가 쪽쪽 깔린 마루가 있었던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 집은 충렬이네였다고 하는데 아줌마들 몇몇이 그림자 질뿐 그 외에는 아무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 그 집 아주머니가 굉장히 친절했고 봄날의 화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보면 반기며 웃어주었는데 비추는 햇살과 함께 그 집안 분위기 전체가 화창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넘겨버릴 수 없는 기억과 느낌이란 그 집안의 살림의 규모나 살아가는 행동양식은 대문 앞에만 딱 들어서도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마도 이는 아파트 입구나 현관도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히 나는 그런 어떤 감에 대한 느낌들을 소중히 기억하곤 하는 것이다. 그 집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잘 짜인 튼튼한 장롱 같은 기억이 아직도 오래 남아 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 집 대문은 철 대문이었고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졌으며 위에는 약간의 녹이 슨 상태에서 고동색의 창살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좌측으로 수도가 박혀있는 주인집 정미네 집으로 통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 그 정미네 집의 크고 화려함이라니. 여기서 내가 지금 말하는 화려함이란 크기와 규모를 뜻함이다. 가운데가 뻥 뚫린 마당위로 펼쳐지는 기억 자 모양의 정미네 집은 3층으로 된 크고 웅장한 양옥집이었다. 아니 집이라고 하기에는 걸맞지 않는 커다란 상가 건물이었다. 도로가의 가게가 1층이었으니까 우리 집과 정미네 집 아래층은 축대로 싸여있는 그런 집이었다. 그 집 아래층과 우리 집은 평평하게 높이가 같았고 위로 건물이 높이 솟아 있었으니 아마도 그 맨 아래층은 별로 볕이 잘 들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우리 집의 작은 골방같이. 우리 집에서 보자면 그 아이는 3층 오른 편에 살았다. 나는 그때에 이미 주인들은 가장 높은 곳에 산다고 입력해 두었던 것 같다. 마주 보이는 3층 정면에서는 매일 우리 집이 아주 훤하다 못해 45도 각도로 방안 깊숙이까지 샅샅이 들여다보였을 것이다. 그때에 군인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허구한 날 우리 집을 내려다보면서 시시때때로 불렀는지 <맹호부대용사들>과 <빨간 마후라>를 내가 따라 부른 기억이 아직도 정확히 나고 그래서 그것을 지금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잘 부른다.

나는 1962년 봄에 태어났고 1965년도 봄에 아버지의 발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으니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고들 어른들께서는 말씀 해 주셨다. 우리나라는 1961년에 박정희 소장 등에 의해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고 내가 태어났을 당시 2차 월남전이 진행 중이던 때였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으로 파병을 했었고 그래서 조국을 위해 초개와도 같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정의로운 삶인 양 그 까닭모를 개인의 정체성에 무턱대고 그럴싸하니 마치 국가와 민족을 대표한 합목적성이 드리워지며 아무렇지도 않게 권장되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 광경들을 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냄새 맡으며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우리가족의 일가친척 중에도 월남전에 파병되었다가 돌아온 이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 이들 국가유공자들의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게 되었다. 그게 무슨 운명적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군인들의 힘찬 목소리는 내게는 마치 신명나는 굿거리장단처럼 들리기라도 했던지 나는 당시 그 노래를 신나게 배웠기 때문에 지금도 그 노래를 부르면 환하게 웃으며 명랑한 노래처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부르고 있다. 세 살 적 버릇이란 이토록 선명한 기억과 함께 한 인간의 삶속으로 각인되는 것이던가 하고 새삼 느끼면서.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팽배하던 시대 세계역사의 질곡과 허상을 살펴보고 그것을 느끼고 안다면 어떻게 그렇게 신명난 노동요나 부르듯 아무렇지도 않게 기운찬 군가 같은 유행가로서만 생각하고 부를 수 있겠는가 하고 다시금 생각해 본다. 어쩌면 당시 우리나라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 노래를 노동요나 유행가처럼 혹은 군인들로 하여금 그저 잘 다녀오라는 염원의 응원가로만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 시대가 추구하고 보통의 일반 대중에게 강요된 그 희생과 부름에 일거의 논란이나 어떠한 반란도 없이 아니 항거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오직 한 길, 나라의 부름을 받자와 당연히 충성하며, 낯선 이국의 땅에서 조국과 부모형제와 처자식들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 이기나 했던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오인된 채, 얼마나 어이없고 기막힌 희생들을 하였던가. 우리는 직ㆍ간접으로 그들, 바로 내 부모 형제 일가친척 친지들의 죽음의 넋 즉 거룩한 영혼들의 후광으로 인해 번영을 꿈꿀 수 있었고 또한 이만큼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은 아닌가. 그 피와 살들이 일궈놓은 죽은 넋들의 등골을 야금야금 빼먹으면서 보릿고개를 넘기고 고속도로를 넓히고 다리를 건설하고 배를 띄우고 전국이 어디서나 일일 생활권을 외치며 우리가 교육받고 희망을 품으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사무친 죽음과 엄청난 불구가 되고야 마는 깊은 부상이 있었길 레 우리가 지금 이 평화를 누리고 살게 되었지 않았던가 생각하면 그 노래를 도저히 명랑하게 부를 수만은 없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와 조국 앞에 그들의 값진 희생이 헛되지 않게 그들의 꿈과 몫까지 더 나은 내일과 따스한 오늘을 서로 나누고 도우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아직 남아 있는 인생의 나날들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우선 내 앞 처신도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 전부가 다 틀리거나 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집 풍경 가운데 나는 또 다른 것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덩치가 큰 오빠가 교복을 입었던 모습과 학생 모자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오빠가 그 학생복 차림으로 나를 업어준 기억이 있는데 그 무렵 어머니는 늑막염을 심하게 앓고 계셔서 아마도 오라비가 너를 업어주었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는 오빠 등에 업혀 있던 내 모습과 검정색 학생복과 하얀 띠가 둘러쳐져 있던 오빠 모자가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교복을 입은 큰오빠의 등에서 보채고 있었던가 보다. 해거름의 저녁이었고 집안은 조용했으니 어린 가슴에도 적막감이 들었던 것일 게다.
언젠가 비가 오는 날에 아버지가 나를 안고서 안방과 우리 집 앞마당의 작은 쪽마루에 걸터앉아 계셨는데 그날 나는 아버지의 무릎팍에 안겨서 바닥을 이리저리 꿈틀대며 돌아다니는 벌건 지렁이들을 한참이고 들여다보며 그들의 신기한 몸동작을 오래 지켜보고 있기도 했다.

우리 집 안방 왼편으로는 부엌으로 통하는 나무 창살에 창호지로 바른 문이 있었고 위험하게도시리 방과 부엌사이에는 편히 디디고 내려설 만한 바닥으로 시설이 되어있지 않아 내가 문지방에 가까이 서지 못하도록 많은 주의를 받고는 하였었다. 한마디로 부뚜막이 평편하게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방에서 만일 잘못 부엌으로 떨어지는 날에는 그대로 바닥으로 냅다 꽂히거나 곤두박질쳐지도록 위험하고 불편하게 되어 있었기에 오빠들이나 곡예를 하듯 들락거렸다. 나중에 어머니의 말씀을 듣자니 내가 떨어질 까봐 가마니를 몇 장이고 포개어 깔아놓으시곤 하였지만, 그때 난 신통하게도 말도 잘 듣고 한 번도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부엌에서 밥상을 차려서 올리면 큰오빠가 받아들곤 하였다. 그러면 엄마는 다시 부엌에서 마당으로 향하는 문을 돌아서 안방 문으로 들어오시곤 했다. 그토록 턱이 높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때 세발달린 새로 나온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상인 오봉에다가 밥을 차려놓고 먹었다. 아빠와는 함께 식사를 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 유년에 아빠와 밥상을 함께한 기억은 손에 꼽힐 정도다. 나는 세상의 아빠들은 다 그렇게 늘 바쁘고 집안 살림에는 등한시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고 청년시절까지 보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쩌다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막내고 여식인 나를 그리도 챙기셨던 가 보다. 어머니는 항시 밥을 퍼서 이불 속 깊이 찔러 넣어두시곤 하셨다.

위험하기는 했어도 그 시절 슬쩍슬쩍 들여다본 부엌이 기억에 나기도 하는 데 아궁이에는 시골 부엌처럼 까만 가마솥이 걸려있었고 아궁이 맞은편에 나무로 짠 찬장 같은 것이 하나 달려 있었다. 부엌 앞에는 그러니까 안방에서 밖으로 통하는 쪽마루 왼편에는 수돗가처럼 하수시설이 되어있었는데, 수도는 거기에 박혀있지 않았지만 우물하고 펌프가 있어서 오빠들이 펌프질을 하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곳에서 일체의 부엌살림들을 다 하셨다. 거기서 씻고 닦고 빨고 담그고. 여름에는 거기서 오빠들이 펌프질을 해대며 등목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끔가다가 수돗물이 필요할 때는 저만치 떨어진 주인집의 아래층에 부엌 앞으로 가면 그 앞에 희고 둥근 쇠파이프가 박혀있었고 은빛의 스덴 수도꼭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고기비늘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주인집에도 우리와 같이 남자 아이들과 딸아이가 있었는데 내 또래의 여자 아이의 이름은 정미였다. 그 식구 가운데 그 아이 오빠 이름 중에는 기열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정미는 아마 나와 동갑내기였을까. 그 아이는 항상 생글생글 잘 웃었던 것 같은데 가끔가다가 내게 심통을 부리곤 했던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 하다. 무언지 모르지만 그 아이는 늘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반면에 나는 주의를 들었거나 했던 것 같다. 이를 테면 그 아이에게는 보호와 귀태가 흘렀다. 아마도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그 아이도 막내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부모님은 연세가 많았고 그 집은 우리와 달리 아주 부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와 은근히 비교가 되곤 한 것 같기도 하다. 아까 그 수돗물 말인데 쉽게 말해서 그 애는 수돗물 먹고 살고 우리는 우물을 길어서 먹거나 지하수를 펌프로 끌어올려 먹는 차이라고나 해야 할까. 뭐, 일종의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한다. 요즘이야 수돗물 먹는 일이 상놈의 물이 되었지만 그 당시는 수돗물 못 먹는 사람이 상놈 대접을 받는 그런 세월이었으니까. 수돗물을 틀어놓고 조금만 흘러넘치게 해봐라. 주인집으로부터 무슨 소리를 듣게 되는지. 아마도 난 그때 수돗물 먹지 못하는 비애를 그 아이로부터 은연중에 살포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가 그 아이를 부러워한 것 중 가장 으뜸은 아마도 그 가게였을 것이다. 온갖 먹을 것들이 잔뜩 쌓여있고 그 아이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다 집어먹을 수 있는 그 포만감이 가장 부럽지 않았을까? 나는 그때 그게 모두 그 아이 꺼 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 ‘우리 꺼’, ‘내 꺼’ 라는 말에 대한 확실한 의미를 그 아이에게로부터 배웠지 싶다. ‘만지지 말라’는 등의 의미나 ‘아무나 소유할 수 없음에 대한 최초의 부정이 주는 안타까움’이 내 기억으로는 거기에서 싹트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지금 내가 글을 쓰면서 발견하고 있는 것으로서, 내 자신도 여태 한 번도 생각해 보거나 한 적이 없는 기억과 느낌과 감정들의 소산이다. 이와 같은 예로 생각해 볼 때, 나는 여태까지 솔직히 내가 적어도 대여섯 살은 족히 먹고 나서 서울로 이사 온 줄 알았다. 엄마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엄마가 잘 모르신다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전적을 떼어보니 확실히 맞는 것이다. 세 살 정도의 기억을 마흔 일곱의 내가 지금 이렇게 펼치고 있는 것이 나로서도 다소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학계에서 이미 분석되어 세 살 무렵의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니 내가 그리 유별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이러한 나를 되돌아보는 무심한 이 일로서 다만 나는 그때 그 감정의 섬세함 들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에 대해 새삼스런 감탄과 더불어 매우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심한 마음의 상처가 있는 바, 그것을 어찌 간단히 넘어갈 수 있으랴. 그래서 이에 접하고 보니 아울러 내 아이들의 경우를 견주어 떠올려 보며 그 아이들의 기억에 대해서 혹시 그 아이들도 이럴까 하고 의문을 품어보게 되기도 한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은 내가 이제까지 염려했던 부분들보다 훨씬 더 크고 깊게 치명적인 상처가 내 아이들에게 뿌리 깊이 잠재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의 염려와 슬픔 가운데 하나가 그리고 젊은 날 그토록 가슴에 쓰렸던 아픔 중에 하나가 아이들이 나의 존재를 몰라 줄 거라는 안타까움이 무지하게 컸다. 내 허물과 부족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탐심 또한 숨어져 있는 까닭이다. 헛된 인생을 산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이토록 못 잊는데 그들은 나를 잊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적막감 그리고 쓸쓸함 등이, 혼자서 기억을 끌고 가고 있는 불안정한 안타까움과 이러한 상황으로 밖에는 이어가지 못하는 내 인생의 소모전에 대해 손해를 보는 기분이 없지 않았다. 그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없어지고 말 나의 존재의미에 대해 나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의무적으로 우선에 그들에게 더 이상의 혼란과 아픔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인지로 인해 애써 참아 홀로 외떨어져 겪으면서도, 내가 저지른 내 인생의 보상에 대해 신경이 곤두서 있는 어처구니없이 얄팍한 속마음이 전혀 없던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이 아이들을 남겨두고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혼 10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아이들 아빠인 그 사람에 대해 연민과 그리움을 간직하지 않고 자유롭게 놓으려고 애를 써왔다. 정말이지 무지하게 애를 써왔다. 남자 하나, 나도 그처럼 잊을 수 있다. 우리의 수평적 인륜이라는 관계는 불과 5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 안에 겪은 원치 않는 풍상들이 많기에 나는 전혀 그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그 사람자체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맞지 않은 여러 부분들로 인해 수많은 나날과 시간을 애태워왔고 진심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이혼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 애써 내 가슴에 남아있는 그를 완전히 떨치고 난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이제야 수면위로 떡하니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바로 아이들이었다. 이 부분에서 오해들일랑 마시라. 못 잊는 것이 아니라 안 잊은 것이었으니. 그는 그때 이런 것까지도 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나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나는 내 온 몸과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 일에 대해 나 자신을 속이거나 설득하지 못하는 미련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사람인 듯싶다.

나는 큰 아이의 경우나 겨우 엄마에 대한 기억이 있을까 말까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아빠인 그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다. 만으로 겨우 두 살, 세 살, 네 살 의 어린아이들 이니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이 운명이라면, 살며 좋은 꼴을 보일 수 없는 부모라면 존재의 부분에 대한 기억을 지워주는 것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엄마의 존재를 알고, 만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놓고 합리적 방법이 통하지 않는 집안이니 허구한 날 나 혼자서 끌탕을 하며 지내기 일 수였다. 실로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죄스럽고 원망스러운 순간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내 지난한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내게 천형이 가해지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의 임시방편적 일상들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내 삶을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필연적인 숙명의 과제가 오직 이것 하나라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나마 깨닫는다. 그동안은 아이아빠에게 기대 아닌 기대를 하여왔지만 이제 그 모든 끊을 놓으면서 내게 폭풍처럼 불어 닥치는 인생의 두 번째 회오리에 대해 나는 지금 떨고 있는 것이다. 내 서성거림의 원천이 이것이다.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아이 아빠의 경우, 내 인생의 한 남자에 대한 짧은 수평적인 인연과는 달리 끝도 없는 이 직선을 관통하며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인연, 뼛속까지 파고드는 천륜에 대해 나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희뿌연 십자교차로에서 수평의 가로 길을 찾고 헤매이는 동안 더 이상 길이 아님을 알고 멈춰 서려는 순간에 돌연 수직으로 뻗치는 이 천륜으로 내리 꽂히는 숙명의 길은 내 삶을 전면적으로 흔들어 깨운다. 나는 십자교차로, 마치 예수의 십자가와도 같고 한자의 하심의 下자와도 같은 이 길 앞에 맞닥뜨려서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아니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을 감싸 쥐고 발을 동동 굴려 쓰러질 것만 같은 현기증과 함께 매연과 소음으로 오장육부가 뒤틀리면서 급기야 발작을 일으키고야 말 것 같은 천형의 고통을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닫.기.위.하.여.

여태는 빨간 불이었다. 아니 십자교차로 안에 갇힌 노란불이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고 듣지 못했다. 나는 누군가 나를 데리러 그 위험한 곳을 뚫고 와주기를 서성여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 복잡하고 무심한 그 길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미친년, 미쳤구나. 너 왜 거기에 그렇게 서 있는데? 나와. 건너와.”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지쳐 쓰러지고 또 기다리고 매일 매일을 그 매연과 소음과 현기증과 멸시와 동정과 웃음과 눈물과 바람과 폭우와 야유 와 비웃음과 애달픔과 속절없음과 낙엽과 하얀 눈과 진눈개비와 소나기들 속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운명아, 이제 나에게 파란 불을 다오. 나에게 파란 길을 열어 다오. 생명의 파란 하늘아! 나도 너처럼 선명한 파란 불을 밝히고 싶다. 나도 한 번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 나도 다시 일어서고 싶다. 부러진 팔과 다리를 꿰매고 붙여서 뚜벅뚜벅 맑은 바람과 시원한 비를 맞으며 소리치고 싶다. 내가 살아있음을, 내가 죽지 않고 쓸모 있게 살아가고 있음을, 내가 더 늦기 전에 나를 구원하고 싶어함을 그리하여 마침내 나도 내 등뼈로 당당히 일어서 찬란한 꿈 꽃을 꼿꼿이 피워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쓰고 또 쓴다. 스스로의 치유와 스스로의 구원을 창조해 나가기 위해.

세 살 무렵 정미와 나 사이의 인생의 우열과도 같은 생활은 어느 정도 내 삶에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나중에 서울로 이사 와서 얼마 후 우리가 집을 짓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후로 살림이 조금 나아져서 명절이면 다락방에다가 과일을 짝으로 들여다 놓고 먹을 수도 있게 되었을 때에도, 나는 많을 때 미리 과일 몇 알을 오빠들에게 들키지 않는 곳에 숨겨 놓고는 과일이 하나도 없다고 애석해 하며 찾을 때마다 마치 마술이라도 부려 요술주머니에서 꺼내오기라도 하듯 하나씩 나누어 주곤 하였던 것은 어쩌면 유아기에 내가 친구 정미와 비교되는 풍요로움과 빈곤에 대한 차이를 이미 터득한 발로였을까? 엄마가 “벌써 다 먹었니?” 하고 화들짝 놀라실 때마다 나는 엄마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감춰두었던 과일들을 꺼내다 드리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야단은커녕 그때서야 겨우 맛을 보시곤 하는 것이었다. “맛있구나. 처음 먹는다.” 하시면서. 엄마는 예전부터 치아가 안 좋아서 과일 한쪽을 가지고 하루 종일 잡수셨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나도 그걸 이해하고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가 시리고 잇몸이 솟구쳐서 천천히 먹다보면 남 보기에는 하루 종일 먹는 것 같아보여도 실제로 양은 얼마 먹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식구들은 다 먹성이 좋다. 그 점은 모두 아빠를 닮았다. 그러니 장정 셋이 과일 한 짝쯤이야 눈 깜짝 할 사이에 금시 다 없어지고야 만다. 특히 작은오빠는 우리 집에 친구들을 잘 데려다가 아주 기거하듯 살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늘 남자들이 버글버글 대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숨겨두었던 과일을 하나씩 집어다가는 또 옆집에 아이가 있는 집에까지 퍼주기 일수였다. 우리 집도 세를 주고 살게 되었을 때 특히 아이가 있는 집이 꼭 끼어있고는 하였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우리 집 다락에 있는 과일이랑 과자를 나도 먹지 않고서 내 몫을 그 아이들에게 가져다주고는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주는 입장을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주기는 쉬워도 받기는 어려운 사람이다. 그러나 이도 길게 펼쳐서보면 그것이 다 십자교통로로 통하듯 수직으로 수평으로 통하게 되어있다는 믿음이 장년을 향해가는 이 나이에 돌입하자 겨우 찾아든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와서 엄마가 집을 지었을 때 대전에 살 때 집주인이셨던 그분들 정미네 엄마아빠 내외께서 우리 집에 다녀가신 기억도 나는데, 그때 벌서 그분들은 돈 많은 어르신 같이 부유해 보이기는 해도 이미 연세가 많아보였다. 아마도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나이 차이가 많았다고 했지 싶다. 그때에 우리 집에 오셔서 자제들 가운데 누가 약사가 되었다고 했다. 기열이라던가? 아마도 우리 오빠들과도 나이 또래가 같은 자식들이 그 집안에도 있었든가 본데 나는 그 둘, 내 친구였던 정미와 기열 오빠만 생각난다. 그리고 보니까 작은 오빠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서울에서 대전까지 그 댁에 인사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그토록 서로 간에 그런 정리가 오갔던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요즘에는 그런 광경들이 쉽지 않다. 혼사 때나 청첩장 정도 보내고 받은 쪽에서 제대로 지키지도 않기 일수며 아쉬운 일이 별로 없으면 연락조차 별로 하지도 않는다. 그뿐인가. 너무 빠듯하게 영세하게 살아서 그런지 경우에 없이 몇 푼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아등바등 떼어먹으려고 하지를 않나, 서로 간에 권리만을 악다구니로 주장할 뿐이지 양보는 절대 하지 않으려 든다. 그러니 무조건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는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마음을 열어두는 편이 신상에 편하다.

유년의 대전에 살 때의 풍경 가운데 빠트릴 수 없는 기억의 또 하나는 하얀 얼룩말 같이 생긴 서장 댁의 그 큰 개라고 할 수 있다. 서울로 처음 이사 왔을 때에도 나는 그 얼룩덜룩한 점이 박힌 사냥개처럼 무시무시하게 큰 그 개가 자주 생각나곤 했는데 나는 정말이지 그 개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놈의 개는 우리가 그 집에 가기만 하면 펄쩍펄쩍 뛰면서 엄마가 나를 등에 업고 있는 내 등까지도 올라탈 것처럼 덤벼들어서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못한다. 그 집에만 다녀오면 나는 놀라서 엄마가 먹이는 기용환인지 포룡환인지 은색의 은단같이 생긴 작은 알갱이를 받아먹고서야 겨우 잠에 들고는 했다. 아마도 내가 자다가도 낮에 놀란 그 개에 대한 충격 때문에 자지러질듯 울어재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 그 개 때문에 쇼크로 죽을 뻔 했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서울에 와서까지 그 놈의 개가 달려드는 꿈에 놀라곤 했을까. 그토록 무서웠는데 무슨 일 때문 엔지 엄마는 나를 들쳐 없고 그 댁을 자주 가서 나는 정말이지 몸서리쳐지게 싫었다. 그 집은 선화동인 우리 집에서 큰 대로의 신작로를 건너서 가는 대흥동인가 하는 새로 생긴 요즘의 신도시 같은 곳이었는데, 양옥집의 그 집에 가면 뽀얗고 통통하고 둥글둥글 포동포동하고 새까만 비로드 홈웨어를 입은 중년의 점잖은 아주머니가 뽀샤시한 웃음을 자아내며 반기곤 했다. 하여간 나는 비교적 그 개에게 자주 놀란 기억이 나는데 그 양옥집에 제법 자주 가긴 한 모양이다. 나중에 왜 그리 그 집에 갔었느냐고 나는 그 집의 개가 너무나 무서웠는데, 왜 엄마라는 사람이 내 마음도 그리 모르고 들쳐 없고 갔느냐고, 나 그놈의 개 때문에 죽을 뻔 했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푸념을 털어놓으셨다. 무슨 일만 있으면 그 집에서 불러대는 바람에 안 갈수도 없고 허구한 날 식모처럼 일을 다 해주고는 했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어려서는 이런 말을 해주지도 못했고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하니 어머니는 그러한 세월들을 허리가 휘도록 달게 받으며 마치 당신 일 이기라도 한 양 우리들을 위해서 힘껏 살아내셨던 것이다.

엄마. 미안해요. 나는 무슨 엄마가 그토록 내 심정을 모르는 걸까 사무친 마음이 아직도 있었어요. 나는 정말 그 집의 겅중겅중 뛰어오르는 개가 미치도록 싫었어요. 엄마 등에 업혀서 엄마 마음을 몰랐네요. 나도 그때처럼 답답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오래 인사하느라 마당에서 빨리 나오지도 않고 있었구려. 집으로 돌아와서는 약을 먹이고서 재우면서까지 말에요. 엄마는 나를 그렇게 키웠건만 엄마의 딸인 나는 그렇지 못했어요. 할 말이 없어요.......

그리고 또 언젠가는 내가 어머니가 서울로 이사 올 때까지 끼고 오셨던 시집오실 때 장만해 오셨다는 3단의 오동나무로 짜인 장롱 안에서 시퍼런 지폐를 한 장을 꺼내다가 내 친구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아이스깨끼를 사먹으러 간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아이가 주인집 딸 정미였을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 곁에 있었던 생각은 확실히 나는데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때에 나는 정말이지 그 아이에게 무언가를 사주고 싶었고 의례 손님이 오면 무언가를 대접하던 엄마처럼 꼭 그 심정으로 마침 어머니가 여닫이 장에 돈뭉치를 돌돌 말아 장속에 끼워 넣던 그 생각이 떠올라서 도둑질을 한 것이다. 그것을 친구 보는데서 찾아가지고 딱 한 장만 꺼내들고 그 가게로 가서 과자 한 봉지를 샀을 뿐인데, 왜 그렇게 잔돈을 많이 거슬러 주는 건지 정말 어쩔 줄을 몰랐다. 아주머니는 몇 번이고 “너 이거 엄마가 사오랬어?” 라고 물으신 것 같은데 나는 무서워서 끄덕이기만 했던 것 같다. 하필 동전으로 다 거슬러 주었는데 아주 한보따리를 주어서 깜짝 놀랐다. 혹시 화투를 치는 줄 알고 바꿔주었을까? 얼마 되지 않는 골목길로 들어오면서는 납작한 구두닦이 박스 통 같은 네모상자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있다가 아이스깨끼를 꺼내어 파는 아저씨한테로 가서 그 기다란 깨끼까지 사면서 말이다. 어린 생각에 어찌 그리 한 곳에서 사지 않고 골고루 다 팔아주었는지 모르겠다. 신통방통하게도. 아이스깨끼 장사는 남자아저씨였는데 가게와 우리 집 사이의 담벼락 밑의 골목에 있었다. 나에게 일찍이 포트폴리오 정신이라도 있었을까?

그 후의 장면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혼이 났는지 어쨌는지 기억에 없다. 다시 여쭈어보니 엄마는 내가 돈을 꺼내가지고 가서 그런 적이 있다고만 하시고 웃으신다. 당신 기억에도 야단을 쳤는지 어쨌는지 생각이 안 나신단다. 하여간 지금도 당시에 장롱에서 돈을 꺼낼 때의 짜릿한 떨림을 나는 기억한다. 내 친구 이름도 얼굴도 생각 안 나는 데 말이다. 어찌나 놀랐으면 거스름 돈 쥐어주는 것이 그리 부담이 되었겠나. 그런데 이럴 때 단독 범행이 아닌 공모란 힘과 위안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것도 나는 일찌기 그때 경험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애가타서 움칠움칠 놀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 친구에게 무얼 먹이고 잘 대접한다는 만족감과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겁이 나면서도 꾹 참고 계속 진행을 하면서 특히 아이스깨끼까지 사 먹일 때의 풍요로운 만족감이란 내 잘못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마치 이런 기분과도 같았던 것일까?

언젠가 나는 캄캄한 밤에 집안에 혼자 있기가 아주 무섭거나 싫은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 누군가 나에게 어린 아이를 잘 돌보고 있으라며 책무를 맡기면 나는 얼결에 대답을 하고는 혹시 낯설고 무서운 침입자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다시 집안을 철저히 점검하면서 아가를 안심시키는 동안 금세 용감해 졌다. 그 어린 아이를 보호해야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그를 단단히 지키는 일에 빠져들다 보면 아이와 함께 어느새 불안감이 사라지고 그 아이를 보호하는 일로부터 위안을 동시에 받으며 무서움과 두려움이 확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어떨 땐 도리어 즐거움이 샘솟기도 한다. 웃기지 않은가. 웃기다.

그런데 이런 어릴 적 유년의 기억을 나는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느꼈었다. 언젠가 내 아이들을 통해서 느낀 감정들이기도 한데 실제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간난 아기가 내 두려움을 없애는 뿌듯하고 즐거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오히려 논리적으로 따지면 더 거치적거리고 아무런 해결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그들을 도와 지키는 것이 내 두려움을 없애고 두려움이 바뀌어 실제로는 그 무거움과 짐이 희망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를 안심시켜야 하는 책임감에 집중하다보면 어느덧 자신이 그 두려움으로부터 당당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명을 지키다가 보면 내 두려움도 사라지고 마땅히 아이까지도 잘 보호하고 있는 이중의 효과와 잘 지켜야 한다는 의욕까지 솟구쳐서 아무 염려가 없는 상태로 상황이 호전되어 간다는 점이다. 책임감이란 내게는 그런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도 정신적 미성숙의 우리들을 지켜보면서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아마도 앞의 보살핌의 예와 같은 이런 나의 실질적 경험들은 정신분석에서나 심리학에서 무수히 많이 보고되고 있는 확실하고 뚜렷하며 당연지사일 것이다. 나는 공부해서 알아낸 지식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체득한 감각들을 지금 기억에서 떠올려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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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써가고 있네요. 너무 얽히죠? 밑에 다른 글은 매끄럽지 못한 것 같아 지우다 보니 아직 결론을 못 맺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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