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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6일 16시 21분 등록
지하철을 탔다가 짧게 걷기 위해 버스로 갈아타러 가는 도중의 길목에서 무심코 진열장의 옷 하나가 눈에 들어오길 레 구경이나 할 요량으로 양품점엘 들어갔다. 예고도 없는 미친 눈이 대낮 도심 한복판에 펑펑 쏟아져 내려 사람들을 즐겁게 혹은 어이없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3월이고 또 봄은 올 것이기에 봄옷으로 갈아입힌 진열장에 먼저 눈길이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금세 미친 듯이 퍼붓다가 스르르 담을 타고 사라져버리고 마는 맥없는 이무기처럼, 솜사탕 같은 눈이 봄 한껏 부풀어 반짝하니 제법 흠뻑 퍼붓다가 물이 돼버리고만 도로를 아쉽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진열장에 걸려있는 옷 가운데 하나에서 유년의 무늬가 떠오른다.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벌써 약 37년 전쯤의 빛깔과 무늬를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년의 그 빛깔과 무늬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같은 기하학적 문양을 보면서 내가 아직도 품고 있는 기억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내가 입은 옷은 지금 진열장에 걸려있는 옷의 색깔보다는 어둡고 탁한 빛깔의 옷이었다. 하지만 그 기하학적 직선의 배열이 독특한 것이기는 했고 좀처럼 어린 아이들이 잘 입지 않는 그런 무늬와 색깔의 옷이었다.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어서 나는 작은 성인여성들이나 입을만한 옷을 대강 입기도 하였던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그러니까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의 겨울방학 기간 동안 10여 센티가 자라 나의 키는 벌써 165센티미터 정도나 되었으니까 말이다. 제법 멀뚱하게 키가 컸던 것이다. 그 정도의 키면 어른 옷을 입고도 남는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또래에 비해선 언 밸런스였다. 어린 아이라서 제 또래 옷을 입으면 품이야 살집이 없고 가늘어서 다 맞지만 그 길이가 껑충하게 올라가기 일쑤고 또 또래 아이들과 같이 귀여운 옷을 어떻게 해서든 마음에 드는 것으로 엄마를 졸라 사서 입을 양이면 금세 키가 자라버리는 통에 받아 입을 동생도 없는 마당에 한 해를 못 입고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옷은 시장의 어느 양품점엔 가에 걸려 그리 요란하지 않고 어른이나 아이가 함께 입어도 그다지 튈 것 같지 않은 그런 옷 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도 요리조리 따져보고 아이가 입기에는 너무 고상한 듯해서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제법 실용적이다 싶어서 사주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너는 저 옷이 뭐가 좋다고 그러니?” 하고 한 말씀 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속으로 생각할 때 그 옷은 여러모로 신경 쓰지 않고 매치시켜서 입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 옷을 골랐다. 물론 아무 바지나 위에 입을 수 있는 흔한 목폴라형 옷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그 옷은 그냥 그 자체로만 입을 것이 아니고 맵시가 나는 겉옷에 바쳐 입을 옷이기에 더욱 안성맞춤이기도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멋진 천으로 맞춘 점퍼스커트라는 통으로 만든 원피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옷은 당시에 아이들로서는 절대 쉽게 입을 수 없는 빌로오드라고 하는 고급 천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내게 그것으로 만든 옷이 하나 있어서 그 안에 함께 갖추어 입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겉옷의 점퍼스커트는 짙은 청색으로서 우리 동네의 입구에서 소아마비 언니가 언제나 열심히 힘껏 발틀을 돌리며 운영하는 양장점에 가서 언니가 내어주는 여러 잡지책들 가운데에서 디자인을 고르고, 다시 그것들의 제단을 주문하여 만든 옷이었기에 더욱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그러니 예쁘게 받쳐 입을 옷이 필요했던 것이다. 누구나 입는 하얀 블라우스 말고 말이다.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시장에 따라 나섰다가 그것을 보는 순간 우선 크기가 넉넉해 보이니 어머니는 오래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무리 없이 사주셨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옷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사실은 그 옷을 점퍼스커트에 함께 받쳐 입고 학교에 가자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며 그 옷을 어디에 샀느냐고 물어 오시는 것이 아닌가. “참 특이하고 멋지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기하학적 무늬를 연출한 듯한 천의 조각들을 단순하지만 몇 가지 주변 색으로 큼직하게 나누어 붙인 옷이었다. 보통의 여성스럽게 생기고 복스러운 이미지의 4학년 나의 담임은 그렇게 내가 받쳐 입은 티에 관심을 보여주시기도 했던 것이니 내가 얼마나 속으로 우쭐했겠는가. 나는 그 옷을 아주 오래도록 그 점퍼스커트와 함께 아끼면서 입었고 그래서 그 옷의 색깔과 무늬가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가 보다. 어떨 때 기억이 떠오르곤 하면 가끔은 그런 옷을 찾기도 했다.

(우습게도 그 옷 하나를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 잠간 동안에 초등학교 시절의 별의 별 생각이 주르르 마치 줄줄이 사탕처럼 엮어져 뛰쳐나와 아우성을 친다. 이 일을 어쩌나. 그래도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잠시 선생님과의 추억을 더듬어 보자.

그 선생님과 함께 방과 후에 친구 몇몇이 남아서 늘 우리는 선생님께서 시키시는 일 가운데 무언가를 열심히 했다. 이제 생각하니 아마도 환경미화 같은 것이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남아서 할 일이 별로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우리 보고 착하다고 하시면서 맛 나는 빵과 과자 등을 사주시고는 했는데, 그때 가장 유행하던 것의 과자이름의 대명사가 마치 요즘의 초코파이와도 같이 유명한 <라면땅!> 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즈음에 라면이 우리생활에 끼어들면서 연탄불이나 석유곤로에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라면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미칠 듯 달려들고는 했다. 그 라면의 빅 히트에 편승해서 나온 것이 <라면땅>과 <라면과자>라는 것으로, 아이들이 흔히 문방구 등을 통해 즐겨 사먹는 과자로까지 만들어진 것이었다. 아마 그 즈음 유행하던 종합선물세트에도 끼어 있었지 싶기도 하다. 그 시절 우리는 추운 겨울이면 교실마다 신문지와 나무에 불을 붙여 조개탄으로 교실에 난방을 하고는 했는데,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기 한두 시간 전에는 그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았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점심을 먹고는 하였다.

바로 그 난로가 방가 후에 우리가 선생님께서 맡기신 일을 다 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조개탄의 불꽃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아쉬운 온기를 뿜어내며 꺼지기 싫은 듯 미적대는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도 꺼지기 싫은 불씨들처럼 난로 주변에서 집으로 곧장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대로 그냥 헤어져야 하나 소리 없는 물음표를 선생님께 슬며시 마음과 표정을 담아 던져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선생님께서는 “얘들아, 우리 라면땅 구워 먹을까?”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대답보다 쩌렁쩌렁한 메아리가 교실 안을 온통 마구 뛰놀고 쿠킹호일 같은 비싼 것은 당시에는 있지도 않아서 두꺼운 널빤지를 구해서 위에 올려놓고 라면땅을 혹은 생 라면을 부셔서 올려놓고 스프를 찍어 먹는 맛이라니. 고소하고 짭쪼롬한 그 맛의 오묘함은 그 분위기와 어우러져 기가 막혔다. 요즘에야 누가 그런 걸 먹느냐고 할테지만 그때의 우리들에게는 그런 추억이 있다. 그래서 어른들도 라면을 보면 한번쯤 힐긋 거리면서 생 라면을 스프에 찍어 먹어보고 싶어 하거나 그 추억에 냉정할 수만은 도저히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는 나팔바지에 허리선이 잘록하게 긴 코트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이름하여 미디와 멕시 코트라고 불려졌다. 미디는 무릎을 기준으로 위로 올라가는 길이였고 멕시는 그 아래로 더 내려와 발목부근까지 오는 길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엔 이런 코트에는 반드시 베레모와 같은 혹은 앙고라 털모자 등의 심플한 모자를 머리에 살짝 써주면 훨씬 멋이 나고 제격이다. 그리고 허리는 잘록해 보이도록 제 천으로 만든 것을 나비모양으로 묶어서 벨트를 매주는 것이 한결 날씬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이다. 더 멋을 부리는 사람들은 실크 스카프를 나풀나풀하게 함께 겻들이면 최고의 멋쟁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언뜻 생각에 신발 굽은 뒤축이 하이힐같이 뾰족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일본신발 게다 슬리퍼를 연상하게 하듯 뒤가 뭉뚝하면서 높은 신발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키가 작은 사람들은 요즈음에 잘나오는 지금의 키 높이 신발처럼 앞창에도 굽이 보태져서 앞뒤 전체적으로 다 더하면 10센티고 15센티까지도 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연예인들은 다 그 정도의 신발을 신고 다니곤 했고 일반인들에게도 그것이 유행할 때였다.

하여간 나도 미디와 멕시코트를 입어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옆방에는 약사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 언니와 함께 혼인신고도 하지 아니하고 동거하는 신랑 아저씨가 우리 엄마에게 천을 가져다주면서 내 옷이나 해주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섬유와 관계되는 무역인가를 한다고 했었는데 짜투리 천이거나 혹은 약간의 흠집이 난 천이기는 하지만 제법 쓸모가 있어서 버리기에는 아까운 천들이었던 것 같다. 그 아저씨가 우리에게 이따금씩 그런 천들을 제법 가져다주려 했지만 성품이 깔끔하신 어머니께서는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하며 받으셨고, 그것을 다 신세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다지 반겨하시지는 않았다. 그래서 두어 번에 걸쳐서 얻어 가졌을 뿐 더 이상 가져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천을 양장점에 가지고 가서 맞추어 입어 그 옷으로 인해 우리 학교에서는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눈에도 띄었던 것이다. 결코 잘 살아서 옷을 맞추어 입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유년의 나는 주변의 사람들이 귀여워해 주는 덕분에 꽤나 호사스런 호강을 하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가지색의 보랏빛이 감도는 천으로 당시에 어른들이나 입을 법한 유행하는 옷을 맞추어 입었으니 별스럽기도 했다. 그러니 오가는 길목에서 나를 본 아이들은 나를 힐끗 다시 한 번 더 쳐다보게 되었으리라. 초등학생 가방을 들고 요란하게 유행하는 어른들 옷 모양을 쪽 빼입고 다녔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랜만에 약사언니 생각을 잠시 떠올려 봐야겠다.

언니는 너무나도 준수하고 수려하게 생긴 그야말로 미스코리아 깜이었다. 키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하면서도 어글어글 선하고 맑고 예쁘게 생긴 것이다. 쌍꺼풀이 진 눈의 눈매가 하도 고와서 나는 그 언니 눈에 빠질 만큼 반했고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코도 마치 서양 사람처럼 높고 크고 삐죽하였다. 그 언니는 뭐든지 다 컸다. 키도 손도 발도 얼굴도 하나도 작은 대가 없이 큼직큼직 눈, 코, 입 모두 반듯하게 잘 생긴 얼굴이었다. 미스코리아 중에 서재화(?)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잘 생겼다. 그렇다, 예쁘게 생겼다기보다는 잘 생긴 얼굴이었다. 이 언니가 당시에 이화여자대학교 약학과를 나온 사람이었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그 아저씨 그러니까 당시에 언니와 함께 살던 신랑을 만나 우리 집에서 동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그 언니에 비하면 그 아저씨는 마치 아편중독자처럼 생겨가지고 키도 작고 몸도 마르고 얼굴은 납작하니 하여가지고 복도 뭐도 하나도 없게 생긴 그런 볼품없고 못 생긴 얼굴이었다. 내 기억에 아마 눈은 그나마 작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그 아저씨를 무서워하였다. 신경이 예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언니가 너무나도 월등히 잘 생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저씨가 너무 빈약하고 못나보였을지도 모르기는 하겠다.

아저씨가 퇴근해올 저녁이면 마치 신문사 기자처럼 바바리를 입고 인생의 온갖 시름과 고뇌를 잔뜩 짊어진 노신사처럼 해가지고 들어오는 폼이 어린 나의 눈에도 그리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가끔 가다가 보면 아저씨는 우리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도움을 청하면서 하소연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어머니가 보시기에 언니가 너무나 딱하고 안됐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잘 몰랐지만 그렇게 좋은 학벌에 그 인물에 그 만한 가정의 딸이 어찌하여 저런 남자와 만나서 사는 지를 걱정하시는 눈치였고, 쌍방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신의 공정한 판단에 감정이나 뇌물이라도 안겨져서 마치 제대로 심사하고 평가할 수 없는 듯 곤란해 하며 약간 멀찍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저씨가 언니가 원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돌려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그 언니 친정어머니께서 우리 집에도 찾아 오셨는데 그리 수더분한 인상은 아니셨고, 오히려 대단하고 야무지며 대가 차신 분으로 여겨졌지만 딸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 같았으며 가끔 오실 때마다 우리 엄마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어머니는 이편도 저편도 못 들고 다만 그 언니의 피기도 전에 사그러드는 것 같은 인생에 대해 염려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런 가하니 언니 역시도 매번 아저씨와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아하면서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언니가 우리 엄마를 붙들고 무언가 그리 하소연을 하면서도 왜 그 생활을 바꾸지 못하는 것인지 무척 의문스러웠다. 그때의 내 생각에 언니는 다리도 멀쩡하고 얼마든지 아저씨가 안 볼 때 도망이라도 치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당사자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저씨의 호의를 부담스러워 하자 아저씨가 우리 집에 선물하려던 천을 다 찢어버렸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아저씨가 난폭해서라기보다 자신의 호의마저 현실에 가리고 부대껴져서 제대로 먹혀들지 않음이 아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무렵 그 언니가 아저씨와 무슨 일로 다투게 되면 그 언니를 함부로 때리거나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분에 못이셔서 그러는 것인지 그 언니의 옷을 발기발기 다 찢어버리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그 언니는 아저씨에게 측은지심과 불안함의 공포를 함께 느끼는 것 같았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어디로라도 가려고 마음먹었다가도 그 아저씨가 어떻게 패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마음과 어디까지라도 따라 붙고 말거라는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대강 이래저래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른들은 간혹 미인이 박명하다는 말을 했다. 책에도 자주 나왔다. 나는 언니처럼 예쁘고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박복하기는 싫다는 것을, 싫은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것이라는 일종의 작은 공포를 약사언니의 방을 드나드는 동안에 조금은 전해 듣고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하게 생긴 언니가 얼굴이 너무나 잘나게 태어난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 그렇게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고, 모두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건가하고 안타까운 마음과 의아한 마음의 호기심에 자주 관찰을 하며 언니의 방을 드나들고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과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언니가 그 방을 썼기 때문이다. 나중에 큰 오빠가 장가를 들게 되어 우리는 그 방 모두를 우리가 쓰느라고 그 언니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었다. 그러니 얼마나 시시콜콜한 모습까지 다 알 수 있었겠는가. 마치 친언니 같기도 했다.

그 언니는 이사를 간 뒤에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고는 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우리 동네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근처 어딘가에 새 집으로 이사를 하여 그 아저씨와 계속 살고 있다고 하고 아이는 그때까지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드나들 정도의 짧은 거리는 아니어서 나는 언니를 그리워하면서도 그 이후로는 왕래하지 못했다. 그 아저씨와 언니는 당시에 나이차가 제법 있었다. 언니는 키가 크고 체격이 커서 어른스럽고 그 의젓함 때문에 도리어 약간 걸망해 보여 그렇지 실제로는 대학생졸업전후의 나이였으니까 몇 살 안 먹었겠지만 그 아저씨는 내 기억으로는 거즌 40대로 보였다. 그 아저씨도 실제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나름 인생의 고달픔에 찌들어 그랬는지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기는 했다. 솔직히 나는 사람이 빈티가 나면 실제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고 품위도 더 없게 보인 다는 것을 그때 그 아저씨를 보면서 생각해 둔 것 같다.

어쨌거나 그 나이에 이르도록 아무런 기반도 없이 당시에도 단 칸 방에 세 들어 살면서 그 재원인 언니를 옴짝 달싹도 못하게 마치 편집증적인 사람처럼 물고 늘어져 살아가고 있었으니 그게 사랑인 것인지 너무 어려서 생각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좋은 학벌을 써먹어 보지도 못하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살아가는 언니를 보면서 주위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고는 하였다. 모두들 언니를 애달아하는 모습이었다. 당장에라도 박차고 나가기만 하면 무얼 해도 당시의 현실보다는 낫다는 언니의 친정어머니의 서슬이 시퍼런 하소연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은 아닌 것이기에 말이다.

하여간 우리 집에 그 언니가 살림을 차리고 사는 동안 나에게는 수지가 맞았던 것이다. 천과 빛깔도 고운 좋은 옷을 언니 덕에 당시에 가장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맞추어 입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점퍼스커트와 맥시코트 같은 것으로. 언니는 곧잘 말만하라며 얼마든지 예쁜 천을 다 내줄 듯도 하였지만 나는 엄마의 눈초리가 무서워서 내 의사표현을 솔직히 하지는 못하였다. 언제나 그 언니 방에 가면 천 조각의 샘플들이 널려 있고는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신기한 놀이감 이었다. 아저씨가 언니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이 그 환하고 화려한 천 조각들이었는지, 그 천의 보드랍고 포근함처럼 언니를 위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언니는 그 천 조각들의 매끄럽고 고운 촉감을 나처럼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다. 갑자기 언니의 길고 큰 손에 천들이 만져지던 장면들이 스쳐지나간다. 언니는 그 샘플 묶음과도 같은 천 조각들을 만지면서 자기의 꿈 색깔을 만져보고는 했을까?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아저씨가 출근하고 없는 방에 혼자 배를 깔고 길게 엎드려 누워 천 조각 옆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언니의 생각과 삶과 꿈들도 그 천 조각의 여러 장의 빛깔들처럼 밝기도 어둡기도 그저 그렇기도 하였던 것일까?

어린 시절 내 기억의 한 모퉁이 무늬도 언니방의 천 조각들처럼 자유롭게 널브러져 펼쳐지고는 한다. 어떤 날은 밝고 어떤 날은 쓸쓸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담담하고 무심하게 스치기도 한다. 진열장에서 어린 시절의 옷 무늬와 유사한 모양과 빛깔을 보며 반가운 마음과 유년의 호기심이 감돌듯 오늘은 글을 쓰다 보니 언니가 더욱 그립기도 하다. 잘 살고 계실까? 당연 그러하겠지. 한때의 힘든 시절이었을 테지. 지금쯤 아저씨가 더 젊어지고 멋있어 졌을 수도 있겠네. 이제는 혼인 신고도 하고 당당하고 떳떳이 살아가고 있겠지? 아니 벌써 이미 오래전 그렇게 되었겠지. 세월이 벌써 40년이 다 가까워 오려고 하는 걸. 그 언니는 기억도 못하는 것을 내가 이렇게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언니와 나 우리의 전세가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언니는 그때의 나처럼 평화로운 장년을 향해 즐겁게 나이 들어가고 있을지 모르겠다.

양품점의 발랄한 점원 언니가 하는 말이 더욱 오늘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잘 맞네. 작은 것 아니야. 어디 이것도 좀 같이 입어봐. 아휴, 언니 왜 그래. 멋 좀 내고 살아요. 꾸며줘야 돼, 여자는. 화장은 안 했어도 피부는 그 정도면 괜찮아. 그런데 언니, 그게 뭐야. 왜 세상을 다 살은 사람처럼 그래요? 저 언니 좀 봐요. 저 언니는 나이가 많은 데도 저렇게 이쁘게 꾸미고 사니까 좋잖아. 어때? 젊어 보이지. 예쁘지? 언니도 그래. 그런데 언니 지금이 3월인데 그 옷이 뭐야? 지금이 한 겨울인줄 알아? 오늘 일기예보에도 없는 미친 눈이 내려서 그렇지 지금 봄이야. 3월 달이라고. 조금 있으면 반팔 나와요. 세일 찾지 말아요. 우리 꺼 다 신상품이야. 여기 이월 매장 아니야. 아휴, 내가 못 살아. 저렇게 잘 어울리면서 말이야. 바지는 손 볼 것도 없네. 다른 사람들은 길어서 주체도 못해. 언니나 하니까 받쳐주는 거지. 봐봐. 사람은 일단 키가 크고 봐야 돼. 이 언니, 이 옷 하나 입으니까 가다가 있어서 금세 사네. 언니, 그렇게 살지 마세요. 왜 그래? 이렇게 살아줘. 이것도 한 번 걸쳐 봐봐. 어머나, 괜찮지? 아, 벨트도 하나 매주세요. 아휴, 눈은 있어가지고 잘도 고르면서. 이 신발도 같이 해. 이 정도는 오히려 싼 거야. 단일 브랜드가 훨씬 비싸게 나와.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마. 이 언니 좀 봐. 인생을 다 산 것처럼 그래요. 할부 길게 끊어. 몇 개월로 할까? 응?』

인생을 다 산 것처럼 군다는 말이 귓전을 맴돈다. 내가 그랬나? 의아해 하면서. 그랬구나. 나보다 남이 나를 더 잘 알 수도 있지.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긴장감 없이.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 얹혀 놓고 열이 식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잊을 만하면 또 상처와 슬픔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좋으면 좋아서 죄책감 갖고서 양심적인 사람인양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서러우면 그것이 당연함 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울분을 터트리는 것을 오래 반복해 왔던 것은 아닌가. 그런 면도 있었겠다. 왜 아니 없었을까. 뜬금없이 날리는 삼월의 펑펑 쏟아지는 눈발이 내려도 3월은 삼월, 봄은 봄이다. 숫자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눈은 그칠 것이라는 것을, 그래야 됨을 모두가 아는 것이다. 우리가 여름을 준비하고 있어서라거나 한철 별렀다가 뛰려는 메뚜기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다보니 그것이 순리고 자연이더라는 것을 깨우쳐 알게 됨이다. 그래, 아무리 미친 눈발이 날려도 아무리 추위가 달려들어도 삼월은 삼월, 봄은 봄으로 온다.

다시 양품점 언니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봄에는 봄처럼 입어줘야 해. 추우면 안에 차라리 내복을 입어. 그리고 위에 겉옷은 가볍게 입어주는 거야. 그게 뭐야, 한겨울이야? 다들 그렇게 입는 거야. 그래야 맵시가 나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양품점 언니의 말이 재미나서 입가의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 내 인생도 봄을 기다리는데 나는 나를 붙들고 늘어져서는 꽁꽁 무거운 옷으로 눌러 덮고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야~~~~~ 하고 힘껏 소리쳐본다.「내 인생의 무겁고 시린 겨울아, 물러가라. 내 인생의 화사한 봄날아, 마구 무찔러 쳐들어오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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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 [칼럼45]생생한 여론 수렴기 素田 최영훈 2008.02.26 2438
560 [52] 뇌신과 머리수건 [1] 써니 2008.02.25 2922
559 [51] 그게 참, 문제다 문제 써니 2008.02.25 2402
558 [50] 우리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에 부침 써니 2008.02.25 3096
557 (41) 고양이게 먼저 고백하다 [8] 香仁 이은남 2008.02.24 2638
556 (40) 이제는 말할 수 있다. [7] 香仁 이은남 2008.02.24 2584
555 성실함에 대하여 [6] 구본형 2008.02.24 3596
554 [49] ‘호적등본’과 ‘가족관계증명서’의 차이 [3] 써니 2008.02.20 11956
553 [칼럼44]세종대왕, 광화문에서 만나다 소전최영훈 2008.02.17 27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