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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2일 00시 56분 등록
옥이는 나의 외사촌 여자아이 이름이다. 막내삼촌의 6남매 가운데 둘째로 딸 중에서는 큰 여식인 것이다. 엄마는 늘 막내삼촌을 애달아 하셨다. 너무나 잘생기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지만 막내라고 시골에서 농사나 짓게 하였으며, 그다지 많이 배우지 않았고 불같은 성정이 있기는 해도 칼칼하고 씩씩하여 인정스러운 대가 있는 진정한 사내다운 남자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옥이는 내 또래로서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일찍이 가정형편과 농촌 살림의 생활고라는 환경에 처하여서 중학교 정도만 마치고 남의집살이를 시작하였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시골의 추풍령이라는 마을에 고속도로 휴게소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그 휴게소를 운영하는 집에 더부살이를 간 것이었다. 그녀는 그 댁에 들어가서 온갖 집안일을 다하며 아이를 맡아서 키우는 억척 소녀로서 튼튼하고 씩씩한 처자로 성장하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막내외삼촌은 키가 6척이나 되고 튼튼하며 균형 잡힌 몸매에 힘도 세서 한때에는 소라도 때려잡을 만한 장사였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막내 삼촌의 젊은 모습은 상거풀이 진 눈 이었는데 그 눈매에서 시원한 빛이 나면서 맑고 고운 선량한 얼굴 모습이었다. 엄마는 막내 삼촌이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아주 뛰어났으나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리고 큰 외삼촌의 병마로 외가의 가세가 급작스레 기울게 되어, 가족 가운데 혜택을 입지 못하고 형들에게 치우쳐서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늘 안쓰러워하시곤 하였다.

70년대 농촌 살림이란 것이 빠듯한데다가 본가인 외가가 차츰차츰 기울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아이라고 그 애를 학교에 보내기보다 위로 충청북도 장학생인 출중한 오빠와 아래로 남동생 둘 그리고 여동생 둘이 있는 상태라, 내 또래 정도밖에 안 되는 옥이를 희생시켰던 것이다.

옥이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성품을 닮아 그런지 아니면 대가족제도의 익숙한 농촌 생활과 일상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나보다 훨씬 일찍 원만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도시에 사는 나처럼 외소하거나 쭈뼛거리며 서먹해하기보다 장난도 잘치고 씩씩했다. 어려서는 여자애가 어찌나 극성맞고 남성다운지 내가 언니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주눅이 들 정도였다. 모처럼만에 시골에 간다고 하얀 스타킹에 잔뜩 멋을 내고 시골에 가면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선머슴아 같은 옥이의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일테면 남자애들이나 짓궂게 해대는 아이스깨끼하며 치마를 들쳐 올린다거나 하는 일에서부터 내 뒤로 가서 내 머리핀을 홀라당 다 뽑아가지고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는 하면서 나를 아주 못살게 굴어가며 장난을 쳐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나를 꼬여서 들판으로 산으로 끌고나가 이것저것을 알려주거나 열매 따위를 따주기도 하고 겨울에는 비료 푸대로 썰매를 태워주는 등 놀이를 가르쳐주며 나와 어울리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던 그 애를 철도나기도 전에, 아니 일찍 철이든 그 아이를 남의 집에 보내어 집안 살림을 돕게 한 것이었다. 착하고 씩씩한 그녀는 온 동네에서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오빠와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의젓한 누이로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엄마는 늘 조카들이야기와 자기 막내 동생 이야기를 잘도 하시곤 하였었다. 더불어서 고생하는 외숙모에 대한 정도 각별하고 남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큰외삼촌이 아픈데다가 상처한 상태라서 외할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또한 외할머니는 막내아들이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낳아가지고 키우기 힘들어 하니 한동네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막내삼촌의 손자들을 돌보시며 그곳에서 사셨기 때문에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손아래 올케가 더없이 고마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집안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일찍 남의 집 더부살이를 보내는 것을 무척이나 대견해 하면서도 마음 깊이 안타까워하셨다. 엄마는 옥이가 너무 착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며 고마워하셨다. 그래도 철이 없었던 나는 그저 무심히 그런가보다 하고 지냈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이후에는 별로 시골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옥이도 주인집을 따라 서울의 대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그녀가 나를 불렀기 때문에 나는 그 댁에 몇 번 놀러 가고는 하였었다. 서울로 오게 되자 그녀는 오랜 더부살이에 신용을 얻어 틈틈이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그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한이 되는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가끔 나를 불러서 숙제를 도와 달라고 하기에 그녀를 위해 사양하지 않고 가서 도와주고는 했다. 씩씩한 그녀는 단박에 과정을 이수하고 학위를 걸머쥐었었다. 천성이 성실한데다가 무슨 일이건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외가의 칼칼한 성격을 빼닮아 그런지 얼렁뚱땅 수월하고 씩씩하게 잘도 하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 결혼해서 아이들 잘 키우고 잘 살아간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더니 그녀의 유년과 청년시절은 비록 고단했지만 착실한 신랑을 만나 중년부터는 개운하여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책을 읽다가 문득 옥이 그녀가 생각났다. 선머슴아 같은 장면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나머지 인생도 행복하게 잘 꾸려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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