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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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짖고 있는 아파트가 완공이 되면 나는 경주에 가서 살려고 마음먹었다. 사실 그것은 처음엔 그의 제안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 그것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했다. 자기가 날 위해서 생각해 주든가 아이들을 위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었으련만 그는 오직 제 입장에서만 일처리를 하고 살았다. 믿고 기다리면 보람이 있기는커녕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을 넓은 잔디에 내려놓고 키우는 상상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우리 집의 내 땅은 아니더라도 곳곳에 펼쳐진 너른 공간을 꿈꾸기에 울산의 집보다 훨씬 나았다. 울산에서 경주에 가는 것보다 경주에서 경주의 여러 곳을 가까운 거리로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뛰놀게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지 않은가 말이다. 경주로 가서 살 생각을 하니 불국사 밑의 잔디가 마치 우리 앞마당 같은 정겨움으로 다가왔고 아이들이 조금만 더 자라면 동국대의 사회교육원 등에 등록하여 재미나고 즐거운 무엇들을 배워가며 아이들과 함께 정서와 놀이에 유익한 문화생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늦게 받기는 했지만 월급 통장을 받은 그날부터 최소한의 경비만 쓰면서 나는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철저히 적금을 착실하게 붓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집을 이사할 수 있으리라는 계획도 단단히 세워두고 있던 참이었다. 울산은 공업지역인데다가 3교대가 주는 폐해도 안 좋게 소문이 나 있기도 했지만 경주는 양반의 도시이고 조용하고 깨끗하며 산세의 순함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보문단지 주변을 거닐 때면 곧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꿈도 꾸어볼 수 있었다. 가끔씩 방문을 할 때면 그 길의 조용하고 깨끗한 산책로가 그리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빡빡한 도시보다는 그 예스럽고 고상한 시골풍경과 조금이라도 자주 접할 수 있는 경험을 시켜주며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남쪽 지방 가운데에서는 경주를 단연 좋아하였다.
나의 이런 꿈도 전혀 아랑곳없이 그러마했던 그는 약간의 돈 차이로 자존심이 상한다며 가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나는 그냥 가자고 제안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곳에 약간의 땅을 마련해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에게도 꿈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니면 제법 괜찮은 곳이 눈에 띠어 그저 아이들 어린 동안에는 욕심 부리지 않고 주변 자연 환경을 이용한 보통의 전원주택 같은 곳에서도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너무 깊은 산속으로는 들어가기는 뭣했어도 나지막한 야산주변에 그리 비싸지 않은 헌집을 개조해서 적은 비용으로도 살거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집짓는 전문가라고 생색을 내고는 하니 내가 동의하고 지원만 할 수 있다면 대번에 일을 실행에 옮길 줄 알았지만 그는 늘 그러한 말 뿐 아무 것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없었다. 일테면 다시 와서 차근차근 도면을 뗘보고 서류를 점검한 후에 하겠다는 것인데 그러고는 말뿐인 것이다. 나는 무언가 이루는 성취감과 우리가 함께 의견을 나누고 같이 힘을 쏟는 어떤 합일을 이루어 보고 싶었지만 늘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워낙에 자랑이 심하고 내가 그런 의지를 보이는 것이 딴에는 대견스럽기도 했던지 적금을 탄 것을 시댁에 까발려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귀신 같이 돈을 요구받았던 것이었다. 이것을 이혼 직전에야 그가 돈을 빌리러 왔더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이가 있어서 알게 되었다. 갑자기 짜증을 부리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그 행동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시누이가 그 돈까지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머리 싸매고 싸우고 있는 동안 그녀는 이사 갈 계획을 세웠고 돈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는 나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기도 하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사실 돈이라고 해봐야 몇 푼 되지도 않았다. 다들 적금이란 것을 부어봐서 알겠지만 붓기는 힘들어도 막상 타보면 얼마 되지도 않지 않던가 말이다. 받은 재물 하나도 없이 백만 원 남짓한 월급밖에는 되지 않았고 아이 셋 줄줄이 낳아 기르면서 적금 부어가며 살았으면 착실히 잘 산 것이었다. 그뿐인가 지방 살면서 서울 왔다 갔다 하게 되면 그때나 지금이나 교통비로 다 나간다. 한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며 명절 쇠고 뭐하고 먹고 살려면 진짜로 모자라다고 해야 할 판이지만 내게도 결혼 전 약간의 비상금이 있었기에 일단 적금은 붓고 모자라는 것은 보충해 쓰는 식으로 철저히 전혀 낭비 없이 살았다. 그나마 그곳의 집값이 워낙에 싸서 그렇게나마 살 수 있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마도 청년시절의 나나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나는 원래 쫀쫀한 것을 싫어하지만 그때는 내 것은 양말 한 켤레도 안 사 신어가며 허리띠를 꽉 조여 매고 살았던 것이다. 왜 유별나게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생기고부터 온 신경이 아이들에게로 가면서 장차 이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키울까 하는 걱정이 무척이나 앞서는 터였다.
어디 하나 기댈 대가 있길 하나, 뭐가 있기를 하나 그러니 마음이 늘 바빴다. 아빠 나이는 이미 40이 넘었는데 아이들은 줄줄이 사탕으로 연년생을 낳아놓으니 저절로 걱정이 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는 회사를 믿지 못하겠다며 언젠가 사업을 해야 한다며 이런 저런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집안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 나도 늘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집안일이란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살아본 경험도 없어서 그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긴가민가하며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살게 될 뿐이지 않겠는가.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또 식구가 많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섯 명은 낳고 싶었다. 그도 아이들을 좋아했고 남자 형제가 없어서 외로웠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는 자기처럼 외롭지 않게 형제를 두어야 한다고 말해왔었다. 늘 그 혼자서 부모형제를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반이 잡히면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함께 살 생각을 하면서 각오를 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돈도 없으면서 죽어라고 같이 살기를 싫어하고 생활비가 없다고 매번 징징대니 그도 환장할 노릇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벌은 일체의 것을 떼어주고 더는 손을 벌리지 않기로 했지만 늘 가져가면 그때뿐으로 한도 끝도 없이 요구해 오는 것이었다.
우리와 같이 살기를 한사코 꺼리는 통에 어머니와 함께 있으니 누이 앞으로 떼어준 재산만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이 해주었다. 집도 생활비도 다 일체 해결되게 하고 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매번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지만 내 힘으로 관여해서 해결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아예 나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 그녀는 집도 상가도 콘도도 등등 가지고 있었지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욕심만 부렸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나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가족 모두가 밉다. 시어머니 되는 어른은 나를 속인 거나 진배없고 한도 끝도 없는 시누이의 욕심과 양심은 철면피라고 생각되며 그것을 묵인하며 나만을 억압했던 그의 태도에 대해서도 나는 정말로 분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남의 돈을 공짜로 1원 한 푼도 탐내본 적이 없다. 나는 남의 공을 그토록 몰라주지는 않는다. 아무렇게나 남의 수고를 가로채지 않는다. 역지사지가 생각이 안 되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늘 지방간으로 피곤하다고 하면서 술을 먹어대는 그를 위해 좋다는 것은 다 해먹이면서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이 셋 키우는 것보다 어른아이인 그를 건사하기가 더 힘들었다.
한순간도 함부로 살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자 무진 애를 쓰면서 살았다. 나는 더 이상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로 헌신하며 희생의 보람도 없이 그렇게 천덕꾸러기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성실하고 탄탄하게 내 인생을 꾸려갈 수 있었다. 누이만 살림을 잘하거나 잘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실상은 진짜 갖다 버린 것인지 떼먹은 것인지 그녀는 없애는 돈이 더 많았다. 아무리 살림 경험이 부족했어도 그리고 자기들 눈에는 미숙하게 보였을 지라도 나에게도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나도 그리 막되지 않았고 깜냥 것 나름대로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집안에 사는 동안 내가 잘못한 것에 비해 나의 수모가 너무나 컸고 내가 생각하는 마음에 비해 너무나 왜곡되게 평가받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고 고달팠다.
한번은 남편이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되어 전셋집을 빼려고 보니 회사에서 계장이 먼저 달려와 전세금 일부를 회수해 가더라. 그렇게 그 나이가 되도록 제 욕심만 차리고 살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가족이라는 위인들이 아들 하나를 그토록 희생의 재물로만 삼는 것인가. 누이들이 못살면 말도 안한다. 죄다 시부모 한분 모시지 않고 자기들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요즘 세상에 아닌 말로 누가 자기 같은 시누이를 그렇게까지 봉양하며 사는 집이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마치 그녀 혼자만이 결혼 전에 아들대신 희생봉사하며 살은 양 아무리 떠벌려도 돈 한 푼 벌지 않았고, 어디 가서 진득하게 일 한 번 제대로 하고 산 사람이 아니다. 살림을 살았다고 쳐도 자기 운명 자기 팔자를 산 것이니 안 됐고 가엾게 봐주고 도와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그만하면 충분한 보상을 할 수 있는 한 다 해준 것이었다. 그 인간이 나한테는 더 없이 모질고 야속한 위인이었지만 어머니나 누이에게는 한량없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지금 그렇게 사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누이 살리겠다고 저는 못산 것이니 어쩌겠는가.
언제까지 어머니를 앞세워 제 욕심만 차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인가. 전혀 무언가 생산적인 노동력이나 부가가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해볼 꿈도 꾸지 않으면서 이자 돈이나 받아가며 거저먹고 살려고 하다가 허구한 날 떼었다고 하면서 시침 뚝 때고 번번이 요구하고 그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사람이라면 염체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어쩌면 그리도 당당한 것인가. 동생이 개인회사의 오너도 아니고 월급쟁이 직원에 불과한데 도둑질을 하나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 때 7~80년대에는 경기가 좋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결혼 전까지 월급통장이며 뭐며 다 자기가 쥐고 살았기 때문에 늘 그 버릇이 남아있다고 해도 시대가 바뀌고 변화가 왔으면 그만 하고 제 앞가림을 하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니겠나. 금융실명제다 뭐다 이후로 기업에서도 투명해 지기 때문에 함부로 뭐가 생기고 그러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다고 그는 나에게는 하소연 했지만 어머니나 누이는 곧이듣지 아니하니 틈만 나면 월급통장 통째로 맡기고 살자고 요구해 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마치 어디서 금덩이라도 쏟아져 내리는 줄 착각하고 저희만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는 잣대 자체가 얼마나 사람을 잡는 노릇인가를 철저히 어머니와 누이는 알았어야 했고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반드시 깨달아 알고 가야 한다.
그저 나에게 맞추어 달라는 요구 한 번도 당당히 못해보고 도리어 욕심 많은 죄인인양 늘 주눅이 들어 살면서 내 아이들과 살아보고 싶었던 고장 경주에서 나는 환경에 부대껴 살아보지 못했었다. 서로가 싸우고 원망하면서. 아마도 그리로 옮겨 살았더라면 아이들과 함께 내가 이토록 가슴 아프지 않고 좀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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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을 넓은 잔디에 내려놓고 키우는 상상을 하며 지내기도 했다. 우리 집의 내 땅은 아니더라도 곳곳에 펼쳐진 너른 공간을 꿈꾸기에 울산의 집보다 훨씬 나았다. 울산에서 경주에 가는 것보다 경주에서 경주의 여러 곳을 가까운 거리로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뛰놀게 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지 않은가 말이다. 경주로 가서 살 생각을 하니 불국사 밑의 잔디가 마치 우리 앞마당 같은 정겨움으로 다가왔고 아이들이 조금만 더 자라면 동국대의 사회교육원 등에 등록하여 재미나고 즐거운 무엇들을 배워가며 아이들과 함께 정서와 놀이에 유익한 문화생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늦게 받기는 했지만 월급 통장을 받은 그날부터 최소한의 경비만 쓰면서 나는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철저히 적금을 착실하게 붓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집을 이사할 수 있으리라는 계획도 단단히 세워두고 있던 참이었다. 울산은 공업지역인데다가 3교대가 주는 폐해도 안 좋게 소문이 나 있기도 했지만 경주는 양반의 도시이고 조용하고 깨끗하며 산세의 순함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보문단지 주변을 거닐 때면 곧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꿈도 꾸어볼 수 있었다. 가끔씩 방문을 할 때면 그 길의 조용하고 깨끗한 산책로가 그리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빡빡한 도시보다는 그 예스럽고 고상한 시골풍경과 조금이라도 자주 접할 수 있는 경험을 시켜주며 그런 환경에서 자라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남쪽 지방 가운데에서는 경주를 단연 좋아하였다.
나의 이런 꿈도 전혀 아랑곳없이 그러마했던 그는 약간의 돈 차이로 자존심이 상한다며 가지 않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나는 그냥 가자고 제안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곳에 약간의 땅을 마련해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나에게도 꿈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니면 제법 괜찮은 곳이 눈에 띠어 그저 아이들 어린 동안에는 욕심 부리지 않고 주변 자연 환경을 이용한 보통의 전원주택 같은 곳에서도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만 해도 너무 깊은 산속으로는 들어가기는 뭣했어도 나지막한 야산주변에 그리 비싸지 않은 헌집을 개조해서 적은 비용으로도 살거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집짓는 전문가라고 생색을 내고는 하니 내가 동의하고 지원만 할 수 있다면 대번에 일을 실행에 옮길 줄 알았지만 그는 늘 그러한 말 뿐 아무 것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없었다. 일테면 다시 와서 차근차근 도면을 뗘보고 서류를 점검한 후에 하겠다는 것인데 그러고는 말뿐인 것이다. 나는 무언가 이루는 성취감과 우리가 함께 의견을 나누고 같이 힘을 쏟는 어떤 합일을 이루어 보고 싶었지만 늘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워낙에 자랑이 심하고 내가 그런 의지를 보이는 것이 딴에는 대견스럽기도 했던지 적금을 탄 것을 시댁에 까발려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귀신 같이 돈을 요구받았던 것이었다. 이것을 이혼 직전에야 그가 돈을 빌리러 왔더라고 이야기를 해주는 이가 있어서 알게 되었다. 갑자기 짜증을 부리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그 행동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시누이가 그 돈까지 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머리 싸매고 싸우고 있는 동안 그녀는 이사 갈 계획을 세웠고 돈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는 나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기도 하며 한숨을 쉬기도 하고 그랬던 것이다.
사실 돈이라고 해봐야 몇 푼 되지도 않았다. 다들 적금이란 것을 부어봐서 알겠지만 붓기는 힘들어도 막상 타보면 얼마 되지도 않지 않던가 말이다. 받은 재물 하나도 없이 백만 원 남짓한 월급밖에는 되지 않았고 아이 셋 줄줄이 낳아 기르면서 적금 부어가며 살았으면 착실히 잘 산 것이었다. 그뿐인가 지방 살면서 서울 왔다 갔다 하게 되면 그때나 지금이나 교통비로 다 나간다. 한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며 명절 쇠고 뭐하고 먹고 살려면 진짜로 모자라다고 해야 할 판이지만 내게도 결혼 전 약간의 비상금이 있었기에 일단 적금은 붓고 모자라는 것은 보충해 쓰는 식으로 철저히 전혀 낭비 없이 살았다. 그나마 그곳의 집값이 워낙에 싸서 그렇게나마 살 수 있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마도 청년시절의 나나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나는 원래 쫀쫀한 것을 싫어하지만 그때는 내 것은 양말 한 켤레도 안 사 신어가며 허리띠를 꽉 조여 매고 살았던 것이다. 왜 유별나게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생기고부터 온 신경이 아이들에게로 가면서 장차 이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키울까 하는 걱정이 무척이나 앞서는 터였다.
어디 하나 기댈 대가 있길 하나, 뭐가 있기를 하나 그러니 마음이 늘 바빴다. 아빠 나이는 이미 40이 넘었는데 아이들은 줄줄이 사탕으로 연년생을 낳아놓으니 저절로 걱정이 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는 회사를 믿지 못하겠다며 언젠가 사업을 해야 한다며 이런 저런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집안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 나도 늘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집안일이란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살아본 경험도 없어서 그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긴가민가하며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살게 될 뿐이지 않겠는가.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또 식구가 많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다섯 명은 낳고 싶었다. 그도 아이들을 좋아했고 남자 형제가 없어서 외로웠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그는 자기처럼 외롭지 않게 형제를 두어야 한다고 말해왔었다. 늘 그 혼자서 부모형제를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반이 잡히면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함께 살 생각을 하면서 각오를 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돈도 없으면서 죽어라고 같이 살기를 싫어하고 생활비가 없다고 매번 징징대니 그도 환장할 노릇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벌은 일체의 것을 떼어주고 더는 손을 벌리지 않기로 했지만 늘 가져가면 그때뿐으로 한도 끝도 없이 요구해 오는 것이었다.
우리와 같이 살기를 한사코 꺼리는 통에 어머니와 함께 있으니 누이 앞으로 떼어준 재산만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이 해주었다. 집도 생활비도 다 일체 해결되게 하고 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매번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방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지만 내 힘으로 관여해서 해결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아예 나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에 그녀는 집도 상가도 콘도도 등등 가지고 있었지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욕심만 부렸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나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가족 모두가 밉다. 시어머니 되는 어른은 나를 속인 거나 진배없고 한도 끝도 없는 시누이의 욕심과 양심은 철면피라고 생각되며 그것을 묵인하며 나만을 억압했던 그의 태도에 대해서도 나는 정말로 분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남의 돈을 공짜로 1원 한 푼도 탐내본 적이 없다. 나는 남의 공을 그토록 몰라주지는 않는다. 아무렇게나 남의 수고를 가로채지 않는다. 역지사지가 생각이 안 되나.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나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늘 지방간으로 피곤하다고 하면서 술을 먹어대는 그를 위해 좋다는 것은 다 해먹이면서 살아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이 셋 키우는 것보다 어른아이인 그를 건사하기가 더 힘들었다.
한순간도 함부로 살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자 무진 애를 쓰면서 살았다. 나는 더 이상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로 헌신하며 희생의 보람도 없이 그렇게 천덕꾸러기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성실하고 탄탄하게 내 인생을 꾸려갈 수 있었다. 누이만 살림을 잘하거나 잘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실상은 진짜 갖다 버린 것인지 떼먹은 것인지 그녀는 없애는 돈이 더 많았다. 아무리 살림 경험이 부족했어도 그리고 자기들 눈에는 미숙하게 보였을 지라도 나에게도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나도 그리 막되지 않았고 깜냥 것 나름대로 건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집안에 사는 동안 내가 잘못한 것에 비해 나의 수모가 너무나 컸고 내가 생각하는 마음에 비해 너무나 왜곡되게 평가받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고 고달팠다.
한번은 남편이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되어 전셋집을 빼려고 보니 회사에서 계장이 먼저 달려와 전세금 일부를 회수해 가더라. 그렇게 그 나이가 되도록 제 욕심만 차리고 살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가족이라는 위인들이 아들 하나를 그토록 희생의 재물로만 삼는 것인가. 누이들이 못살면 말도 안한다. 죄다 시부모 한분 모시지 않고 자기들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요즘 세상에 아닌 말로 누가 자기 같은 시누이를 그렇게까지 봉양하며 사는 집이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마치 그녀 혼자만이 결혼 전에 아들대신 희생봉사하며 살은 양 아무리 떠벌려도 돈 한 푼 벌지 않았고, 어디 가서 진득하게 일 한 번 제대로 하고 산 사람이 아니다. 살림을 살았다고 쳐도 자기 운명 자기 팔자를 산 것이니 안 됐고 가엾게 봐주고 도와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그만하면 충분한 보상을 할 수 있는 한 다 해준 것이었다. 그 인간이 나한테는 더 없이 모질고 야속한 위인이었지만 어머니나 누이에게는 한량없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지금 그렇게 사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누이 살리겠다고 저는 못산 것이니 어쩌겠는가.
언제까지 어머니를 앞세워 제 욕심만 차리면서 살 수 있는 것인가. 전혀 무언가 생산적인 노동력이나 부가가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해볼 꿈도 꾸지 않으면서 이자 돈이나 받아가며 거저먹고 살려고 하다가 허구한 날 떼었다고 하면서 시침 뚝 때고 번번이 요구하고 그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사람이라면 염체가 있는 것이 아니겠나. 어쩌면 그리도 당당한 것인가. 동생이 개인회사의 오너도 아니고 월급쟁이 직원에 불과한데 도둑질을 하나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 때 7~80년대에는 경기가 좋았다는 말을 듣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결혼 전까지 월급통장이며 뭐며 다 자기가 쥐고 살았기 때문에 늘 그 버릇이 남아있다고 해도 시대가 바뀌고 변화가 왔으면 그만 하고 제 앞가림을 하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니겠나. 금융실명제다 뭐다 이후로 기업에서도 투명해 지기 때문에 함부로 뭐가 생기고 그러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다고 그는 나에게는 하소연 했지만 어머니나 누이는 곧이듣지 아니하니 틈만 나면 월급통장 통째로 맡기고 살자고 요구해 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마치 어디서 금덩이라도 쏟아져 내리는 줄 착각하고 저희만 잘 먹고 잘 산다고 하는 잣대 자체가 얼마나 사람을 잡는 노릇인가를 철저히 어머니와 누이는 알았어야 했고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반드시 깨달아 알고 가야 한다.
그저 나에게 맞추어 달라는 요구 한 번도 당당히 못해보고 도리어 욕심 많은 죄인인양 늘 주눅이 들어 살면서 내 아이들과 살아보고 싶었던 고장 경주에서 나는 환경에 부대껴 살아보지 못했었다. 서로가 싸우고 원망하면서. 아마도 그리로 옮겨 살았더라면 아이들과 함께 내가 이토록 가슴 아프지 않고 좀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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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비 온 뒤의 정원 같으신 언니...
언니 뵈면 새모시 옥색치마 정갈하게 차려입고 소담한 우리 상차림 매운 손맛에서 우러나오는 사찰하고 담백함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좋으면서도 많이 부끄럽지요.
2008 상반기 꿈 벗 정기 모임에 언니도 초대하고 싶어요. 곧 공지하게 되면 꼭 시간 맞추어서 저희와 함께 참석해 주세요.
많은 젊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실 거에요. 자연스런 어울림일 거구요. 벗 하실 수 있는 엉아들도 빠뜨리지 않고 점찍어 두겠습니다. 우리 삶이 더욱 싱싱하고 풍성할 수 있도록 지혜와 조언을 얻어 갇고 싶으니까요. 늘 두루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언니 뵈면 새모시 옥색치마 정갈하게 차려입고 소담한 우리 상차림 매운 손맛에서 우러나오는 사찰하고 담백함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좋으면서도 많이 부끄럽지요.
2008 상반기 꿈 벗 정기 모임에 언니도 초대하고 싶어요. 곧 공지하게 되면 꼭 시간 맞추어서 저희와 함께 참석해 주세요.
많은 젊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실 거에요. 자연스런 어울림일 거구요. 벗 하실 수 있는 엉아들도 빠뜨리지 않고 점찍어 두겠습니다. 우리 삶이 더욱 싱싱하고 풍성할 수 있도록 지혜와 조언을 얻어 갇고 싶으니까요. 늘 두루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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