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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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방값을 치르며 무려 2주간에 걸쳐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 머물렀다. 전혀 안 먹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곳에서 별로 식사 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간간히 밖으로 나가 하루 종일 한 끼를 때우고 말듯 그렇게 지냈다. 하루 종일 같이 붙어서 싸우다 말다 지치다 들볶다 그렇게 있게 되었다. 그는 이미 몇 개월 전부터 마음이 떠버린 사람처럼 이혼을 준비하면서 갈팡질팡 하고 있었고, 그렇게 싸우다 멈추다 오가는 말 중에 그동안 여니 여자들에게는 그토록 신경을 써서 해주면서 정작 나에게는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지 않느냐는 내 말에 그도 충격과 함께 양심의 가책 따위를 조금은 느꼈던 것인지 모른다. 가정에서는 노래방 한 번을 함께 안 가던 철저히 이중적인 생활 패턴을 고수하던 그가 얼마 전에는 집에 한 번씩 들어올 때마다 노래방에도 같이 가고 외식도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고 선심을 쓰듯 하기도 했다. 그럴 때 대게의 여자들은 마음을 잡나보다 하지만 마치 일과 중 재미없는 연례행사를 치르기라도 하듯 진정하게 우러나는 마음은 아니었던가 보다. 그러니까 그 자신도 무슨 심리 인지 모르게 베풀었다가 화를 냈다가 하여튼 일정치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나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우리는 계획도 없이 숙박을 하고 있다가 본격적인 이혼을 생각하며 도장을 찍는 실행에 옮기는 것에 마지막으로 14박 15일의 시간을 받쳤고 그 시간이 걸려서야 서로의 인연에 대해 합법적인 종결을 짓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 날 이렇게 오래 머물 것이었으면 여행이라도 할 것을 하고 말했다. 바로 내 말이 그 말이다. 그 모든 전권을 휘둘러 놓고는 언제나처럼 한다는 말이 꼭 내 탓인 양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그렇게 써버리는 돈에 대해 무척 아까워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넉넉하지 않아 그런지 그렇게 보내는 시간과 돈에 대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결코 그렇게 살려고 그리 애쓰며 버는 돈이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벌었다고 자기가 그렇게 쓰겠다니 할 말이 없어 싸울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말끝마다 이혼할 건데 왜 신경 쓰냐고 속을 박박 긁어놓으니 말을 하면 싸움만 될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오기를 부리며 삼수갑산을 가버리고야 마는 행태들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뾰족하게 다른 별수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이다. 자기가 번다고 다 자기 돈인가. 곁에서 약속을 지키며 희생한 대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배가 부르다고 남의 굶주림과 참음을 몰라줘서야 어찌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랴. 하지만 그의 행동은 막무가내로 치닫고 있었다. 자포자기 심사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기어이 상대를 올라타고야 말겠다는 심사처럼 쓸데없이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거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지속하며 이판사판의 이상심리로 치닫고 마는 것이다.
그만한 돈이면 실컷 추억이라도 제대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아담한 호텔을 평소에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와 헤어진 후 한 번도 그 호텔이 의미 있게 생각나지는 않았다. 기억에 좋았던 장소가 더 이상 보기 싫은 장소가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덤덤해 졌다. 다만 그곳에서 가족법적 우리 인연의 최후의 14박 15일을 함께 묵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도 짬을 낼 수 있는지 어쩐지 도통 내가 알 수가 없고 계획을 짠다손 치더라도 무조건 그에게 맞추어야만 가능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여튼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이별여행을 그곳에서 처박혀 지내며 실컷 싸우고 지지고 볶아가며 이혼인지 사랑인지를 실컷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보다 팔자가 좋은 사람들 가운데 그때에도 한가하게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이들이 더러 있기는 하였다. 그래봐야 1박 2일에서 2박 3일 정도 머물면 뭐가 할 게 있나. 그것도 기분이 좋아야 수영장이고 사우나며 부대시설을 이용하고 놀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엔가는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가 명동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해 보기도 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함께 가주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가자고 했을 것이었다. 그도 멀쩡한 정신 상태일 때에는 성당을 싫어하지 않았다. 수녀님 모시기를 외할머니 만난 기쁨만큼 반겨 할 때도 있었다. 내 보기에 스님 만날 때보다 수녀님들과 담소를 나눌 때 훨씬 더 편안해 하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성당 뒤편의 성모상 한쪽 의자에 앉아 무심한 방관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와 함께 잠시 있다가 휴일 저녁미사를 시작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 그곳에서 이상하게도 우연한 인연을 만났다. 우리가 잘 아는 곳에 계시는 수녀님들께서 그곳에서 행사를 주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순간 이게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는 듯 잠시 머뭇거리며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결혼 전 나는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함을 들이러 온 날 사고가 났었는데 그가 술에 취해 나를 아무도 모르게 심하게 때린 바람에 상처가 크고 깊어 입원을 하여 치료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마침내 결혼식은 취소되고 말았었다. 혼사를 앞두고 간간히 편치 않은 마음과 불안정한 기운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나는 기어이 일을 치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좌우당간 그 일로 나는 요양을 필요로 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실 나는 마음이 심히 부대껴서 어디 조용히 피정할 만한 곳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이미 청첩장도 다 발송되고 식만 치르지 못한 상황에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한데다가 내 사고가 너무 커서 심적으로 충격도 심하였고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도 않아 잠시라도 멀리 훌쩍 떠나 있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선 수습이 급했던 그가 그때 제안 했던 것이 자기네 집 근처의 특수학교에 원장수녀님이 계신 곳에 가 있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딴엔 가까이 두고 보살펴야 마음이 한갓지겠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 염체 없이 그리 할 수가 없겠다 싶어 따라갔다가 그냥 인사만 드리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그곳에 정식으로 인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니 그곳과는 마음으로는 각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인사만 다닐 뿐 결혼이후에는 나에게 성당에 관한한 일체의 무엇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치레 같은 친분관계에 지나지 않았으며 영적으로나 정신적인 교감은 전혀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게 스테파노라는 본명까지 이미 지어놓으시며 그 원장 수녀님께서는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 집안의 불교적 분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를 갖추어 다녀가시기도 하였었건만 허사였다.
그런데 그날 바로 그 명동 성당에 그곳의 수녀님들이 나와서 장애우들을 돕고자 하는 봉헌미사를 주관하여 드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척이나 반가와 하며 쫓아가서 설령 모르는 수녀님이라고 하여도 인사를 나누었을 테지만, 우리는 그저 예상치 못한 일에 움쩍 놀라워할 뿐 서로 마음으로만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며 끝내 모르는 척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다. 이혼을 주장하는 그와 갈등 속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미사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듯 편치 않는 얼굴 표정을 담고 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달라질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한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미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는 주변의 우동가게로 들어가 특히나 굵은 면발을 좋아하는 그가 주문하는 대로 우동을 먹고 들어와 다음날 이혼도장을 찍으러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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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지막 날 이렇게 오래 머물 것이었으면 여행이라도 할 것을 하고 말했다. 바로 내 말이 그 말이다. 그 모든 전권을 휘둘러 놓고는 언제나처럼 한다는 말이 꼭 내 탓인 양 말을 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그렇게 써버리는 돈에 대해 무척 아까워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넉넉하지 않아 그런지 그렇게 보내는 시간과 돈에 대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결코 그렇게 살려고 그리 애쓰며 버는 돈이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벌었다고 자기가 그렇게 쓰겠다니 할 말이 없어 싸울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말끝마다 이혼할 건데 왜 신경 쓰냐고 속을 박박 긁어놓으니 말을 하면 싸움만 될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오기를 부리며 삼수갑산을 가버리고야 마는 행태들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뾰족하게 다른 별수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이다. 자기가 번다고 다 자기 돈인가. 곁에서 약속을 지키며 희생한 대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배가 부르다고 남의 굶주림과 참음을 몰라줘서야 어찌 인간다운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랴. 하지만 그의 행동은 막무가내로 치닫고 있었다. 자포자기 심사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기어이 상대를 올라타고야 말겠다는 심사처럼 쓸데없이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거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지속하며 이판사판의 이상심리로 치닫고 마는 것이다.
그만한 돈이면 실컷 추억이라도 제대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아담한 호텔을 평소에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와 헤어진 후 한 번도 그 호텔이 의미 있게 생각나지는 않았다. 기억에 좋았던 장소가 더 이상 보기 싫은 장소가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덤덤해 졌다. 다만 그곳에서 가족법적 우리 인연의 최후의 14박 15일을 함께 묵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시간도 짬을 낼 수 있는지 어쩐지 도통 내가 알 수가 없고 계획을 짠다손 치더라도 무조건 그에게 맞추어야만 가능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여튼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이별여행을 그곳에서 처박혀 지내며 실컷 싸우고 지지고 볶아가며 이혼인지 사랑인지를 실컷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보다 팔자가 좋은 사람들 가운데 그때에도 한가하게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이들이 더러 있기는 하였다. 그래봐야 1박 2일에서 2박 3일 정도 머물면 뭐가 할 게 있나. 그것도 기분이 좋아야 수영장이고 사우나며 부대시설을 이용하고 놀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날엔가는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가 명동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해 보기도 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함께 가주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가자고 했을 것이었다. 그도 멀쩡한 정신 상태일 때에는 성당을 싫어하지 않았다. 수녀님 모시기를 외할머니 만난 기쁨만큼 반겨 할 때도 있었다. 내 보기에 스님 만날 때보다 수녀님들과 담소를 나눌 때 훨씬 더 편안해 하고 좋아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성당 뒤편의 성모상 한쪽 의자에 앉아 무심한 방관자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와 함께 잠시 있다가 휴일 저녁미사를 시작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 그곳에서 이상하게도 우연한 인연을 만났다. 우리가 잘 아는 곳에 계시는 수녀님들께서 그곳에서 행사를 주관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순간 이게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는 듯 잠시 머뭇거리며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결혼 전 나는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함을 들이러 온 날 사고가 났었는데 그가 술에 취해 나를 아무도 모르게 심하게 때린 바람에 상처가 크고 깊어 입원을 하여 치료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마침내 결혼식은 취소되고 말았었다. 혼사를 앞두고 간간히 편치 않은 마음과 불안정한 기운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나는 기어이 일을 치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좌우당간 그 일로 나는 요양을 필요로 하기도 했는데 그때 사실 나는 마음이 심히 부대껴서 어디 조용히 피정할 만한 곳에 가서 쉬고 싶었다. 이미 청첩장도 다 발송되고 식만 치르지 못한 상황에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이 발생한데다가 내 사고가 너무 커서 심적으로 충격도 심하였고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도 않아 잠시라도 멀리 훌쩍 떠나 있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선 수습이 급했던 그가 그때 제안 했던 것이 자기네 집 근처의 특수학교에 원장수녀님이 계신 곳에 가 있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딴엔 가까이 두고 보살펴야 마음이 한갓지겠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 염체 없이 그리 할 수가 없겠다 싶어 따라갔다가 그냥 인사만 드리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 그곳에 정식으로 인사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니 그곳과는 마음으로는 각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인사만 다닐 뿐 결혼이후에는 나에게 성당에 관한한 일체의 무엇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사치레 같은 친분관계에 지나지 않았으며 영적으로나 정신적인 교감은 전혀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그에게 스테파노라는 본명까지 이미 지어놓으시며 그 원장 수녀님께서는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 집안의 불교적 분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예를 갖추어 다녀가시기도 하였었건만 허사였다.
그런데 그날 바로 그 명동 성당에 그곳의 수녀님들이 나와서 장애우들을 돕고자 하는 봉헌미사를 주관하여 드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척이나 반가와 하며 쫓아가서 설령 모르는 수녀님이라고 하여도 인사를 나누었을 테지만, 우리는 그저 예상치 못한 일에 움쩍 놀라워할 뿐 서로 마음으로만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며 끝내 모르는 척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다. 이혼을 주장하는 그와 갈등 속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미사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듯 편치 않는 얼굴 표정을 담고 있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달라질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한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미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는 주변의 우동가게로 들어가 특히나 굵은 면발을 좋아하는 그가 주문하는 대로 우동을 먹고 들어와 다음날 이혼도장을 찍으러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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