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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5일 08시 19분 등록

사내는 정거장에 있었다. 정거장에는 몇 사람이 엉덩이를 걸치기에는 충분하지만 그다지 편하게 보이지 않는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가 있다. 사내는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길을 내다보고는 한다. 정거장의 지붕은 낮고 좁다. 비와 뜨거운 햇빛은 가려주었지만 튼실하지도 않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담벼락은 몇 군데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여름에는 시원하겠지만 겨울에는 황소바람이 될 수도 있었다. 정거장 옆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사내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있다. 사내의 옆에는 남자가 혹은 여자가 앉아 있다가 버스를 타고 떠나갔다. 가끔은 젊은이가, 가끔은 사내 또래의 남자가, 가끔은 사내보다 늙어 보이는 사람이 앉기도 했다. 그들은 사내와 이런저런 짧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조용히 앉아 있다가 버스를 타기도 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는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있다. 배낭 하나를 끌어안고 있는 사내는 길을 내다보기도 하고, 잠시 멈췄다가 떠나는 버스를 유심히 보고는 했지만, 선뜻 버스에 올라타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사내는 이런저런 것들을 즐기는 듯이 보였다. 나무의자에 앉아 졸기도 하고 구멍 난 담벼락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땀을 식히기도 했다. 나무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기도 했다.
사내가 정거장에 나와 있은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배낭하나를 메고 정거장에 나타난 그는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정거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버스가 도착했다 떠나기를 반복했지만 그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몇 번은 행선지를 물어보는 듯 운전기사와 얘기를 하기도 했고, 버스를 유심히 살피기도 했지만 버스를 타지는 않았다.

“이게 아니데” “이 버스가 아닌데” “아까 그 버스였나…” 사내는 중얼거리며 속을 태웠다. 배낭을 꾸려 정거장으로 나올 때부터 사내는 미적거렸다. 이게 맞는 건지 아닌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정거장으로 나와서도 사내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이 자리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건지 다시 배낭을 들고 돌아서야 하는건지 알 수 없어서였다.
사내는 정거장 의자에 앉아서 한참 동안 생각을 다듬은 뒤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는 수시로 왔다가 떠났다. 잠시 멈췄다 가는 버스도 있었고 사내가 타기를 바라는 듯 한참을 서 있다 떠나는 버스도 있었다. 행선지도 제각각 이었다. 아주 먼 곳으로 가는 버스도 있었고 바로 옆 동네로 가는 버스도 있었다. 사내도 버스를 바라보며 한참 생각하기도 했고 아예 눈길 한번 주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버스가 왔다가 떠나기를 반복했다. 시간도 계속 흘렀다. 해가 떴다 지고 달이 떴다 지기를 계속했다. 그래도 사내는 정거장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사내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정거장에 나와 앉기는 했지만 떠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사내는 버스 한대가 폴짝 올라탔다. 오랜 시간을 망설이던 것과는 사뭇 딴 판 이었다. 마치 그 까짓것 하는 듯 보였다. 버스는 사내가 올라타자 문을 닫고 바로 떠났다. 정거장에서 이제 사내는 볼 수 없었다.
담벼락 틈에서 바람이 두 번쯤 불고, 구름 속에 가렸던 햇살이 잠깐 정거장을 비춘 시간 쯤 지났을까. 버스가 떠난 방향에서 사내는 배낭을 메고 터덜터덜 걸어왔다. 아마 버스에서 내려 걸어 온 모양 이었다. 사내는 정거장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걸쳤다. 잠시 뒤 사내는 새로 도착한 버스에 다시 올랐다. 지난번처럼 정거장이 비었던 것도 잠시. 사내는 다시 정거장으로 돌아왔고 그러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서너 차례 그 짓을 반복하던 사내는 이내 편하지 않은 나무의자에 누워 잠이 들었다. 꽤나 피곤한 기색이었다. 사내가 깨어난 것은 한 밤중 이었다. 주위는 새까만 어둠으로 덮여있고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휘영청 달만 정거장을 내려보고 있었다. 한 밤중의 정거장에서 사내는 조용조용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한 밤중에 듣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없으련만 사내는 조용히 울었다. 가늘고 길게 울음소리가 깊은 밤을 채워갔다.
아침이 되자 사내는 도착하고 떠나는 버스를 멍하니 쳐다봤다. 정거장에 나와 있지만 떠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많은 버스를 떠나보낸 사내는 다시 버스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시 떠날 때가 되었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 했다.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쉽게 버스를 올라타지는 않았다.

긴 시간을 살피며 망설이던 사내는 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색다를 것도 없는 버스였고, 행선지를 써놓은 표시판은 먼지에 덮여 잘 보이지도 않는 버스였다. 제법 더운 날씨에 창문을 모두 열어놓은 것으로 보아서는 에어컨도 없어 보였다. 사내는 스스로도 확신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배낭을 메고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은 사내가 이마의 땀을 손으로 씻어내기도 전에 버스는 정거장을 떠났다.
정거장에 이제 사내는 없다. 사내가 다시 정거장으로 돌아올지 털털거리는 그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갈지는 모를 일이다. 햇볕이 내려 쪼이던 정거장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휙 지나쳐 갔다. 바람이 떠난 뒤에 종이 한 장이 펄렁이며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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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희
2008.05.05 09:35:50 *.229.162.210

당근 목적지까지 갈 거지. 그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 까지 한번도 정차하지 않는 논스톱인걸 모르셨단 말이삼.
그러니까 함께 동승한 승객들과 지루하지 않게 위트를 나누며 주욱 달려가 봅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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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2008.05.05 13:50:45 *.52.236.185
쉽지 않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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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05 16:46:03 *.5.98.140
창님, 도대체 어디에 앉은거요?
난 앞에서 두번째 줄 6번 좌석에 앉았는디, 님은 당최 보이질 않네?
이번 주말쯤 도착할 정거장에선 얼굴 한번 볼수 있을라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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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5.06 19:25:20 *.122.143.151
'끝까지 읽고 나서도 이게 뭔 야그여~?' 하고 있는데

문득 들어온 제목 "그 남자의 두번째 여행"

아하~!! 그거구나~!!

창형, 내 수준엔 너무 어렵다... 우어어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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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07 07:34:15 *.244.220.254
이야기에 강하신데요~
맞아요~ 우리들의 여행을 그리는 것 같아 사뭇 진지해지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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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5.18 22:42:27 *.36.210.11
아무 길도 없었다.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누군가 다른 사람의 길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구 정신을 동양 정신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점이다. 동방의 구루들은 제자들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들에게는 ‘대리 자유의지’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구루는 당신이 길 위에 어디쯤 있는지, 누구인지, 이제 무엇을 할지,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을 할지 가르쳐준다.
반면 서구의 낭만적 특성은 유례없는 동경으로부터, 이 세상에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나온다. 아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직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이란, 유례 없이 완성될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의 삶이야 말로 앞으로 존재하게 될 바로 그것이다. [91] <네가 바로 그것이다/ 조셉 캠벨> 그대의 리뷰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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