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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시황제가 죽은 뒤 환관 조고는 거짓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린 호해를 제2세 황제로 삼는다. 그 후 진나라는 농민 봉기가 휩쓸고, 국력이 약해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조고는 천하가 대란에 빠지고 조정에 자신의 심복들이 깔려 있는 이때가 황제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긴다.
문제는 중신들이 따라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조고는 중신들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조고는 사슴 한 마리를 호해에게 바치면서 “이것은 제가 황제에게 바치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호해는 “조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어찌 말이라 하오” 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있는 신하들에게 사슴인지 아니면 말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 중 대부분의 사람이 말이라 대답하고 몇 사람만이 사슴이라고 했다. 자리를 파한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한 몇몇 사람을 찾아내 모두 죽였다. 결국 조고는 힘으로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은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서울시내에서 촛불집회가 자주 열리고 있다. 촛불집회의 내용은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말자는 것이다. 집회 참가자는 일부 단체의 논리에 호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뜻밖에 중고등학생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중고등학생들의 참가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일반 성인 참가자들도 크게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집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경찰추산 1만명, 시민단체 추산 2만 5천명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추산하는 숫자만 인정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셈이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시내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아다니던 시대를 생각해보면 만여 명이라는 숫자의 사람들이 시내에 집결해 시위를 한다는 것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는 이제 진실이 무엇이냐를 떠나, 거의 이념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 언론, 시민단체, 학계, 개인이 내세우는 논리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의 논문을 가지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고, 그 내용은 여과 없이 대중들 앞으로 쏟아져 나온다. 어느 게 진실이고 어느 게 거짓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다. 말 맞다나 이제는 ‘개인의 선택’에 모든 게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산 쇠고기의 진실에 대해서는 관련 지식이 없으므로 뭐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에 관하여는 한 마디의 말도 하기 어렵다. 이 혼란한 시기에 어쭙잖게 한 마디를 보탤 용기도 이유도 없다.
촛불집회를 보며 떠올렸던 것은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였다. 만여 명이 수도 한복판에 모여 어떤 이유로 집회를 했다. 그 집회를 보고 일부 언론은 시위를 누가 부추겼는가 하고 계속 물었다. 하루가 지나니 누구누구가 부추겼을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대대적 보도였다. 그들이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시위를 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중고생들이 집회에 참석한 것은 공부에 이러이러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학부모를 위한 충고도 빼놓지 않았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집회를 한 것이 잘못인지, 그 집회에 많은 중고생들이 참여한 것이 잘못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공부하기에 바빠야 할 중고생들이 왜 집회에 참석한단 말인가. 누가 그들을 부추겼기에 책상이 아닌 길거리에 쏟아져 나오게 했단 말인가.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다 정신을 차려보니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문제의 본질은 촛불집회인가,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인가, 미국산 쇠고기인가. 분명 문제의 본질은 광우병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떠오른 문제는 누가, 학생들이 왜 시위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문제의 본질이 가려지고 윤색된 것이다.
지록위마(指鹿爲馬)는 한 때의 이야기로 역사서에 남을 수는 있다. 그러나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것은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은 항상 그렇다. 거짓은 한 때 힘을 가질 수는 있지만 영원히 그 힘을 유지할 수 없다.
만여 명이 수도 한 복판에서 시위를 했다면 그들이 왜 시위를 해야만 했는지를 알려야 하고 대책을 찾아야 한다. 그들을 누가 부추겼는가를, 그들이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할 때가 아닌 것이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 민란을 일으킨 것은 배우지 못한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이 누가 부추겨서 난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생활 속에서 느꼈고 그것이 쌓여서 민란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것이다. 배울 만큼 배운 게 요즘 사람들이고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요즘 아이들은 누가 시킨다고 나서지도 않는다. 에둘러서 문제의 본질을 비켜가려는 모습은 결코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하늘이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역사 속에서 항상 보아왔던 진리이다. 가린다고 아무리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위, 국민의 손바닥 위가 될 수도 있다. 국민들은 일부 기사에 생각이 바뀔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오히려 기사를 분석하고 그 뒷면에 무엇이 있는지 까지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의 지적 능력과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이(理)를 비(非)로 하고 비(非)를 이(理)로서 밀고 나간다는 것을 말한다. 21세기라는 첨단 지식과 문명의 시대에 까마득한 시대의 고사에서 벌어진 일이 다시 벌이지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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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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