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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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갈수록 역사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커져가는 것 같다. 모르고 있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 할 뿐 아니라, 그를 통해 얻는 지혜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 년, 수천 년 전 사람들이 살던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찾아내게 되고, 그 속에서 인간이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난 역사책을 읽게 되면 학창시절에 아쉬웠던 세계사 공부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대학입학 시험에 예비고사와 본고사라는 제도가 있었다. 예비고사는 말 그대로 본고사를 치루기 위한 자격을 검정하는 시험이고, 대학별로 치루는 본고사가 진짜 대학입학시험이었다. 나는 이과(理科) 지망생이었는데, 본고사에서는 영, 수, 국, 과학 등 이과과정에 필요한 과목만 시험을 봤다. 세계사는 예비고사 과목에만 들어 있었고, 점수 배점도 그리 높지 않았다. 한마디로 세계사는 대학입학을 위한 공부로써는 영양가가 별로 없는 과목이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이과지망 학생들이 세계사 공부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다. 세계사 시간은 주로 졸거나 딴 과목을 공부하는 시간이었다.(공부 잘 못하는 학생들이 대개 이런다. 나를 포함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때 세계사 공부를 해야겠다고 작심하고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작심하고 공부한 기간이 딱 ‘하루’였다.
예비고사를 한 달도 남기지 않았던 어느 주말이었다. 예비고사 낙방이 걱정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혹시 답안을 밀려 쓴다던지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 점수를 최대한 많이 따야 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이라도 세계사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아니야, 10점 정도를 위해서 그 두꺼운 교과서를 지금 공부한다는 게 말이 되나? 또 몇 일 공부해서 점수를 얼마나 맞겠다고?’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해? 말어?..... 몇 일 동안 이런 고민을 하다가 ‘그래! 제대로 정독이라도 한번 하고 시험을 보자. 그게 수험생의 자세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일요일 아침에 독서실에 앉아서 ‘오늘은 세계사 정복하는 날’ 이라 생각하고 교과서를 펼쳐 들었다. 오전 9시 경에 시작해서 꼬박 하루를 투자했고, 하룻만에 4백 페이지는 족히 될 세계사 교과서를 일독 할 수 있었다. 수 많은 이름과 지명, 연도, 사건들이 나오는 교과서를 하루 동안 읽었으니 뭐가 남았겠나? 더구나 익숙하지도 않은 외국 이름과 지명 투성이인 책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고 나니 마음은 좀 개운했다. 마음만 개운 했을 뿐 예비고사에서는 그때 공부 했던 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내 고등학교 시절의 세계사 공부는 마무리 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커지면서 역사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 흥미라기보다는 세계사를 모르는 게 좀 답답하단 생각이 들었다. 신문이나 책을 읽다가 만나게 되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그러나 내게는 생소한 인물이나 사건들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내 지식 체계에 뭔가 큰 구멍이 뚫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상식에 속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이런 걸 모르고 있다는 게 창피하기도 했다. 세계사를 제대로 배워보겠다고 이런 저런 책들을 집적거려 보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처럼 집중적으로 공부할만한 시간도 없었고, 수많은 이름, 지명들을 기억하기 위한 암기력도 따라 주지 못했다. 잘해야 일 년에 한 두번 관심을 갖는 둥 마는 둥 하다가는, 하는 일이 바빠지면 관심이 멀어지고,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역사속의 영웅들』의 저자 윌 듀런트는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를 공부한다. 역사는 시간 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라는 말로 역사를 정의한다.
『역사속의 영웅들』은 오랜만에 접해본, 세계사 교과서 같은 책이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세계사를 그 시대를 이끌어 간 영웅을 중심 소재로 흥미진진하게 엮어낸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어가다 보니, 밑줄이 너무 많이 그어졌다. 왜 이렇게 양이 많아지나 했더니, 바로 세계사에 대한 기초가 부실한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초가 어찌되었건 간에, 지금이라도 역사를 이렇게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 큰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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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현이 형아는 무지하게 낭만적인 것 같으면서 잔잔한 애수 같은 분위기가 흘러요. 유년에 너무 일찍 철이 들었을까요?
아, 그러고보니 영화 <애수>에서 로버트 테일러가 비비안니를 바라볼 때의 그 뿅가게 하는 눈빛이 생각나는 군요. 형아 하고 닮은 것 같다고 하면? ㅋㄷㅋㄷ
조직 생활은 사람을 바꿔 놓기도 하지요.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하면 형아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이성은 이과쪽이고 감성은 문과쪽이 아니었을까 싶거든요. 문득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 전통과 관계되는 역사 쪽의 일을 하였다면 참 어울렸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라면 뭐 박물관장쯤 시켜드리고 싶기도 하고요. ㅎㅎ 글이 늘 잔잔히 흐르며 편안하면서도 아직도 앳된 소년 티가 물씬 묻어 나며 맑아요. 형아만의 고고한 순수를 동경하는 정심 때문일까요?
아, 그러고보니 영화 <애수>에서 로버트 테일러가 비비안니를 바라볼 때의 그 뿅가게 하는 눈빛이 생각나는 군요. 형아 하고 닮은 것 같다고 하면? ㅋㄷㅋㄷ
조직 생활은 사람을 바꿔 놓기도 하지요.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하면 형아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이성은 이과쪽이고 감성은 문과쪽이 아니었을까 싶거든요. 문득 고고학이나 문화인류학, 전통과 관계되는 역사 쪽의 일을 하였다면 참 어울렸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라면 뭐 박물관장쯤 시켜드리고 싶기도 하고요. ㅎㅎ 글이 늘 잔잔히 흐르며 편안하면서도 아직도 앳된 소년 티가 물씬 묻어 나며 맑아요. 형아만의 고고한 순수를 동경하는 정심 때문일까요?

정산
써니선배, 유년에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니...
나 아직 철 안들었어요. 철 안들고 그냥 살구 싶어~
영구생각 ㅎㅎㅎ
소은님, 실은 글의 뒷부분이 교육문제였는데, 시간 관계상 짤렸다우.
고등학교때, 스폰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게 안된다는 것.
이과라고 해서, 살아가는 데 별 도움않되는 미토콘드리아, 엽록소, 황산나트륨... 뭐 이런 건 생각나는데,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역사를 보는 시각 같은 것은 별로 남은게 없으니...
그래서 연구원이 된게 참 다행이요. 연구원 모두에게 박수~!!
나 아직 철 안들었어요. 철 안들고 그냥 살구 싶어~
영구생각 ㅎㅎㅎ
소은님, 실은 글의 뒷부분이 교육문제였는데, 시간 관계상 짤렸다우.
고등학교때, 스폰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게 안된다는 것.
이과라고 해서, 살아가는 데 별 도움않되는 미토콘드리아, 엽록소, 황산나트륨... 뭐 이런 건 생각나는데,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역사를 보는 시각 같은 것은 별로 남은게 없으니...
그래서 연구원이 된게 참 다행이요. 연구원 모두에게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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