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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근하게 오래, 비프스튜
2020년 6월 7일
비프스튜는 오랜만이다.
싸고 질긴 부위의 쇠고기를 한 근, 감자, 당근, 버섯과 같은 야채를 넣고 푸욱 푹 끓여서 찌개와 죽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넉넉한 국물 요리를 만든다. 곡물을 넣지 않았어도, 감자와 당근이 저절로 으깨질 만큼 오래 끓인 스튜는 진하고 걸쭉한 죽의 질감을 닮게 된다. 밀가루를 입혀 볶아낸 소고기를 다시 물을 붓고 충분히 끓여서 고기가 결대로 찢어질 만큼 끓여내려면, 스튜에 넣을 야채를 손질하고도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버터에 고기를 볶는 냄새가 집안에 퍼지면 평소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막내가 알아서 부엌으로 온다. “엄마, 이거 무슨 냄새야?” 재촉하는 아이 입에 잘 익은 고기 한 조각을 넣어준다. “기다려, 스튜는 오래 걸리는 거 알지?” 이제 내 키보다 두 뼘은 더 커진 막내 아들에게 궁디팡팡을 시전할 수 있는 기회는 딱 요런 때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막내를 돌려 보내고, 끓어오르는 냄비 속을 들여다 본다. 야채를 집어넣으려면 아직 멀었으므로, 밀린 일거리들을 해치운다. 쌓인 설거지를 부랴부랴 마치고, 세탁기도 한번 돌리고, 그 와중에 스튜 맛을 보충하는데 필요한 스톡과 우스터 소스를 사러 집 앞 슈퍼에도 다녀온다. 다시 현관문을 여는 순간 훈훈하게 파고드는 육수 내음. 음, 이제 요리를 마무리할 시간이구만. 남은 야채를 쓸어 넣고 스톡과 소스로 간을 맞춘다. 이제 그 야채가 익어서 다 퍼질 만큼 약한 불로 다시, 기다린다.
두시간이 넘도록 뭉근하게 끓인 스튜가 마침내 완성되자, 아직 밥 때가 멀었는데도 맛을 본다는 핑계로 막내를 불러 조그만 공기에 스튜를 덜고 따끈하게 덥힌 빵을 둘로 갈라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뜨끈하고 걸쭉한 스튜에서 피워 올리는 구수하고 진한 고깃국물의 내음. 오늘은 아이가 기숙사에 돌아가는 날이어서, 뭔가 든든한 걸 해 먹이고 싶었다. “스튜는 진짜 오랜만이네. 오늘 스튜는 간이 더 잘 맞는다.” 아들은 스튜 한 그릇을 싹 비우고도 모자라 한 그릇을 더 덜어 양껏 먹었다.
‘뭉근하게’라는 부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스튜는 천천히 오래 세지 않은 불로 인내심을 갖고 끓여야 맛볼 수 있는 인고의 요리다. 들어가는 재료도 다양하지만, 메인인 쇠고기가 양껏 들어가야 맛이 나므로 사태 같은 국물요리에 적당한 싼 부위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두세시간은 준비와 조리에 할애해야 하므로, 바쁜 평일에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오늘처럼 주말 아침을 해 먹이고 나서 잠깐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며 재방송 하나쯤 시청하고 숨을 돌린 후 바로 다시 요리를 시작해도 저녁에나 맛볼 수 있는 메뉴가 스튜다.
막내와 몰래시식회를 마치고, 아이는 밀린 숙제를 하러, 나는 이제 3시간 후면 기숙사로 돌아갈 아들을 위해 짐을 챙긴다. 일주일을 버틸 수건, 속옷, 양말, 교복, 티셔츠와 츄리닝으로 캐리어 하나가 꽉 찼고, 중간에 빨래를 한번쯤은 돌려야 겠다기에 세제와 유연제까지 챙겨 넣고 나니 보조 천가방마저 묵직해지고 말았다. 여기에 일주일 치의 마스크, 저녁 후 먹을 간식거리로 귤과 시리얼바를 챙겨 넣었다. 점심은 열두시, 저녁은 다섯시로 정해진 학교 식사 시간을 마치고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시간이 너무 길다. 이 시간을 쫄쫄 굶으며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매점도 문을 닫고 자판기도 없으니 너무 하다. 싸간 간식으로 버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비프 스튜를 끓인 건 그 때문이었다. 물론 주말이면 돌아올 테지만, 처음으로 집을 떠나 생활하는 아들을 든든하게 먹여서 보내고 싶었다. 오래오래 끓여서, 쇠고기와 감자와 당근의 양분, 월계수 잎과 통후추의 향취가 가득하고 울긋불긋 파프리카와 버섯이 오롯이 제 몸을 내준 스튜 한 그릇을 아이에게 먹이고 나면 왠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비프 스튜에 달걀 샐러드, 포카치아[1]로 네 식구의 저녁을 마치고, 기숙사로 향하는 막내의 짐을 하나씩 나눠 들고 차에 올랐다. 저녁 후 드라이브 겸 다 함께 배웅이다. 18년째 장롱면허인 나는 아들을 기속사에 데려다 줄 수 있는 엄마가 되겠다며 조수석에서 눈을 부릅뜨고 길을 살폈다. 이삽십분이면 족한 거리라, 학교 앞에 금방 도착했다. 기숙사 입사일에 함께 하지 못한 큰 아들이 동생의 기숙사가 궁금하다며 짐을 들고 따라 나섰지만, 입사생 가족이 출입 가능한 날은 입사일과 퇴사일 뿐이라며 입구에서 제지당하고 말았다. 막내가 며칠 전부터 어깨 통증이 있어 무거운 짐을 식구들이 나눠 들고 왔는데, 혼자서 그 짐을 몽땅 이고 매고 기숙사에 들어서는 녀석의 모습이 짠했다.
생각이 많고 행동은 쉽지 않고 자신과 싸우느라 힘든 나이, 아들은 이제 열여섯이다.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로 결정해 놓고도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과 일주일을 보내기가 쉽지 않은 듯, 기숙사 입퇴사의 주기를 계산 중인 눈치다. 그러면서도 한 학기는 버텨보겠다며 끙끙 짐을 매고 나서는 아들을 보는 마음은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한편으로 안심이 되는 복잡미묘한 심경이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오래오래 끓여야만 맛을 아는 스튜처럼 지금의 혼란도 그대로 머물지만은 않을 것이니 버텨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아들도 알고 있다. 뭉근하게 오래, 천천히 끓고 익어갈 시간들을 기대하고 기다려 보자, 아들. 엄마가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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