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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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공효진, 소지섭 주연의 <주군의 태양>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여름이면 등장하는 공포물에 멜로를 더한 드라마였죠. 귀신을 보는 공효진이 소지섭 옆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이에요. 드라마 중에 [폭풍우 치는 밤에]라는 그림책이 나오고 그림책 내용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면서 [폭풍우 치는 밤에] 그림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며 [폭풍우 치는 밤에]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했죠. 드라마에 책이 직접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럴 때마다 그 책은 화제의 책이 되죠. 시크릿 가든에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더블유(W)에서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 등. 드라마의 인기를 그대로 책이 이어받는 거죠.
다시 [폭풍우 치는 밤]으로 돌아가서, 저는 그 드라마를 보고 그림책을 보지 않고 영화를 봤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책은 안 봤어요. 그림책은 6권이라 그랬을까요. 여하튼 영화를 봤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염소 메이와 늑대 가부가 등장하는 첫 장면인 폭풍우 치는 밤에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며 그저 하나의 독립체로서의 존재만으로 본다면 이렇게 소통할 수 있구나를 느꼈어요. 그러면서 염소와 늑대가 공통으로 냄새도 좋고 부드럽고 씹는 맛도 좋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며 서로 먹이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리곤 동시에 ‘풀’과 ‘고기’라고 말하는 순간 천둥이 쳐서 들리지 않아요. 결국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헤어지고 다음에 만날 것을 약속하죠. 당연히 환한 밖에서 만난 둘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만 계속 우정을 이어가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영화와 책이 결론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건 드라마가 방송될 당시는 6권까지만 번역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1994년 일본에서 출판된 6권은 늑대가 죽고 염소는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 나요. 비극으로 끝난 내용을 수정해달라는 독자의 요청으로 기무라 유이치 작가는 10년 만에 7권을 써서 해피엔딩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폭풍우 치는 밤에]는 출판되면서 170만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본 초등교과서에도 실렸어요. 책은 일본의 고단샤 출판 문화상 그림책 상, 산케이 아동 출판 문화상을 받았어요. 연극,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는 것은 물론이고요.
[폭풍우 치는 밤에]뿐만 아니라 일본 그림책은 영유아 대상의 그림책이 많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왜 그럴까요? 서양에서는 그림책을 6세에서부터 106세까지 보는 것이라고 여긴다고 해요. 그래서 그림책의 후발주자인 일본은 0~6세를 겨냥했죠. 고미 타로, 쓰쓰이 요리코 같은 작가들의 그림책을 봐도 알 수 있어요. 고미 타로의 [누구나 눈다]는 아이들의 좋아하는 키워드인 똥이고, 쓰쓰이 요리코의 [이슬이의 첫 심부름]은 아이들의 생활습관을 잡아주는 내용이에요. 일본 그림책은 영유아 대상 그림책이 정말 많아요. 한국의 한림출판사는 일본 그림책을 많이 출판하는 출판사에요. 그림책 작가이자 출판사 대표인 이호백이 운영하는 재미마주는 한국 그림책만을 출판해요. 출판사의 특색을 알 수 있죠.
일본 그림책이 아동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귀여운 주인공들이 많아요. [폭풍우 치는 밤에]처럼 먹이사슬 관계인 염소와 늑대가 우정을 키워간다는 설정은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어요. 영국의 전래동화인 아기 돼지 세 마리에서는 늑대가 돼지를 잡아먹죠. 패러디로 나쁜 돼지가 나오기도 하지요. 미야니시 타츠야의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걸]에서 늑대와 돼지가 등장해요. 숲에 돼지들이 낮잠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에게 알리러 가는데 친구들이 음식을 하나씩 주고 그걸 받아서 집에 와서는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걸”하며 먹으려고 해요. 아무래도 뭔가 허전하고 놓친 게 있다는 느낌이 들며 그제야 ‘돼지들’을 떠올리죠. 부랴부랴 숲으로 가지만 이미 돼지들은 집으로 돌아간 후에요. [고 녀석 맛있겠다]처럼 초식공룡을 먹이로 생각하는 육식공룡과 육식공룡이 아빠인 줄 아는 초식공룡의 이야기도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어한다는 거예요. 이건 아이들만이 아닌 것 같아요. 어른인 제가 봐도 재미있어요.
얼마 전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봤어요. 암사자가 사냥하는 장면인데, 갓 태어난 잘 걷지도 못하는 누의 새끼를 바로 죽이지 않고 심지어 엄마인 줄 알고 부비는 누 옆에 가만히 있는 모습이었어요. 그리곤 암사자는 그냥 자리를 떠나버리고, 누는 기다리던 엄마에게 달려갔어요. 암사자가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린 누가 엄마처럼 대하는 모습에서 자기도 엄마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요. 혹시 그 많은 갈매기 중 먹는 것만을 쫓지 않고 비행에 관심을 둔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처럼 남다른 암사자였을까요. 무엇이 되었든 우리 인간이 동물의 세계는 그저 먹고 먹히는 관계로만 상정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장면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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