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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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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6일 08시 06분 등록
제가 맨 처음 이 바닥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그 선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년 전이였죠. 모두들 부러워 하던 안정된 7급 공무원 생활을 저는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쯤 제 무기력증은 극도에 달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지 없이 하루가 시작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 하루를 또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그 날이 그 날 같은 날이 반복이 되었죠. 그 날 아침도 저는 출근을 했습니다. 불만으로 잔뜩 찬 민원 전화를 받으면서 하루가 시작이 되었죠. 우리 부서의 사무관은 그 날도 말도 안 되는 실적성의 업무를 저한테 명령했습니다. 생각 같아선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제게는 더 이상 따질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따져도 저는 그저 7급에 불과했거든요. 제 말이 먹힐 리가 없었습니다. 남들은 그런 일이 있으면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서 사무관 승진 시험을 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사무관도 되기 싫었습니다. 그들이나 저나 불쌍한 인생으로 치면 동급이었거든요. 열심히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한 그들은 일단 그 자리에 앉기 시작하면서 그 그물 같은 공무원 조직에서 벗어날 수 없어 보였습니다. 평생 그 그물 안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윗 분들한테 잘 보이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죠. 아마 그 사무관도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실적성 업무를 저한테 맡긴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도 고시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풍운의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멋진 정책을 펴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겠지요. 조직은 자신의 생존이 걸린 곳이었습니다. 윗 분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 사무관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감정은 일종의 연민 같은 것이었습니다. 조직에 갇힌 인생.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물 같은, 감시의 눈길이 여기저기서 나를 옭아매는 그 곳에서 저는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날 돌연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 한 3개월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간을 지나가는 데로 방치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대학 때 선배 하나가 전화를 했습니다. 선배는 아직도 제가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나 봅니다. 제가 이런 저런 일이 있어서 그만두고 집에서 뒹굴 거리고 있다고 말을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선배는 당장에 저더러 괜찮은 과외 자리가 있으니 하는 게 어떠냐고 하더 라구요. 별로 망설일 일이 없었죠. 대학 때는 나름대로 저도 잘 나가는 과외 선생이었던 데다가 마침 생계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던 중이었으니까요.

생각보다 그 일은 제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글쎄, 공무원을 그만둘 때만 해도 이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말이 공무원이지 요즘 같은 세상에는 공무원도 야근을 밥 먹듯이 하쟎아요. 그거에 비하면 저는 지금 시간적으로 훨씬 자유롭고 수입은 꽤 쏠쏠한 편입니다. 솔직히 제가 받던 월급에 두 배 정도는 되니까요. 신분 보장이 안 되고 4대 보험이 없다는 정도만 어떻게 해결하면 상당히 좋은 직업입니다.

학교 때부터 워낙 시험과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던 지라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처음 얼마간은 잃어버린 ‘지위’라는 것에 대해 많이 혼란스럽긴 했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어디 나가면 ‘공무원’이에요 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아이들 과외 한다’ 는 말은 쉽게 나올 수는 없는 거쟎아요. 몇 달 지나자 그 알량한 자존심은 없어지더군요. 까짓 거 지금 생활에 내가 만족하면 됐지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더 라구요.

아무튼, 저는 선배 언니의 덕으로 재수 좋게 부유한 환경과 똑똑한 머리를 타고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표면적으로 저는 잘 나가는 전문 과외 선생님이었지요. 표면적으로는요. 그러니까 어느 날부터 전문 과외 선생은 저한테 표면적인 직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날 저는 연희네 집에 도착했습니다. 연희가 집에 없더군요. 알고 보니 학교 소풍날이었습니다.연희 어머니께서 저한테 미리 알려주시는 것을 깜빡 하신거죠. 연희 어머니는 무척이나 미안해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차 한 잔을 대접을 받았겠지요. 처음에는 그냥 이것저것 연희가 공부에 관한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연희 어머니는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모여대 미대를 다녔었다고 연희한테 들었었던 것 같습니다. 부자집 마나님이라선지 관리도 꽤 잘 하고 계셔서 피부는 여전히 20대 피부 같습니다. 몸매는 또 어떻구요. 미스라고 해도 모두 믿을 만큼 군살 하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모로도 감출 수 없는 그늘 같은 것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가끔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그 그늘을 느끼면서 저는 그녀에게는 그 그늘 마저 아름답다고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이야기는 이제 연희를 넘어서 여자들끼리의 수다가 되었습니다. 문득 연희 어머니가 제 나이를 묻더군요.

“어머, 선생님. 그러면 저랑 동갑이시네요. 나 이제 선생님한테 말 놓아도 되나?”

이렇게 말을 놓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우리는 2시간도 넘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연희 어머니는 말동무가 필요했었나 봅니다. 마치 막아둔 물꼬가 터지듯 쉴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그녀. 그녀는 외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사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이 너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부자집에서 고생 모르고 곱게 자란 그녀는 그 동네 사람들이 그렇듯이 집안끼리 아는 집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결혼하던 해에 그녀는 석사 과정을 하던 중이었는데, 특별히 공부에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결혼을 해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그러다 연희를 낳고 별탈 없이 잘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별탈이 없다는 말은 연희가 유치원을 다니기 전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항상 계시긴 했지만 그래도 그 때까지는 연희한테 손이 많이 가던 때였으니까요. 연희가 커서 이제 유치원에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슬슬 삶이 무료해지기 시작 했다더군요.

전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눈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삶이 무료해질 수가 없었던 내 삶에 감사해야 겠군. 도대체가 먹고 살 것 걱정하느라 내 인생은 그리 무료해질 새가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인생 고것 참 공평한 것이구나. 그래 내가 밥 먹고 사는 것 걱정할 때, 이 아름다운 귀부인은 삶이 무료한 것을 걱정하며 살고 있었구나. 아마 그 고민은 내 고민의 무게와 같은 무게 였겠지? 불쌍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인간이던가?’

제가 이런 생각으로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 주자 그녀는 제게 마음의 문을 더욱 더 세차게 열었습니다. 연희가 초등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는 그녀의 삶은 무료함을 지나쳐서 외로움, 허무함으로 가득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니까, 부와 미모와 가족과 그리고 보장된 미래와 안락한 삶이 그녀에게 만족감을 줄 수 없었답니다. 한 동안 우울증 치료도 받았지만 근본적인 부분을 해결을 해 줄 수는 없었답니다. 애써 재미있는 일들을 만들어 보려고 이것저것 배우는 곳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다시 예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그려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더군요.

바로 그거였습니다. 아름다운 연희 어머니의 웃음 뒤에 항상 보이던 그 우울한 그늘.

제가 다른 재주는 많지 않지만 사람들 이야기 들어 주는 것 하나는 예전부터 잘 했거든요. 공감의 눈빛을 마구 보내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뭔지 알 것 같다는 느낌을 팍팍 전해 주었습니다.

연희 어머니는 점점 저를 맘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 날 저녁까지 멋지게 얻어 먹고 집에 들어 왔으니까요.

그 날 이후로 저는 연희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업을 새로이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과외를 하러 그 집에 가는 것은 이제 핑계에 불과합니다. 연희를 1시간 정도 가르치고 나서 저는 연희 어머니의 이야기를 3시간도 넘게 들어 줍니다. 그 덕분에 제 과외비는 2배로 인상이 되었다니까요.

과외비 문제는 차치하더라고 이 직업 참 재미난 직업입니다. 세상에 온갖 재미난 이야기를 다 들어 줄 수 있으니까요. 그 날 이후로 저는 연희 어머니 이야기를 몇 번 더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남자 친구가 하나 있다고 부끄러운 듯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니까, 연희 어머니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 남자 친구와의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던 셈입니다. 난생 처음 가슴 뛰는 진짜 로맨스를 시작한 연희 어머니로서 그 신나는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다는 것은 고문이었을 겁니다. 그 콩딱콩딱 뛰는 가슴을 부여 안고 있었던 그녀의 심정이란 어땠을까요?

친구들한테도, 연희 친구 엄마들한테도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제가 적임자 였던 겁니다.

저는 연희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제가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대로 하지 못해서 생긴 마음의 병을 제가 고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게다가 이제 제 고객은 하나 둘 늘어서 벌써 다섯 명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주변 사람들한테는 새어 나가서는 안 될 이야기를 저한테 하고 있는 셈이지요. 덕분에 저는 좋은 음식 얻어 먹어가며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이상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 동네에서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는 이 직업이 무척 맘에 듭니다. 재미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기만 하면 덤으로 괜찮은 금전적인 보답들이 따라 왔으니까요. 제가 왜 진작 이런 좋은 직업을 몰랐을까요? 혹시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언제나 성심 성의껏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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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06 09:01:23 *.36.210.11
현정이는 미스터리 스릴러를 써보면 좋겠다.

글을 읽으며 가끔 향산이 떠오르곤 하네. 끌고가는 힘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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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한정화
2008.07.06 09:58:33 *.72.153.57
아우, 너무 슬픈 이야기다.

어느새 쏙 빠져들어가서 읽었어.

외로움이란 것을 절절히 경험해본(?) 사람으로, 그리고 보아온 사람으로써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이런 세상은 너무 슬퍼.어엉엉.

거의 10년이 지났지만,
어느날 나는 방에 공부하러 들어간다고 가서는 책을 뒤적이는데,
거실에서 어머니께서 혼자 TV를 보시는 거야. 옆에 앉아서 말벗하면서 같이 볼까하다가.. 에이~ 하고 그냥 공부했지.
뒤통수쪽에서들여오는 TV 소리 엄청커서 공부에 방해되더라구.
그런데, 어머니께서 보신 코미디프로에서 재미난 상황이 있었나봐. 엉첨 크게 웃으셨어.

그 순간 아주 많이 미안했어. 혼자 TV 보시게 한 것도 미안했고, 나는 어머니를 그렇게 웃게 하지 못하는게 미안했어.

외로움이란 즐거움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인가 보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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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7.06 12:11:31 *.72.227.114
현대인들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잘 못하쟎아요..그래서 이런 직업이 생길 것도 같다는 생각에서 한 번 써 봤습니다. 곧 있으면 부유한 집안의 은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직업이 생길지도 모릅니다...(현정의미래 예측..)

써니 언니..잘 지내 시나요? 우리 언제 또 볼 수 있으려나?
정화 님..이번 주 책 '강점 혁명'과 연결을 시켜 보자면 이게 정화님과 저의 강점의 차이랍니다. 저는 empathy가 부족한 사람. 정화님은 empathy가 강점인 사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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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7.07 10:40:22 *.244.220.254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 봇다리를 꺼내놓는 것만으로도 가슴저린 소설 몇권은 쓸 수 있을 듯~ 감성소녀들 다 쓰러지고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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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8.07.07 13:23:49 *.117.68.202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그곳을 떠났구나.
누구의 말을 들어준다는 거 그거 보통사람들이 가장 쉽다고 생각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거지...
그대가 연희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봤는데
재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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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17:41:26 *.216.25.207
현정이 붓을 휘두르면 장편소설 꺼리가 하나씩 나오는구만
언젠가 훔쳐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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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8 00:08:00 *.41.62.236

앤공주가 그대를 채용하리요. 다이아 5캐럿이면 일년치로 적당하겠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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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7.08 10:02:50 *.97.37.242
이게 소설인가? 실화 같은데...
소설적 실화, 실화적 소설, 진짜와 가짜를 넘나드는 이야기.
현정이 글 읽으면 그렇게 느껴져. 이거 정말 진짜 아닌가?
진짜면 나두 소개시켜줘. 좋은 직업 같은데, 전직을 검토해 봐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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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7.08 10:10:14 *.72.227.114
이건 100% 소설..제가 꾸며낸 이야기랍니다..
근데 몇 분들은 실화라고 생각을 하시나 보네요..ㅎㅎㅎ
가상적으로다가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인들 속마음을 터 놓을 데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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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8 18:13:35 *.122.143.151
흠..
픽션이었구나..
괜히 고민했네..
속았어..
새까맣게 속았어..
참 잘 쓴다..
소위 참 뻥 잘 친다..
이제부터,
현정은 구라쟁이..
구라쟁이하면 현정..
줄여서 '구라현정'.. ㅋ
웬지 '명상지환'과 통하는 느낌이..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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