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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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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6일 10시 25분 등록
주역의 대가를 만나다(2)

아호라는 것에 별 관심이 없던 내가 ‘지효(地曉)’라는 호를 눈앞에 받아들었다. 그 뜻을 음미했다. 책 읽고 글 쓰는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 미래에 대한 꿈을 좀 더 확실히 꾸기로 마음먹었었다. 나의 행동은 무모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자라기 짝이 없는 실력으로 작가가 되겠다고 무작정 덤볐으니 지금의 나는 정상상태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래 어떤 책을 쓰려고 하나” 이내 선생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난 그동안 생각해놓은 것을 털어놨다.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책을 쓰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약간 의외다 싶은 표정을 하며 다시 물으셨다.
“음~~ 그들의 무슨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데.......”
1분을 넘기지 않은 짧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한 가장 긴 이야기였다.

“선생님 저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기계 엔지니어로 9년간 일했습니다. 우리나라엔 실업계 고등학교가 700여개나 됩니다. 그런데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사회는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이내 외면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에게 꿈과 희망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제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찾도록 돕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소외된 젊은 청소년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경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쓸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지효라는 아호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땅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아래에 있다. 어쩌면 지금의 실업계고등학교 학생들의 처지가 아니겠는가? 그들은 산업의 제일선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가장 밑바닥의 땅을 닮았고 그것과 친하다.

새벽은 시작이다. 그것은 깨달음과 통한다. 잠에서 깨어나듯 어제와 다른 오늘의 시작이다. 나는 매일매일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고 애쓰고 있다. 생각보다 그 일은 쉽지 않다. 수련의 과정이란 것이 서슬 퍼런 시련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나는 그것을 나름 즐기고 있다.

이제 좀 더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일이다. 나 스스로에게 많은 물음을 던져봤지만 공허한 메아리일 뿐, 만질 수 있는 뭔가를 얻지 못했었다. ‘지효’라는 호를 받아드는 순간 무척이나 묘한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호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큰 무거움이 나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랬다.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이 잘못하면 상처만 더 크게 남는 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길을 가기위해 그동안의 나를 죽이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를 죽지 않고 어찌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선생님께서 벼루에 물을 적시고는 먹을 갈기 시작하셨다. 선생님의 붓끝은 현란한 춤사위였다. 먹물의 농도가 좀 더 찐했으면 하는 욕심이 순간 들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선생님은 옅은 듯 퍼지는 물기도 나름 운치가 있다고 하시며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가셨다. 한 문장이 끝날 때 마다 그 뜻을 말씀해 주셨다.

나는 첫 번째 문장을 넘지 못했다. “강을 건너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정확치는 않지만 이런 뜻을 내포한 문장을 받아 들었다. 선생님은 그 뜻이 해석된 내용을 별도로 출력해주시기 위해 컴퓨터가 있는 책상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나는 선생님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얌전히 서있었다. 선생님의 모습을 좀 더 멀리서 보고 싶어서였다. 역술인과 컴퓨터가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셨는지 붓과 벼루는 방에 있었고, 컴퓨터는 거실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는 몇 명이 앉을 수 있는 손으로 조각한 쇼파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쇼파에 앉아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셨다. 불과 한 두 걸음 떨어진 거리를 좁혔을 뿐인데 선생님과 그새 친해졌다는 마음이 들었다. 선생님께서 좋은 작가가 되어달라며 아호 밑에 써주신 한문을 해석한 종이를 나에게 주셨다. 나는 허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선생님 댁 문을 나섰다.

조금 흥분한 상태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내 심장은 평소보다 급하게 뛰었다. 버스를 탔다. 조금 전에 선생님께 받아들은 글을 보고 또 봤다. 내가 이 글의 뜻처럼 그렇게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그 길을 가고자 내 과거와 이별하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지나가보는 부산. 그 기억나지 않는 동내의 모습은 마치 내가 다시 시작하는 것을 반기는 듯 그렇게 새로웠다. 창밖은 이미 짙은 어둠으로 잠들기 시작했고 나는 부산역에 내려 국밥집을 찾았다. 부산에 오면 꼭 먹는 음식이 돼지국밥이다.

선생님과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다음 기회에 뵈면 선생님과 함께 돼지국밥을 먹고 싶다. 선생님도 돼지국밥을 좋아 하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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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7.19 08:36:04 *.179.68.77
"강을 건너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새벽을 시작하는 모습에 떨리는 혁명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길 잃은 학생들에게 따뜻한 형, 그리고 조력자가 되실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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