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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5일 15시 02분 등록

아인슈패너는 부드런 생크림 거품이 입술에 닿는 촉감부터가 좋았다. 거품에 입을 대고 속의 커피를 쭉 빨아들이니 거품을 타고 올라온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이 코를 사정없이 간지럽혔다. 나는 가방에서 인천 면세점에서 사온 에세 한 갑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선물이예요. 대신 나 하나 얻어 필게요.’

주고 뺏어 핀다? 그건 어느 나라 예법인가요?’

후후, 그건 내 맘이지, 그러면 안되는건가?’

나이도 어린데다 몇 시간 옆에 붙어 다니며 편해져서인지 저절로 반말이 나왔다.

하여튼 가만히 보면 소영씨도 특이한 사람이예요.’

그러고 보니 그도 나를 직책으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승우씨 그거 알아. 내가 관찰한 바로는 승우씨에겐 담배가 일종의 밧데리인 거. 담배를 피우고 나면 그대의 입담이 더욱 걸쭉해지더라고.’

그럴 리가요. 그룹이 점점 스스럼 없어지니 제가 건방을 좀 떨어보는 거죠.’

암튼 그대 덕분에 우리 그룹이 행복해하니 좋군.’

제가 이래뵈도 아줌마 전문이걸랑요…’

 

자유시간을 가진 사람들은 슈테판 성당 한 쪽 코너에 있는 시계탑에 다시 모였다. 앞으로 이틀 동안 성가곡과 여성챔버 두 종목 대회에 출전하는 합창단은 반 나절 관광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 사이 나는 객실과 많이 떨어진 컨퍼런스 룸을 하나 빌렸다. 그들은 늦은 밤까지 빡센 연습에 들어갔다. 승우씨는 15일에 우리를 하루 더 안내하기로 했다.

 

 

2008.11.15

 

벌써 이틀이 후딱 지나갔다. 이틀 동안 합창단은 예정했던 두 번의 경연대회를 무사히 치렀다. 비록 발표를 앞두고는 있지만, 오늘 하루는 완전히 자유시간이었다. 우리는 빈 외곽 바카우 주에 있는 멜크 수도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승우씨가 다시 우리의 하루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투명한 하늘에 하얀 구름이 한가롭게 떠가고 차장 밖으로는 너른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축하드립니다. 조상 3대가 덕을 쌓아야 이곳에선 이런 날씨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비엔나 외곽 쪽으로 방향을 튼 버스 안에 승우씨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사흘 비엔나는 온통 비에 젖어 있었다. 합창단은 불편한 공연복을 입고 질척대는 도시를 걸어다녀야 했다. 성대한 개막식이 치러진 장소나, 13종목의 경연이 치러지는 대회 장소는 대부분 유서깊은 고성당들이었다. 성당에는 합창단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대기할 적절한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성당들은 대부분 구시가지 안에 자리를 잡고 있어 대형 차량들의 진입이 통제되었다. 할 수 없이 합창단은 버스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진 대회 장소까지 연주복 차림으로 걸어다녀야 했다. 구름 낀 하늘과 하루 종일 내리는 비는 더 이상 반갑지 않았다. 비엔나의 회색 낭만은 하루면 족했다.

고속도로는 텅 비어있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대자연 속으로 나왔습니다. 이 자연을 보십시오. 게르만의 음악과 철학은 골방에서 탄생한 게 아니죠.

그의 음악사 강의가 이어졌다.

잘 이해하셨죠, 하이든이나 베토벤 선생이 그냥 음악을 만든 게 아니라는 걸. 전원교향곡이 그냥 시멘트 빌딩 사이에서 나온 게 아니고, 모차르트 선생도 당구 치면서 곡을 쓴 게 아니죠. 말하자면 조깅하고 충분히 산책하고, 때론 술 한 잔 걸치고.. 그래서 님이 충만히 찾아오셨을 때 그 때 곡을 쓴 거란 얘기죠.

 

주변이 좀 산만해지자, 신경이 쓰이는지,

무슨 지방방송이 그렇게 재미있답니까? ! 베토벤 바이러스 얘길 하고 계셨군요. 전 어제 그거 마지막 회 봤습니다.

아니 어떻게 봤대요? 여기서도 한국 방송을 볼 수 있어요?

, 그럼요, 돈만 내고 케이블 신청하면 한국 방송 실시간으로 다 볼 수 있어요.

그래요? 그런데 드라마는 어떻게 끝났나요?

, 내가 관광가이드지 드라마가이드가 아닌데, 진짜 궁금하세요? 그럼 그거 먼저 중계해 드릴까요?

일제히 !!!!

그는 마치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이미 예상한 사람처럼 실감나게 중계를 했다. 좌중은 그의 중계에 푹 빠져들었다. 드라마를 직접 봐도 그렇게 재미있진 않을 것 같았다. 장면 사이 사이 그는 그 동안 전개되어온 스토리를 요약해서 설명해주었고, 왜 이 드라마가 하나의 신드롬을 낳을 만큼 사람들을 열광시켰는지 마치 드라마 평론가인냥 유장한 해설까지 곁들였다. 그의 중계방송이 끝나자 여기저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가이드 선생은 마이크 잡는 게 팔자인 것 같네.

그래서는 아니구요, 제가 워낙 이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 거죠.

그때 갑자기 누군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저 들판에 파란 게 뭡니까, 겨울인데 왠 싹들이 저렇게 올라오는 거지요.’

제가 시골 출신이 아니걸랑요, 그리고 비엔나 가이드지 이렇게 밖으로 나도는 가이드는 아니거든요. 오늘은 여기 우리 소영씨가 여러분들 하루 특별한 코스로 모셔달라고 부탁해서 제 비장의 코스를 공개하는 겁니다. 여긴 제 작업 공간이지 가이드 공간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그 동안 제 차에 태운 아가씨들 중에 저 푸른 싹이 뭐죠하고 물어본 예가 아직 없어요!’

조금 뜸을 들인 후에,

, 농담이구요, 사실은 감자와 밀밭입니다.’

 

주제가 농사로 바뀌자 그는 오스트리아의 농업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주의 깊게 듣던 사람들 중에 어떤 이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들판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거죠?’

제가 그럼, 농부까지 이 시간에 들판에 데려다 놔야 하는 건가요?’

‘…?!’

 

어느새 버스가 지방도로로 진입하자 갑자기 풍경이 달라졌다. 멀리 보이던 아름다운 붉은 지붕의 집들이 바로 도로 옆으로 들어왔고, 넓고 푸른 다뉴브 강이 눈 앞을 가득 채웠다. 강 위에는 이국적인 유람선이 떠 있었다. 무채색의 공간에 붉은 지붕과, 앙상한 포도밭과, 아직 남은 노란 낙엽과, 강 위에 비낀 햇살이 쓸쓸한 초겨울 대지를 텅빈 듯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낭만은 이곳 저곳 어디서든 물감 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크렘스(Krems)와 멜크(Melk) 사이를 잇는 30킬로에 달하는 로맨틱 가도는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한 시든 단풍들마저 그 아름다운 풍경에 완벽한 조연 역할을 했다.

 

우리는 작은 중세마을 뒤른슈타인에 내려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가로 질러 산 꼭대기에 위치한성에 올랐다.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십자군 원정 때 포로로 잡혔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3년 동안 유배되었던 뒤른슈타인 성, 허물어진 성곽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는 환상적이었다. 그곳 경치는 그림 엽서 사진이 갖추어야 할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어느 각도에서 앵글을 들이대도 완벽한 풍경화가 완성되었다.

 

성에서 내려와 버스에 오르니, 두 명의 아줌마가 실종되었다. 그렇게 주의를 주어도 꼭 이런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게 어떤 때는 내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기념품 가게에 들어갔다가 주인이 권하는 슈납스를 한잔 씩 얻어마시고 얼굴이 붉어져서 나타났다.

잘 생긴 주인아저씨 때문에 괜히 거기 더 있었던거죠? 잘하셨어요. 여행의 재미란 게 뭡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행나오실 때 다들 바깥분들에게 까불지마 하고 나오셨죠.

까불지마라뇨?

, 가스불 조심해, , 불조심해, , 지퍼 조심해, , 마누라만 생각해.

ㅋㅋㅋ

그런데 믿지 마세요, 남자들 다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우리 현명한 여성분들이 모른 척 눈 감아주는 겁니다. 그분들 지금 다들 웃기지마하고 계실 겁니다.

웃기지마는 또 뭐죠?

, 웃기지마, , 기회는 이번 뿐, , 지금, , 마누라도 없는데...

그런데 저는요, 여기서 마누라 혼자 여행을 보내는 일을 한 번도 못해봤네요. 아이들 방학이면 가족들 데리고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는 게 저의 취미라서 벌써 40개국을 돌았습니다. , 무슨 표정이 그래요. 제가 안 그렇게 생겼다고요. 생긴 거 가지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이래뵈도 저 애처갑니다. 그나저나 한국에 못가본 게 벌써 9년이나 됐네요. 한국 무쟈게 좋아졌죠. 제가 토큰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너 한국 사람 맞기는 하냐고 하더라구요.

한국을 그렇게 안 나가면 부모님들 아무 소리 안해요?

대신 처가나 본가나, 부모님들께서 직접 놀러오시죠.

아하,

 

우리집 처가집 합해서 6명이 목사입니다. 그러니 저희 집안 정상이 아니예요. 정상은 저 밖에없습니다. 특히 우리 어머니 이권사님, 30년 권사입니다. 골 때립니다. 아무도 못 말립니다. 독해요. 제가 유학할 때 돈 없어서 콜렉트 콜하면 안받으세요. 아시죠. 콜렉트 콜 하면 이 쪽 목소리 들려주고 전화 받으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 그러면 우리 이권사님 안 받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는다고요, 할 수 없이 코 묻은 제 돈으로 전화를 하면 비싼 돈을 내가 왜 무노? 그러십니다. 내 그때 느꼈다니까요. 평소에 인간관계 잘해야 한다고요. 여러분도 콜렉트 콜로 전화해서 안받고 끊는 사람이 있으면 그 인간관계 잘 생각해보셔야 돼요.

그런데 그런 우리 이권사님, 가끔 우리 집에 오시면 한 6개월씩 눌러앉았다 가십니다. 오시기 전에 나 간다, 비행기표 부쳐라 선전포고 하십니다. 그렇게 계시다 가시면 교회 목사님, 구역식구들.. 다해서 선물 30개는 대령해 바쳐야 합니다.

6개월씩이나 계시면 그 활달한 분이 심심하시겠다.

아휴 말도 마세요, 우리 이권사님 여기 말 한마디도 못하시면서 산책 나가시면 며칠 안돼 현지 할아버지 데려옵니다. 작업 능력이 아주 뛰어나요, 제가 그 점, 우리 이권사님 닮았으면 좀 좋았을까요.

 

마냥 농담을 하는 것 같은 그의 말에도 뼈 있는 말이 숨어 있었다. 이를테면 장모님 용돈을 드릴 때는 생색내고 적게 주고, 어머님 드릴 때는 표시 안내고 많이 준다는 말 같은 것

 

가이드하다 보면 재밌는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오래 전에 안내한 그룹 중에 자식들이 보내줘서 처음으로 유럽에 나오신 충청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어요. 호텔에 하루 주무시고 다음날 버스에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할머니께서 아니 여기 인심은 왜 이리 사나워 하시면 변기물로 목욕을 하시고,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께서는 샤워기가 마이크인 줄 알고 샤워기에 대고 여기 물 좀 보내줘유, 물 좀 보내줘유 하셨다더군요. 그리고 한 번은 한 할아버지께서 틀니를 어느 호텔에 두고 오셔서, 수소문해서 한국으로 부쳤는데 그게 할아버지 보다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할아버지께서 여행지에서 객사하시고 유품이 돌아온 줄 알고 가족들이 한 바탕 난리를 친 적도 있습니다.

 

로만틱 가도가 끝나는 지점에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멜크 수도원이 있었다. 멜크 수도원은 입지 조건이 여러 모로 완벽했다. 한 쪽은 절벽이고 한쪽은 높은 구릉지대로 경치가 빼어났다. 넓은 주차장은 이곳이 관광객들의 명소인 것을 말해주고 주었다.

 

수도원은 게르만어로 두 가지 단어를 씁니다. 클로스터(kloster)와 슈티프트(stift), 클로스터는 자체 예산으로 지은 순수한 수도원을 말하고, 슈티프트는 돈많은 귀족이나 왕족이 지어서 봉헌한 수도원을 가르킵니다. 여기 멜크는 슈티프트입니다.

 

멜크 수도원은 14세기 중세수도원의 미스터리 연쇄 살인사건을 다룬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된 수도원이다. 기호학과 역사, 철학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장미의 이름은 읽다보면 에코의 엄청난 지적 스팩트럼에 압도당하게 되는데, 그만큼 읽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 4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우리는 중세 수도사들의 음모가 펼쳐지던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서 있었지만, 멜크의 건물들은 역사를 등 뒤로 한 채 고요히 말이 없었다. 수도원은 평온 그 자체였다.

 

우리는 수도원 식당에서 전통식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혼합 야채 샐러드에, 튀긴 감자와 양파링이 함께 나온 비프스테이크(Zwiebelrostbraten)를 먹었다. 후식으로는 크림 초코 케이크를 먹었다. 미리 예약해놓은 음식은 제법 빨리 나왔다. 오래 기다리는 걸 못하는 우리에겐 그곳에 손님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는 정말 총알 같은 민족입니다. 비엔나 광광을 반 나절에 마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겁니다. 일명 찍고 부대죠. 우린 대충 보면 다 압니다. 그러니 밥도 이렇게 10분이면 다 먹습니다. 보세요, 우린 돈 넣으면 똑 하고 떨어지는 자판기 커피도 느긋하게 못 기다립니다. 컵을 잡고 있습니다. 거기다 왜 빨리 안 나오나 구멍을 쳐다 보고 있습니다. 뭐 구멍을 좋아하는 국민이라 그렇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멜크 수도원도 우리는 20분 만에 다 돌아보았다.

 

수도원 마당에 내놓은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멜랑쥐 한 잔을 시켜놓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새가 한가롭게 허공을 나르고, 지구같이 둥그런 모양을 한 이국적인 나무들 사이로는 햇빛이 비쳤다. 구름을 한 번 통과한 햇빛은 뭉뚝하게 무뎌져 눈이 부시지 않았다. 눈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책을 읽었다. 아무데서나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나를 사람들은 존경의 눈으로 바라봤다. 사람들의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머시기 연구소 연구원의 신세는 여행도 맘 놓고 못하는 신세라는 걸 내 어찌 사람들에게 일일히 설명할 수 있으랴.

 

<컬처 코드>의 펼쳐진 페이지에는 마침 미국과 프랑스의 상이한 음식 코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미국인은 식사가 끝나면 배부르다고 하고 프랑스인들은 맛있었다고 말한다. 미국은 고기, 생선, 채소, , 때로는 과일과 치즈까지 한 접시에 담지만 프랑스는 음식 종류마다 다른 접시를 써서 음식 맛이 뒤섞이지 않게 한다. 미국인은 되도록 음식을 빨리 먹고, 프랑스인은 되도록 천천히 먹는다. 음식도 미국은 빨리 나오고, 프랑스는 천천히 나온다. 손님을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앞으로 나올 음식에 대해 기대를 갖게 하는 걸 프랑스 사람들은 중요시한다. 미국인들이 저녁 식사에 소비하는 시간이 6분이다
그러고보니 우리는 유럽보다는 미국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면세점에 들렀다. 아직 변변히 쇼핑 한 번 못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였지만 면세점은 승우씨의 전략적 행선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상품 설명도 밉지 않게  했다.

 

여러분 물건 살 때는 세 가지를 유념해서 사시면 좋습니다. 오래 쓸 것, 꼭 필요한 것, 그리고 선물하시는 경우, 받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 이 세가지 기준에서 제가 꼭 추천하고 싶은 물건 몇 가지가 있다면 ****** 이런 것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콧털깎기는 남편 분들을 위해서 꼭 사십시오. 헨켈, 쌍둥이칼 회사 아시죠. 거기서 나온 반자동 콧털깎기가 있는데 아주 완벽합니다. 제가 쓰고 있기 때문에 강추입니다. 남자들이 콧털을 뽑거나 깎는 데는 대략  4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그냥 손으로 잡아뽑는 방법입니다. 이건 효과도 적지만 일단 고통이 수반됩니다. 두번째, 일반 콧털 가위로 깎는 방법입니다. 잘못 자르다 살을 뱁니다. 그러면 그건 더 끔찍한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리고 품질이 좋은 가위가 아니면 자르다 찝힙니다. 세번째, 마누라 눈썹뽑는 집게나 가위로 뽑거나 깎는 방법입니다. 앞에서 말한 단점을 고스란히 갖고 있으면서 한 가지 더, 거기에 털이 묻어있으면 아내에게 뒤지게 혼납니다. 넷째, 일본산 전자동 콧털깎기로 깍는 방법입니다. 좋습니다. 잘 깎입니다. 그런데 깎다가 건전지가 떨어지면 털이 말려든 채로 건전지를 갈아주어야 합니다. 깎이다 만 털이 코를 찌릅니다. 왜 제가 쌍둥이 콧털깎기를 이렇게 목숨 걸고 소개하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뽑거나 자르는 게 아니고 자동면도기처럼 깎는 것이지만 수동이고, 워낙 쇠가 좋으니 평생 고장없이 쓸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200만원짜리 아르마니 양복 폼나게 입고도 콧털이 삐죽 나와있으면 그거 스타일 완전 구깁니다. 콧털 말끔히 제거하고 말쑥한 채로 20-30만원짜리 국산 양복 입고 나가면 그게 뽀다구 더 난다니까요. 한국 양복, 요즘 값싸고 얼마나 좋은 게 많습니까. 그런데 여자분들 참 이상해요, 한국 남자분들이 면세점에 가면 죄다 마누라 것만 사는데, 여자분들은 어찌된 게 자기 것만 삽니다. 이번 기회에 남편 분들 선물 확실하게 챙겨보세요.

 

쇼핑을 마치고 보니 거의 모든 사람 손에 31유로나 하는 콧털깎기가 들려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버스가 신호등에 걸려 섰다. 그곳 옆 노천에는 제법 규모가 큰 벼룩 시장이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한 시내 가게들만 보다가, 갖가지 물건을 모아놓고 파는 소박한 노천 시장을 만나자 창 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우리, 저기 벼룩시장에 들렀다 가요. , 저 목도리 봐라, 이쁜 데 5유로라고 써 있다.

예약해둔 식당에 시간 맞춰 가는 길이고, 버스를 지정된 곳 외에는 세울 수 없는 그곳 사정 상벼룩 시장에 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승우씨는 이번에도 재치로 그 상황을 가볍게 넘겼다.

잘 보세요. 저런 노천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 다 메이드 인 차이나입니다. 그리고 그냥 샵에서도 값이 싸다 의심되면 그거 십중팔구는 중국산입니다. 신나게 물건 사서 한국에 갔는데 선물받은 사람들이 딱지 보고 그럽니다. 에게 이거 메이드인차이나네!’.

맞아, 맞아. 정말 그래요.

사람들은 저마다 동조를 하며 외국 여행에서 메이드인차이나를 사들고 간 경험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벼룩시장을 지나쳐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중국이 차이나인지는 아십니까?

‘…’

제가 중국에 가보니가 가게 마다 물건 값이 다르더군요. 값이 다 차이가 나니까 중국에서 물건 살 땐 주의가 필요해요. 값이 차이난다, 차이나. 그래서 중국이 차이나인거죠.

 

저녁 식사는 포도나무 덩쿨이 마당을 뒤덮은 700년 전통의 고식당 바하 핸글에서 먹었다. 바하 헨글 앞에 세워둔 커다란 게시판에는 그곳에 들렀던 유명인사들이 주인장과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사진 중에는 클린턴 미국 대통령 모습도 있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모습도 있었다. 소피아 로렌, 이브 몽땅, 아랑 드롱 같은 흘러간 명배우들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는 슈베르트가 앉았다는 자리에 앉아  그곳의 주메뉴인 슐로흐트플라테 Schlochtplatte(소시지, 훈제고기, 찐 돼지고기, 샐러드, 구운 감자, )을 시큼한 야채 샐러드와 함께 먹었다.

 

밥 먹는 사이 집시풍의 밴드가 연주를 했다. 그들의 연주는 거침이 없었다. 벌떡 일어나 스텝을 밟고 싶게 만드는 신나는 가락에서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애잔한 가락까지.  그들의 차림은 소박해도 그들의 음악은 결코 소박하지 않았다. 밥을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우리는 열광하는 다른 손님들의 분위기에 함께 휩쓸렸다. 생맥주를 시키고,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사이 어느새 비엔나의 하루는 또 그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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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8.12.06 12:23:51 *.209.172.49
이 가이드 정말 노련하다. 헤헤. 재미나게 잘 여행하고 있습니다.
음악의 도시에서 음악이 아닌 다른 것을 맛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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