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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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야. 흰눈이 펄펄 나리는 오늘 같은 날 점심은 무엇을 먹는 것이 좋을꼬?
조금 전에 울린 전화는 눈이 얼마나 왔느냐, 외숙모는 잘 있느냐고, 묻는 현이의 전화였다.
눈이 쌓인 것을 보고 있으려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현이를 집으로 데리고 오던 날, 14살, 현이는 배앓이가 심한 아이처럼, 햇빛 한 번 제대로 쏘여 본 적이 없는 듯한 노란 낯빛을 하고 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리느라 동동거리던 네가 현이 그 아이를 맞아들여 키워야 했던 너의 그날의 심사는 어떠했느냐. 그 후 십 여 년 동안을 네 배로 낳은 자식이 아닌 조카라서 마음 놓고 큰 야단은 물론, 잔소리도 제대로 못했을 에미야. 그날부터 현이가 자라 대학을 갈 때까지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 이 늙은 시어미는 잘 알고 있다.
현이 외숙부인 너의 남편이나 할미인 나는 그 아이와 혈육지간이지만, 외숙모인 너와는 피 한 방울 안 섞이지 않았더냐. 부족한 살림임에도 아범이 현이 기죽일까 형편보다 과하게 주는 용돈을 눈감아 주던 에미야.
현이, 어린 그것이 겪었던 질곡의 세월,
당시 현이가 열 네 살이었을때, 에미가 스콜음료를 배달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그 아이가 삼개월동안 계부와 살며 겪었던 그 고통, 그 어렸던 현이가 하던 말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즈이 어미를 생전에 얼마나 괴롭혔으면, 꼭 커서 계부를 해치고 말 거라던 아이의 독기어린 말.
어찌 지내는 가 살피러 갔던 나와 아범이 너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아이를 무조건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는 사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이를 계부와 계속 살게 하면, 아이는 분노와 정의 굶주림 속에서 말라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이는 집으로 와서도 그 아이가 겪은 세월이 워낙이 모질어서였는지 한동안 우리에게도 마음을 쉽사리 내주지 못했다.
어린 것과 제 어미, 2살 때 친부가 죽고 5살 때부터 계부를 만나 함께 살면서 겪은 일은 아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모자가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 사는 것을 멀찌감치서 보고 있으면서 나는 한 시도 마음 편히
다리를 뻗고 잘 수가 없었다. 그 상처 때문에 현이의 마음은 더욱 꽁꽁 얼어 붙어 있었을 게다.
지금 저렇게 크게 자란 현이는 기억을 못하겠지만, 배려를 배려로 받지 못하는 그 아이를 보며 얼마나 마음이 에이었던지. 지금도 한숨이 나는구나.
에미야. 지난 번에 현이가 제 첫 책을 즈이 어미에게 바치러 갔던 날, 현이 어멈의 묘소에 너와 나란히 선 현이는 신기하게도 너와 닮아 보이더구나.
네가 아이를 마음으로 품어 산 십 년의 세월이 두 사람을 닮게 만들었던 게지.
이 주책없는 늙은이는 그 모습이 한없이 고마워 또 눈물이 나더구나.
그날 무덤가에서 돌아서는 길에 나는 현이 어멈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너는 듣지 못했더냐. '우리 현이 잘 키워주어 고맙다' 고 너에게 인사하던 말. 아마도 백 번 천 번쯤, 너와 아범에게 인사하지 않았겠느냐.
그 강팍하던 아이 마음을 사랑으로 어루만져 다 녹여, 오늘날, 그렇게 따뜻하고, 현명하고, 바른 아이로 성장시킨 것을, 어찌 고맙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현이가 장대같이 훌쩍 큰 것도, 그 아이가 첫 책을 내게 된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내가 정말로 큰 시름을 덜었던 것은 현이가 초대한 첫 가족 여행을 함께 갔을 때 그녀석이 하던 말을 듣고서였다.
구경을 끝내고, 저녁 식탁에서 현이가 하던, 너도 기억하고 있을 그말. “이제 새 아버지를 용서하기로 했어요.” 그 아이의 계부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다같이 놀라지 않았더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라는 아범의 말에 현이가 하던 말을 나는 한 마디도 잊을 수가 없구나.
그 미움이 마음속에 너무나 큰 고통으로 자라 있어서 어느 날부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고, 나날이 괴로워져 피해 보려 했지만 도망칠 수 없어 몇 년간을 끌어안고 끙끙대다가 어느날, 그 고통을 바로 보게 되었다고, 그리고 군대 가기전에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 보호자인 새 아버지의 허락을 받기 위해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새아버지의 무기력함을 보게 되었으며, 자신이 인생을 걸고 복수를 해야 할 만큼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제 그만 계부를 잊고 용서하기로 했다던 말.
현이의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찌나 안심이 되었던지, 나는 그제야 큰 시름을 놓게 되었다.
아이가 계부에 대한 미움을 키우며 사는 것이 할미인 내게는 무엇보다 큰 걱정이었다.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증오를 키우면서 유명한 사람이 되면 무얼 하고, 더욱이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야 할 큰 그릇이 그런 마음으로 무엇을 전할 수 있을지 늘 걱정이었던 것이다.
에미야. 현이가 그렇게 곧게, 밝게 제 길을 가는 것은 네 아이도 있는데 십 년 간이나 그 아이를 거두어준 너의 그 무던한 마음 덕이었다. 이 시어미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고맙고 너처럼 심성 고운 며느리를 만나서 복이 많은 늙은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마다 현이의 꿈이라는 ‘올해의 좋은 책’ 10등 안에 드는 책을 쓰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언제부터인지 군에 가 있는 건이의 건강, 그중에도 특히 너의 건강, 아범과 너의 행복을 위해서 빌게 되었다.
우리 살아 있는 동안, 아범, 어멈, 현이, 건이, 더 따습게 등을 맞대고 살자꾸나. 현이, 건이가 장가를 들어 아이들을 낳으면, 그 아이들 재롱을 보며 웃음꽃을 피우자꾸나.
현이가 해마다 우리를 데리고 가족여행을 한다는 약속을 하였는데 명년에는 에미가 어딜 가고 싶은지,
혹시 아범이 다른 곳을 가자하면, 나도 거들테니 너의 큰 아들 현이와 미리 작전을 짜거라. 맛난 것도 먹고, 새로운 것도 구경하며 현이가 준비한 주머니를 축내자꾸나. 그 즐거움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기뻐지는 구나.
오늘 같이 눈 오신 날 점심은 뜨끈한 물국수를 해 먹으면 좋겠다.
노랗게 지진 계란고명을 얹고 배추김치를 종종 썰어 무쳐 넣은 에미가 좋아하는 물국수,
가족을 위해 늘 식사를 준비하던, 너에게 오늘은 내가 물국수 한 그릇, 따끈하게 만들어 대접하고 싶구나.
오늘의 이 따사로운 가정이 있기까지 에미야. 무던히 욕 봤다. 모든 것이 고맙다.
사랑한다. 에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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