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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8일 20시 40분 등록


손바닥만한 논과 밭으로 농사를 짓던 아이의 집에는 당연하다는 듯 책이 거의 없었다. 여러 위인의 전기를 모아놓은 책이 한권,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FBI 소설이 몇 권 있을 뿐이었다. 초등생 시절, 위인전 한 권은 읽고 또 읽어 외울 정도가 되었다. FBI 소설을 집어 들었다. 역대 유명한 사건의 수사에 관한 내용이었다. 짜릿한 책이었다. 그 안에는 서부영화처럼 멋진 장면이 이어졌고 여인들이 있었다. 권총과 기관총이 곳곳에서 불을 뿜었고 수사관과 범인은 전력을 다해 싸웠다. 드물게 등장하는 여인들과의 로맨스는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들었다.

농부였던 아버지는 책을 읽지 못하게 했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숨어서 책을 읽었다. 친구 집이나 학교도서관을 찾아다녔다. 그 중에서도 소설책은 절대 읽지 못하게 했다. 사람을 망치는 나쁜 책이라고 했다. 이유는 모를 일이었다.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른다. 어쩌다 소설책을 들고 있는 걸 보면 뺏어서 집어 던지곤 했다. 초등생 시절에는 소설책을 읽을 일이 없으니 금기에 반항할 일이 별로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을 하니 세상의 모든 책들은 거의 금기에 해당하는 책들이었다. 학교에서 꼭 읽어봐야 한다고 말하는 세계의 고전 명작들은 전부 소설이었다. 읽을 곳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방 한구석에서 숨도 안 쉬고 읽었다. 재미있는 책도 있었고 재미없는 책도 있었다. 감동한 책도 있었고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책도 있었다. 이런 것이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고등학교 때 집이 이사를 가면서 방을 얻어 혼자 자취를 하게 되었다. 해방이었다. 점령군도 없는 완전한 해방이었다. 집에서 타오는 용돈의 대부분이 책을 사는 데 들어갔다. 쪽방에 책이 한권 두 권 쌓이기 시작했다. 이름을 들어본 유명 작가들의 고전 명작을 많이 읽었다. 이해가 되어도 읽었고 이해가 안 되어도 읽었다. 고전명작들을 읽으면 대단한 지식인이라도 된 듯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내용을 이해했건 못했건 남들한테 자랑할 수도 있었다.  ‘이런 책도 읽었다’는 우쭐한 기분에 더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알아나갔다. ‘이방인’의 살인도, ‘베르테르’의 슬픔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골방에서 숨은 듯 읽은 ‘전쟁과 평화’는 웅대한 서사시였고, 볕 좋은 툇마루에 앉아 순식간에 읽어 내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슬픔이면서 달콤함이기도 했다. 책이 쌓이면 도시의 헌책방에 내다 팔았다. 열권을 넘게 들고 가도 받아오는 것은 새 책 한권 값 정도에 불과했다. 소설은 그렇게 다가왔다.

대학생활을 하면서는 한국작가들의 소설책과 산문집을 탐독했다. 그 시절에 진짜 많이 읽었다. 그러다가 ‘에라, 한번 써보자’하고 달려들었다. 그리곤 바로 자빠졌다. 별로 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죽어라고 힘들고, 머리만 아프고,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한다는 말인가. 한 가지 좋은 거라곤 폼이 조금 난다는 것뿐이었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나 소설가야’ 라고 말한다는 건 말이다.
복학을 하고 취업준비를 하면서 소설책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더 이상 흥미도 없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소설책은 사무실 이곳저곳에 굴러다녔지만 한번도 집어 들지 않았다. 소설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서는 ‘소설이 뭘까’하는 생각이 들만큼 심리적으로도 거리적으로도 멀어졌다. 그 시간이 20년 이었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나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했을 때도 소설은 그 속에 없었다. 소설 비슷한 것도 없었다. 어느 날 누구에겐가 ‘차라리 소설을 써 봐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창아, 소설이나 스토리텔링은 어떠냐’ 라는 소리를 들었다.

소설은 또 그렇게 다가오는 것일까. 20년이란 시간을 아주 쉽게 건너뛰어 다시 다가오는 것일까. 생각이 많아진다. 소설이든 스토리텔링이든 다른 어느 길이든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많다. 그래서 괴롭냐고. 아니 그렇지는 않다. 즐겁지는 않지만 괴롭지도 않다.

IP *.163.6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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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12.30 19:01:55 *.5.98.153

직장생활 하면서 소설책 읽는 사람 많지 않을껄? 특히 40대가 되면...
그래서 점점 더 메말라 가는 거 아닌가 싶어.
작년 여름 휴가 때 작심하고 목민심서 5권을 가지고 갔지.
좋더라.  역시 소설을 읽어야 겠구나... 고 생각했지만, 마음만 그럴 뿐... 곧 잊어버렸지.
2008년이 다 갔구나. 내년엔 정말 좋은 소설을 좀 읽어야 겠다.
창, 좋은 놈으로 한 번 써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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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31 02:11:24 *.41.62.204

  그래서 오라버니. 소설을 기대해야 하는 거지요?
  곧 보겠네. 다들 보고 싶다. 송년회 끝나고 바쁘게 돌아 쳤는데
  왜 자꾸 다들 보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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