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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1일 18시 30분 등록


2003년 1월. 나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3년여의 컨설턴트 생활에서 매니저로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고객과의 상담을 통해 계약을 하는 일에서 유능한 컨설턴트를 채용하고 훈련시키는 역할로 변화했다. 신입팀장이 되게 되면, 가장 먼저 팀의 정신, 목표, 팀명, 년간 사업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다른 것은 무리 없이 작성했는 데, 팀명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어떤 팀명이 내 자신의 철학과 팀원들의 응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떤 단어가 함축적인 의미를 담보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정한 팀명은  ‘헝그리’로 결정했다. 주위 동료들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좀 촌스러운 이름이지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만족했다. 세일즈는 자본도 필요 없고, 특별한 사업아이템도 필요 없다. 평범한 사람이 괄목할만한 성공을 이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헝그리 정신’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정신을 기반으로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하기 위해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4월 영업소에 파란(波瀾)이 일어났다.
지점에서 5~6명의 직원이 갑작스럽게 A회사로 이직을 하게 된 것이다. 지점은 한 순간 발칵 뒤집혔다. 스카우트 제의 조건은 파격적이었으며, 전직을 하는 직원들도 일정 이상의 영업성과를 보이던 사람들이었다. 전직 과정은 치밀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나를 포함해서 주위의 동료들은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이 전직의 주된 역할을 한 주인공은 K팀장이었다. K팀장은 영업소에서 가장 출중한 영업성과를 보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팀장에서 지점장으로 승격하는 임원 인터뷰에서 탈락한 후, 타사 전직에 대한 비밀스런 작업을 수행한 것으로 보였다. 이번 스카우트로 인해 영업소의 분위기는 들썩 거렸다.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기존에 잔류하게 된 팀원들이 다른 팀으로 뿔뿔이 해체되게 되었다. 이 해체로 인해 내게도 새로운 컨설턴트 한 명이 식구로 합류하게 되었다. 오늘 글은 새롭게 팀에 합류하게된 컨설턴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수줍은 소년 같았다. 얼굴은 새하얀 우유빛깔을 띠고 있었으며, 체구는 작고 마른 편이었다. 사무실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사뿐사뿐 조용하게 움직였다. 말 수도 많지 않았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 모습이 보기 좋은 친구였다. 그가 세일즈맨의 상징인 커다란 검은색 007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눈동자에 맑은 빛을 품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여명이 채 찾아오기 전 아침을 여는 새벽의 사나이었다.

세일즈 조직에는 ‘3W’라는 문화가 있다. 일주일(Week)에 3건 이상의 보험을 계약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무실에 가면, 플랜카드의 형태로 ‘3W = Success’라는 슬로건을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만큼 3W는 세일즈맨에게 성공으로 가는 황금률로 여겨진다. 성실성과 부지런함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연속 3W를 50주 이상 달성한 상태였다. 그의 연속 3W에 대한 기록은 매주 경신되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매주 달성하는 3W가 매우 힘겹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3W를 달성하기 위해 주말까지 넥타이와 정장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늦은 일요일 저녁, 그에게서 전화가 오곤 했다.

“팀장님. 지금 막 3W를 마쳤습니다.”

상기된 목소리로 마지막 승전보를 알려오곤 했다.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안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는 치열한 사투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우린 동갑내기였지만,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OO님. 부탁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담스러우시면, 다음에 말씀 드리고요.”
“괜찮습니다. 혹시 무슨 일로?”
“다음 주 제가 처음으로 사업하시는 분과 상담이 잡혀 있는 데, 함께 가주실 수 있겠어요?”

동행(joint work)업무는 매니저의 주된 업무 중 하나였다. 당연히 승낙했다.

“그래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나가시죠.”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내심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팀을 이룬 이후, 한번도 그와 동행방문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패턴과 상담스킬이 궁금하던 차였다. 함께 동행(joint work)하기로 한 날이 왔다. 그의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앞 문이 고장이 났는지 잘 열리지 않았다. 휘발유 차였지만, 디젤차와 같은 우렁찬 소리를 냈다. 낡은 차였다.

만나기로 한 가망고객은 인천 변두리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허름한 인쇄소 대표였다. 사업가라는 이름보다는 소규모 자영업자라는 단어가 더 적절했다. 독립된 사무공간도 없어서 인쇄기가 돌아가는 굉음 속에서 상담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기계소리가 거슬렸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면담을 진행하려 하였다. 인쇄소 사장은 듣는 둥 마는 둥, 무관심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직감적으로 상담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면담과정을 지켜보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의 면담능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더듬거리는 말투와 낮은 목소리 톤 그리고 서투른 제스처는 도저히 전문가라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면담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맥이 끊겼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상담실력으로 연속 3W를 해나갔었지?’ 설득해야 하는 가망고객보다 그의 태도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접고, 가망고객의 설득작업에 동참했다. 함께 동행 방문했는 데, 그냥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무엇인가 보여줘야 했다. 시끄러운 환경 때문에 고함을 치듯 목청을 힘껏 높여야만 했다. 온 힘을 다해 임했다. 그러나 상담은 실패했다. 최소한의 재무정보도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무척 낙담했다. 그래도 함께 동행방문을 나왔는 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기대했을 텐데……상담에 도움이 안되서……”

그는 수줍은 미소를 잃지 않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우리 기분도 그런데, 저녁에 소주나 한 잔 합시다.”

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고집스런 권유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늦은 저녁, 선술집 냄새가 짙게 풍기는 곱창집에서 우리는 만났다. 둥그런 쟁반 같은 식탁이 마음에 들었다. 지글거리는 곱창을 뒤집으며, 소주잔을 건넸다.

“함께 팀을 이루게 된 이후로 개인적으로 술을 먹기는 처음인 것 같아요?”
“그러게요. 좋네요. 저는 팀장님과 함께 일하게 되서 정말 좋아요.”
“접대 멘트는 안해도 돼요. 술값은 제가 낼꺼니까.”

우리는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기분좋게 취기가 오를 즈음 그가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함께 일하게 돼서 좋다는 말, 농담 아니예요. 기억 안나세요? 제게 처음 했던 말. 처음 입사했을 때, 제가 대단히 힘들었잖아요. 매일매일이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어요. 남들은 성공이 목표였지만, 저는 살아남기 위해서 일했죠. 당시 팀장님은 잘나가는 컨설턴트였죠. 그런데 어느 날 담배를 피면서 저한텐 이렇게 이야기하셨어요. ‘내가 한동안 지켜봤는데. 당신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당신은 ‘근성’(芹誠)이 강한 것 같아요.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크게 성공할 겁니다. 믿으셔도 되요’ 이렇게 말했었는데, 기억 안나세요?”

솔직히 전혀 기억에 없었다. 미안함과 당황함이 찰나에 교차했다.

“아~ 그……그래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기억 못하실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때 그 말 한마디가 제게는 너무 큰 힘이 되었어요.”

미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급히 한 잔을 들이키고, 잔을 건넸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맞는 말을 했네요. 저는 OOO님을 볼 때마다 ‘근성’이라는 단어가 떠나질 않아요. 솔직히 오늘 동행(joint work)을 나가서 좀 놀랬어요. 좀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실수했다는 생각에 말을 흐렸다. 그러나 그는 눈치를 챘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저 상담 잘 못하죠? 제 수준이 원래 그래요.”
“절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잘못을 지적하거나 그럴려고 했던 것은 아니예요. 오늘 동행을 나가서 서로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솔직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 어떻게 연속 3W를 계속 갱신해 나갈 수 있는지 궁금증이 들더군요. OOO님을 이끄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말없이 채워져 있던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제 가족에 대해서 잘 모르시죠. 지금 아버지는 간경화 말기로 투병 중이세요. 어머니는 보행을 잘 못하는 1급 장애인이시죠. 벌써 투병하신지 10여년 넘었어요.”
“아~ 그래요. 미안해요. 잘 몰랐어요.”
“아버지는 언제 세상을 떠나실 지 모르는 분이시죠. 의사가 더이상 정상적인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저는 월급을 타면 모두 아버지께 갖다드려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아버지가 아파서 많이 미안하구나.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게 짊어지게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넌 어디서 무슨 일을 하길래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오니?’라고 말이예요. 언제까지 아버지께 제 월급을 갖다드릴 수 있을지...... 아버지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세요. 매달 월급봉투를 아버지에게 드릴 때, 제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곤 해요. 어린 아이처럼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 뭉클해져요. 아버지의 미소가 제겐 유일한 행복이죠.”

그는 잔을 비웠고,  나도 잔을 비웠다. 서로의 잔을 채웠다.

“제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말도 잘 못해요.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죠. 그러나 고객을 만나러 가기 전, 사무실 문 앞에서 꼭 이런 다짐을 해요. ‘내가 이번 판매를 하지 못하면, 내 가족은 굶어 죽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나는 팔아야 한다’라고 말이예요.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상담에 임해요. 매 순간 열심히 진지하게 하려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실패할 테니까요.”

제법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 날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익어갔다.

얼마 전 ‘낭보’가 날아왔다. 그가 연속 3W 250주라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놀랄만한 성과는 전체 컨설턴트 중에서 0.1%도 채 달성하지 못하는 위대한 기록이다.  현재 그는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전체에서 상위 5% 안에 들어가는 최고의 컨설턴트로 성장했다. 그는 성공한 지금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다. 수줍은 미소도 그대로다.

그는 뛰어난 언어구사력도, 호감 가는 외모도, 능수능란한 기재도 갖고 있지 않다. 항상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세일즈를 포함해 모든 일의 성공을 좌우하는 것은 고객에게 상품을 판매 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에 있다. 그 이유가 간절하고 절실할수록 성공이라는 단어는 다가오는 것 같다. 그를 볼 때마다 사각의 링 위에서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헝그리 복서가 생각난다. 
‘헝그리 정신!’ 모든 것을 열심히 진지하게 하는 것! 세일즈 성공의 공통분모는 멀리 있지 않다.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헝그리 정신에 관해서야. 헝그리. 배가 고프다는 뜻이지. H. U. N…… 니들 일주일째 짜장면, 컵라면만으로 이렇게 때우는 거 잘 알어. 물론 흰 쌀밥에 고깃국 먹고 싶겠지. 그것 참는 것도 일종의 훈련이야. 니들 한국 복싱이 왜 잘 나가다가 요즘 빌빌대는 줄 알아? 이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야. 옛날엔 말야. 라면만 먹고도 진짜 라면만 먹고도 챔피언 먹었어. 홍수환! 엄마 챔피언 먹었다. 이 헝그리 정신이 우리에겐 필요해. 니들 조만간 잘 나갈꺼야. 벤츠타구~ 룸싸롱 안방 드나들 듯 할 꺼야. 정말이야. 그때 지금 짜장면 먹도 시절, 컵라면 먹던 시절! 우리 산에서 뱀 잡아먹고 개구리 잡아 먹던 시절! 절대 잊어서는 안돼! 모든 걸 정말 열심히 진지하게 해야 돼. 내가 늘 강조하지만 잠자는 개한테는 결코 햇빛은 비치지 않아!”
- 영화 <넘버3> 송강호 대사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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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웅
2009.01.11 21:55:48 *.67.118.54
확 와닿네.. 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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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9.01.13 22:08:41 *.5.98.153
그래. 조~옷~타!
거암 글 읽으면서 많이 배운다.
유사한 업종에 대해서 쓰는 데, 내 글과는 왜 이리 다른건지?
나도 분발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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