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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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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1일 23시 59분 등록
 

  “야! 이게 뭐냐. 설마 했는데 너무 심한 거 아냐.”

  회사 문을 나서자마자 경관이가 입을 열었다.

  “알려 줄 수 있는 게 그게 다라잖아. 그런 거면 나도 하겠다. 그리고 시험은 또 뭐냐.”

  경관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은 채 아무 말 없이 걷던 경수도 입을 열었다.

  “이거 담임 말 듣고 왔다가 완전 똥 밟았다. 내가 이런데 와서 일하려고 기능반에 들어 간게 아니란 말이지. 아니 무슨 도면을 그린다는 회사가 사장하고 경리 달랑 둘뿐이냐고. 일은 바로 위 상사한테 배우는 거라던데. 배우기는커녕 점심도 알아서 하라는 거 보면 볼 장 다본 거다. 난 없던 일로 할 테니까 잘들 해봐라.”


  ‘그래 경수야! 너 생각 참 잘했다. 하긴 너 정도면 처음부터 이런데 오긴 아깝지. 너 오늘 내 맘에 쏙 든다. 짜식.’

  나는 속으로 경쟁자 한명이 떨어져 나간 것에 대해 쾌재를 불렀다. 안 그래도 쫄리는 판에 경수 같이 확실한 녀석이 버티고 비켜서지 않으면 내가 뽑힐 확률은 제로에 가까운 보나마나한 게임이 되고 말 것이다. 이참에 경관이도 좀 꼬셔봐야겠다.


  “이경관! 너도 그냥 경수 따라가지 그러냐. 회사 꼴 보니까 그 컴퓨터가 도면이 그려지는지도 모르겠더라. 너 정도면 이런데 오기 아깝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괜찮은 회사에서 학생 좀 추천해 달라고 추천장이 날라 온데니까. 내가 너라면 여기 안 온다.”

  너무 속 보이는 짓이지만 난 한명이라도 경쟁자를 더 없애고 싶었다.

  “야! 홍스. 내가 이참에 그만둔다고 치자. 너 아까 그 도스 명령어가 뭐하는 건 줄은 아냐. 모르긴 몰라도 화도전산 사장이 니 실력을 알면 직원을 다시 모집하는 한이 있어도 너는 뽑지 않을 꺼다. 내가 너 떨어지는 건 꼭 보고 그만 둘 테니까 잘 해봐라.”

  이놈한테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까지 악담을 하며 드리밀 줄은 몰랐다. 저녁석 덕을 보려는 내가 미친놈이지. 내 작전이란 것이 언제나 이런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경관이 놈한테는 지지 않으리라.


  정말로 다음날 경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믿기 힘들었지만 사장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가끔 심심함에 쩔은 경리 누나가 뭘 가르쳐 주는가 싶더니 그것도 첫 날 사장님이 보여준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렵사리 내 차례가 되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는 이 시간이 답답하기만 했다. 도스가 뭐에 쓰이는 건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빨리 시험이나 봤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른 애들도 같이 모를 테니 말이다.


  답답한 사흘이 갔다. 사장님 말대로 반포에 있는 학원으로 출근하는 날이 찾아왔다. 학원은 빌딩이 아닌 그냥 저층 아파트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었다. 아침이어서 그런지 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학원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같은 강사 두 명과 관리를 하는 것 같은 좀 나이가 든 것 같이 보이는 선생 한명이 있었다. 관리하는 선생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여기오고 이렇게 반갑게 맞아준 사람은 이 분이 처음이다.


  “첫 날 말했던 대로 오늘 시험을 본다. 이 시험은 여러분 들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시험이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공부한 정도면 충분히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니 시험 시간은 30분으로 하겠다. 문제를 다 푼 사람은 시험지를 나에게 제출 하도록.”

  사장님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곧바로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관리를 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시험문제가 적혀 있는 문제지를 사장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돌렸다.


  시험 문제는 모두 열 문제였다. 그 중 내가 정확히 답을 쓸 수 있었던 문제는 딱 한 문제뿐이었다. 이건 반칙이다. 최소한 가르쳐 준 대로는 풀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내 눈엔 그런 문제가 보이질 않았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4일 동안 첫날 가르쳐 준 것만 계속 한 것뿐인데 여기서 문제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다른 애들은 뭔가를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녀석들 그새 과외를 한 건지 아니면 미리 시험문제를 알고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한 문제에 달랑 답을 적고 길고 긴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이경관!”

  시험지를 걷어 사무실로 들어간 사장님이 나오자마자 경관이 이름을 불렀다.

  “네!”

  경관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100점.”

  와~~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열심히 했구나. 100점 맞기가 쉽지 않은 문제였는데.”

  사장님은 경관이 얼굴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경관이는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이 녀석 목에 깁스를 한 모양이다. 그리고 나머지 애들도 점수를 다 불러주었다. 대부분 60점 이상이다. 내 눈은 점점 바닥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홍스!”

  드디어 사장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10점.”

  사장님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다시 시험지를 살폈다.

  “아이구~~ 내 생전 이런 시험에 10점짜리를 다 보내. 오래 살고 볼일이다. 오래 살고 볼일이야.”

  사장님 보다 옆에 있던 경관이 놈이 더 밉다. 이 녀석 또 끽끽 덴다. 정말 재수 없다.


  ‘시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세상은 왜 이렇게 날 시험하려 드는 걸까?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면 정말 열심히 잘할 수 있는데 이놈의 시험이 내 발목을 잡는다. 시험을 잘 보면 일을 잘 하는 걸까?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냔 말이다.’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잠시 빌리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사장님이 뭔 말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4일 동안 컴퓨터 공부해서 시험 보느라 수고했다. 그동안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는 이제 막 창업한 회사다. 아직 우리에게 돈을 줘가며 일을 시키는 곳이 없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도면을 그려 그것을 납품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사업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나도 CAD(컴퓨터를 이용한 설계)를 할 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20년 동안 설계를 했다. 도면을 어떻게 그리는지는 안다는 것이다. CAD는 어떻게 하는지만 봤다. 내가 직접 해보지 않은 일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해주길 바란다. 아마 앞으로 3개월 정도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이 들어와도 그 일을 해낼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3개월 정도면 우리가 그 일을 해낼 능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동안 아무 말이 없던 사장님의 말씀이 길어졌다. 나는 더 이상 내 시험성적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아 좋았다. 사장님은 이제 마무리를 지으려는지 시험지를 다시 추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험은 시험일뿐이다. 3명에 대한 선발은 3개월 후로 하겠다. 그동안은 지금처럼 내가 여러분에게 해줄 것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부다. 실습비는 물론 점심식사도 제공되지 않는다. 여러분들 손으로 컴퓨터를 이용해서 도면을 그릴 수 있고 그것으로 회사가 돈을 벌 수 있을 때 그때부터 월급을 줄 수 있다. 3개월 내에 그러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 여기서는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은 내일 동교동 사무실로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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