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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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1월 23일)부터 아이의 실기시험을 위해 뛰었습니다. 오늘이 세 번째 시험입니다. 가나다 군 중에 ‘다’ 군의 대학입니다. 이 대학은 연극영화과가 아니고 방송연예과입니다. 다른 학교에 비해 방송 연예인을 양성하는데 차별을 두고 외모가 받쳐주는 아이들을 뽑는 학교입니다. 우리 아이 연기를 지도해준 선생은 우리 아이 외모를 고려해 이 학교에 시험을 쳐두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사실 그 애가 마음을 두고 준비한 대학은 두번째 ‘나’ 군의 **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학은 성적 비율이 실기 비율 못지않게 높아서, 성적이 좋지 않은 우리 아이는 실기로 승부를 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앞서 치른 시험 결과 발표가 전날 있었지만 아이는 굳이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원하면 더 많이 긴장하고, 또 실수할 가능성이 높은 법인데 이전 시험 결과가 당일 시험에 영향을 줄까 염려한 탓입니다. 더구나 그 애에게 배정된 시간은
그날(1월 17일) 우리는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기흥에 있는 **대 국제캠퍼스로 향했습니다. 그리스 신전의 건축양식을 본 딴 정문은 웅장하고 멋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정문을 통과해 캠퍼스로 들어서자 신기하게도 그곳에만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곳은 도시와 격리된 특별한 공간 같았습니다. 드넓은 캠퍼스를 통과해 안쪽 깊숙히 자리한 예술디자인 대학을 향해 달리는 우리 눈 앞에 벌거벗은 나목들의 숲이 펼쳐졌습니다. 마침 붉은 아침 해가 그 숲을 통과해 하늘로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엄마, 왠지 이 학교가 내 학교 같이 마음이 편해.’
‘그러게, 엄마도. 그래 이 학교는 네 학교가 맞아. 그렇게 믿고 편안하게 연기해.’
‘내가 이 학교 학생이 될 수 있을까?’
‘그럼.’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 애는 면접 예상질문도 제대로 연습하지 못해 불안해했습니다. 영어 질문지까지 만들어 왔지만,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생각하느라 그앤 정신이 없었습니다. 대기실에서 아이 손을 잡고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게 도울 생각이었으나 시험장 입구에서 저는 보기 좋게 출입 제지를 당했습니다. 학부모 대기실은 다른 건물에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떨리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러니 당황하지 말고 자신 있게 해.’
문자를 보냈으나 이미 그 애의 핸드폰은 꺼져있었습니다. 이미 내 손을 떠났으니 그 애의 일은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이 갑자기 편안해졌습니다. 그러자 배가 고파졌습니다. 무작정 기다리며 애태우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학교 식당을 찾아 요기를 한 후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풍경이 좋은 쪽으로 돌려놓고 차 안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두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 일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시험을 끝내고 나온 아이의 표정이 생각 보다 밝았습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많아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외모가 눈에 띄는 애들은 많아 보이지 않던데...’
외모에 자신감을 가진 아이는 연기도 맘껏 잘 한 것 같았습니다. 특히 제시대사(즉석에서 받은 대사를 10분 정도 연습한 다음 연기하는 것)를 재치있게 잘 한 것 같았습니다. 짧은 대사 속에 한 사람의 감정을 다양하게 보여주기 위해 그애는 신(scene)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짰다고 했습니다. 특기로 준비한 노래도 중간에 끊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면접 질문도 여러 가지를 물었다고 하더군요. 상황만으로 보건대 시험을 썩 잘 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원한 3백 여명 중에 11명만을 뽑는 정시 시험입니다.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이는 시험이 끝나고 다시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이는 대학로에 있는 세번째 대학의 예술센터에서 마지막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 애가 얇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정신이 나간 햄릿의 오필리어를 연기하기엔 날씨가 매우 추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목이 콱 잠겨 있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목 관리를 했건만, 어제 저녁 갑자기 마이너스로 떨어진 기온 탓에 그 애는 목감기에 걸려버렸습니다.
‘엄마, 망했다. 나, 결국 높이 올라가는 부분에서 목소리가 갈라지고 장난도 아니었어. 고음 때문에 그 노래를 선택한 건데..어쩌면 좋지?’
‘다른 건?’
‘연기는 평소 실력대로 잘 했고, 상황연기도 그런대로 특색있게 했어. 그런데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어서 좀 의식한 것 같고, 노래를 망쳐서 그게 걱정이야.’
안정권이라 생각한 이 대학마저 안되면? 얕잡아 보았던 첫 대학 시험에도 떨어졌는데..우리는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최악의 시나리오를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아, 어떻게 2년을 지나왔는데, 안 돼, 재수는 절대 안돼. 내 일로도 벅찬데, 이 아이가 한 해 다시 고전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란 말야.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달겨드는 불길한 생각들을 물리치려 애썼습니다.
‘엄마, 영화나 보러 가자.’
‘그래.’
영화관으로 가던 길에 그 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대가 오늘 발표한다고? 30일 날 발표하기로 되어있었잖아?’
전화를 끊고 그 애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영화관 지하 주차장에 차를 막 세우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냥 집에 가자.’
그 애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집까지 오는 길은 차가 많이 막혔습니다. 벌써 고속도로에는 구정 연휴의 교통체증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러나 그 애나 나나 합격자 발표 창만 열어놓고 컴퓨터 앞에 망연자실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 나 못하겠어.’
‘그럼 엄마가 할 게.’
나 역시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순간에 당락이 결정되는 이 무자비한 운명의 시간을 어쩌란 말인가. 희망과 불안이 교차했습니다. 심장이 안으로 잦아들었습니다. 내가 이런데 우리 아이 심정은 오죽할까.
내가 숫자를 쳐 넣으려는 순간, 그 애가 내 팔을 강하게 저지했습니다.
‘엄마, 아직, 나 준비가 안됐어.’
‘빨리 끝내자. 나 못 견디겠다.’
참다 못해 나는 내 방으로 건너왔습니다. 내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바깥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아직 하지마. 제발…’
그러나 더 이상 그런 긴장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피 말리는 순간을 어찌 더 유예한단 말인가. 안되면 마지막으로 오늘 본 시험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먼저 아이의 이름을 치고, 주민번호를 치고, 마지막으로 수험번호를 쳤습니다. 아, 이제 ‘확인’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이 한 순간의 클릭이 우리 아이의 미래를 가름하다니. 결과를 아직 보지 않았는데 벌써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 아,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입술을 꼭 깨물고 버튼을 눌렀습니다.
순간 내 눈에 ‘합격’이란 글자가 클로즈업되어 들어오고 내 눈물샘이 터졌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왜 나는 짓궂은 생각을 했을까요.
‘엄마 왜 그래, 확인했어? 확인한 거야?’
거실로 나온 나를 바라보던 아이가 불안한 눈으로 내 기색을 살피며 물었습니다.
‘흑흑, ** 미안해. 이 일을 어쩌니?’
‘엄마 나 안됐구나. 안됐구나….’
벌써 그 애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습니다. 나는 그 애 앞으로 다가가 그 애를 포옹하며 다시 한 번 연기를 했습니다.
‘** 어쩌니. 어쩜 좋니. 흑흑 (이때 반전 모드로) 어쩜 좋니, 네가 합격이야!! 합격이라고!!”
‘정말? 아니지, 엄마 사실을 말해봐, 아니지?’
무얼 믿어야할지 종잡을 수 없어 하는 그 애의 손을 끌고 내 방으로 갔습니다.
‘여기 보라고! 네 이름과, ‘합격’ 이라는 글자 안 보여?’
‘어, 정말이네, 그런데 이거 가짜 아니지. 엄마 사진 찍어놔, 내일 잘못된 거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혹시 합격 자 앞에 ‘불’자라고 써있는 건 아니야?’
‘네가 정말 합격을 했구나. 축하해. 정말 좋다. 너 보다 엄마가 더 좋아.’
‘엉엉, 엉엉. 엄마, 나에게 닥친 이 행운이 겁나. 나 더 열심히 해야할까봐.’
우리 두 모녀는 얼싸안고 온 방안과 거실을 뛰어다녔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이 믿을 수 없는 행운에 감격하느라 우리는 잠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우리집 강아지 '동해'는 우리 옆을 쫓아다니며 컹컹 짖어댔습니다.
저녁 내내 나는 온라인 주소록 창을 열어 놓고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돌렸습니다. 이렇게 기쁜 순간도 있다니. 맘껏 축하를 받고 싶었습니다. 자식 일이라서 그런지 내게서 ‘겸손’이라는 미덕은 잠시 거세되고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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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면을 빌어 저에게 축하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저의 집은 줄줄이 사탕입니다. 큰 애와 둘째에 이어 올해엔 셋째가 고 3이 됩니다. 미술대학을 지망하는 셋째 밑에는 또 넷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제 제 어깨가 곧게 펴질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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