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지희
  • 조회 수 3698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09년 3월 4일 08시 24분 등록

영수야. 아까 졸업식장에 모인 친척들을 보고 놀라던 네 얼굴이 떠오르는구나. 버스를 두 대 대절 하려다 네 엄마의 만류로 한 대만 대절 했지만 아버지 마음 같아서는 시골의 모든 친척들에게 박사모를 쓴 너를 자랑하고 싶었다.

바로 그제 밤에도 네가 진열장에 전시 되어 있는 비싼 술을 은사님들께 가져다 드렸다고 야단 쳤던 아버지가 한 일 이었기에 너의 놀라움이 더 컸으리라 짐작한다.

그 밤에 마흔이 넘도록 한 번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던 네가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깟 술 좀 가져가는 것이 뭐 그렇게 대수냐고 맞고함을 쳤을 때, 그만 아버지는 눈앞이 노래지면서 다리가 벌벌 떨리더구나. 황당한 마음에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새벽녘에 네가 흐느껴 울며 네 엄마에게 하던 말. ‘늦게 공부를 시작해 학석사, 박사공부를 하는 십 여 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엄마아빠가 학비 한 번 제대로 내 준적이 없다, 부모가 없는 것 같아 너무 외로워 죽고 싶었다. ’ 그동안 맺혔던 속내를 털어 놓던 그 말들은 아버지에게 그대로 비수가 되어 꽂혔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네가 십 여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이며, 학비를 댈 때도 아버지는 한 푼도 보태 주지 않았다. 박봉의 나는 너희 4남매를 가르치는 것도 버거웠다.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사내아이이기를 바랬던, 네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무직에 들어가 경제적 부담을 덜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 년쯤 회사에 잘 다니던 네가 나와 의논도 없이 덜컥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큰 낭패감을 맛봤다.
아버지 상식으로 여자인 너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쳤으면 나의 의무는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네 밑으로도 셋이나 되는 동생들과 함께 너를 대학까지 가르치겠느냐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여자는 음전하게 있다가 시집이나 잘 가면 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내가 보아온 세상이었다.

내가 심하게 반대를 하자 너는 대차게 선언을 했다. ‘제 학비는 제가 벌어 해결 할게요.’ 너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말이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꼿꼿이 그 자리에 서서 매를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괘씸해 너를 부러 멀리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얘야. 네가 우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아버지가 얼마나 너를 외롭게 한 것인지 짐작이 되더구나. 날이 새도록 마당에 앉아 너에 대하여, 너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았다.

너는 논문이 통과하기도 전에 타국에서 교환교수 자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2년 동안 은퇴한 우리 부부의 생활을 위해 애써 일한 봉급에서 용돈을 송금했다. 그리고 방학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며, 가족들의 크고 작은 선물을 챙겼다. 그런 너를 바라보면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네가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편, 아버지는 마땅히 내가 결혼 전부터 그래 온 것처럼 큰 딸인 너도 나처럼 가족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훈련되어 살아 온 사람이다. 전쟁을 겪으며, 물자가 귀해 욕구를 억누르고, 극히 최소한으로 아껴 쓰며 살아야만 했던, 불충분 시대에서 살아남은 자의 변명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오늘의 우리가족이 이만한 안정을 누리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같이 기쁜 날, 말이 길었구나. 요즘 세상에 아무리 박사가 넘친다 해도 우리 집안에 박사가 탄생한 것은 경사중의 경사이다. 본가에서 네 이름 석 자 쓴 현수막을 걸었다는구나. 오늘 오신 분들께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그길로 사당에 내려가 조상님들께 고하자꾸나.
 칠십 평생 아버지에게 남은 소망이 있다면, 네가 좋은 짝 만나 혼인 하는 것이다. 형제들은 다 짝을 이뤘는데 공부하느라 혼기를 놓친 네가 성혼 하면, 이제 아무 여한이 없겠다.

 그동안 다정하게 말해 주지 못해, 적은 용돈이라도 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버지 마음에는 네게 해 주고 싶었던 한마디 말이 있었는데 오늘은 꼭 그 말을 해주고 싶다. 
아버지로서는 그동안 최선을 다해 너를 사랑한 것이라는 것,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최선이 너의 마음에 닿지 못할 미흡한 것이어서 미안했다고.
  강산도 변한다는 십여 년동안 일성을 이룬  단단한 마음을 가진 우리 큰 딸.   그동안 아버지가 서운 하게 한 것 다 내려놓고 이제 열심히 진짜 사람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되거라.
 장한 우리 딸 영수야. 이제부터라도 네가 늦었다고 하지 않는다면, 네가 바라는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련다. 

사랑한다. 우리딸.

IP *.205.221.75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12 [42] 빗속을 걷는 이유 [2] 2009.03.15 3676
1011 [41] 부모는 봉 [1] 2009.03.15 3384
1010 [36]화성인 구라 변경연 탐험기 (1) [3] 구라현정 2009.03.14 3562
1009 (43)인터뷰 7: Scene Playbill 사장 정연주 - 내 인생에 핑계는 없다 file [3] 소은 2009.03.10 5157
1008 (42)연구원 수료식날 사부님께 드리는 편지 [2] 소은 2009.03.10 3230
1007 [42] 들이대기 2 현웅 2009.03.06 3300
» [40] 시련 16. 장한 우리딸 [4] 지희 2009.03.04 3698
1005 [35]분노가 그녀를 어떻게 만들었나? file 구라현정 2009.03.03 12261
1004 [40] 어느 한 직장인의 단상(斷想) [4] 양재우 2009.03.02 3522
1003 [39]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최코치 2009.03.01 6500
1002 [40] 생존 혹은 비굴 2009.03.01 3177
1001 (41)인터뷰6:정낙용세무사-무대포로 하면 길이 보인다 소은 2009.02.24 8072
1000 [42] 이상한 반 아이들 - 서문 [7] 현웅 2009.02.18 3386
999 [37] 기본에 충실한 삶 정산 2009.02.17 3549
998 (40)인터뷰5:양길용편-앞으로 나가는 힘은 내가 이룬 성취에서 나온다 [1] [2] 소은 2009.02.17 5283
997 미리 떠나는...2009년 봄날 단편 file [1] 이은미 2009.02.17 7462
996 [41] 들이대기 현웅 2009.02.16 3318
995 [39]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4] [16] 거암 2009.02.16 15051
994 [38] 직업은 내 안에 있다. 최코치 2009.02.15 3516
993 [39] 사랑과 전쟁 그리고… 이별 2009.02.15 3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