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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5일 22시 13분 등록


알람소리에 튕기듯 일어나 거실로 나온다. 아침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밖은 아직 어둡다. 숙취 때문인지 몸이 무겁다. 어젯밤은 주량에 맞지 않게 술을 마시고 늦게야 집으로 들어왔다. 억지로 마셔야 하는 술은 항상 그렇다. 즐거울 수가 없고 즐겁지 않으니 몸은 더 힘들다. 세면장으로 들어가 머리에다 물을 쏟아 부으며 몰려오는 잠을 털어낸다. 습관적으로 베란다로 나가 간단한 체조를 한다. 하루를 준비하는 몸짓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도 어두운 공간을 비가 적신다. 춘삼월을 적시는 봄비는 어둠을 타고 소리 없이 밤을 장식한다. 추적추적. 말 그대로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빗줄기는 대지를 적시는데 그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 온몸을 적신다. 비는 밖에서 뿌리는데 나는 베란다에서 비에 젖는다.

주차장에서 나오는 차들의 불빛이 빗줄기를 헤집는다. 빗속을 가르고 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차들은 항상 그래왔다는 듯 비가 오는 어둠 속으로 하나씩 사라진다. 개별적인 그들의 삶이, 하루가 열리는 것이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고 내일은 또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게 일상이고 그게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른 새벽에 차를 몰고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차 한대가 나올 때마다 불빛이 길게 어둠을 가르고, 그 불빛 속에는 빗줄기가 가득히 채워져 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차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봄비가 내린다는 게, 어둠 속에 비가 내린다는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씩씩하게 질주한다. 차 속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그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지 몰라도, 베란다에서 비에 젖고 있는 나는 그렇지가 않다. 출근하기가 싫은 것이다. 이렇게 봄비가 오는데 출근을 하고 일상 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니 그렇게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다.

그때도 봄의 어느 날이었다. 봄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에도, 버스가 달리는 길가에도, 사람들의 몸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푸르게 퍼진 하늘에도, 캠퍼스의 잔디밭 위에도 봄이 온통 가득했었다. 버스를 내려 학교를 들어서다 말고 갑자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봄은 달아올랐는데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않아 있어야 한다니 억울한 일이 아닌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버스를 타고 산으로 갔다. 등산로 입구 구덩이에 가방을 던져놓고 산을 올랐다. 산에는 거리보다 더 많은 봄이 내려 앉아 있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봄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봄을 만끽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날씨만 좋으면 그런 증세는 병처럼 도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가 있었고 그 진리는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진리가 현현한 모습은 학점이라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날 창 넓은 집에서 빗줄기를 바라보며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선택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자유일 것이다. 달아오른 봄에 취해서 가방을 내던진 젊은 그날처럼, 비에 젖어서 가방을 내던지고 차를 몰아 비를 맞으러 갈수 있다면 분명 자유의 한 모습일 것이다. 젊은 그날은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했고 현실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한갓 꿈일 뿐이다. 이미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들처럼 우산을 쓰고 비를 맞지 않으려 온갖 몸짓을 하면서 출근을 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언제부터인가 자유는 잊혀진 단어였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 정도의 자유를 즐기고 살았다. 그렇기에 굳이 자유를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언제부터인가 자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자유롭고 싶었다. 진정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는 그때부터 꿈이 되었다. 세상에 꿈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겠는가마는 꿈으로만 남겨두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 달콤한 맛은 다시 몸을 헤집고 들어와 유혹했다. 유혹은 강하고 집요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꿈은 현실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 자유를 선택하면 이번엔 세상의 어떤 진리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어둠을 바라보며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우산을 챙겨 나선다. 베란다에서 기분 좋게 온몸을 적시던 빗줄기는 사정없이 옷을 적시며 힘들게 한다. 이게 꿈과 현실의 차이를 말해주는 바로미터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봄비인 것이다. 퇴근할 때까지 비가 내린다면 그때는 조금이나마 창밖으로 비를 내다볼 수 있을지 모른다. 현실 속에서 누리는 작은 자유다. 여유 있게 앉아서 비를 내다보며 차를 한잔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비겁한 절충이겠지만 그 절충이 현실의 모습이다. 비가 그때까지 내리지 않고 그친다면 그것 또한 현실이다.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이 없으니 맞닥뜨린 현실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꿈은 아직 꿈속에 남아있다. 선택의 자유가 없어 빗속을 걷는다.

IP *.163.6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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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9.03.16 09:06:12 *.254.7.115
이렇게 비가 내리면 빗줄기는 대지를 적시는데 그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 온몸을 적신다. 비는 밖에서 뿌리는데 나는 베란다에서 비에 젖는다.

산에는 거리보다 더 많은 봄이 내려 앉아 있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봄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이 표현이 참 좋네요.
살아보니<!> 절충할 수 있는 능력도 커다란 능력이던걸요.
오늘은 절충하고,
단 절충의 이유와 목표가
내일의 꿈을 위해서라면
봄비 오는 날의 출근도 뭐 그런대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지 않을지요.
덕분에 깔끔한 글  한 편 얻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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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9.03.16 10:21:13 *.240.107.140
비는 밖에서 뿌리는데 나는 베란다에서 비에 젖는다.

아 이런 표현은 아무나 얻는 게 아닌데...

창, 이 글 너무 좋다.
창의 현실을 투명한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기분...
그런데 있지.
자기는 늘 너무 분석하고 이미 생각 속에서 결론을 다 내려버리는 거 있지.
그런 사람에게 꿈은 늘 꿈일 뿐이야.
그래서 서글픈 것이고.
그대가 절충한 현실이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대는 그게 안되잖아..
궁시렁 궁시렁...
그러나 그것 뿐이면 안되잖아.
그대가 핑계로 대고 있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누구는 꿈을 현실로 이루기도 한다구...
그곳이 좋으면 그냥 살고,
싫으면 한 발자국이라도 걸음을 떼라고!! 
그래 내 생각에는 이런 글을 쓰는 것, 그것이 꾸준해서 한 권의 책이 된다면 
그것도 한 걸음이 될 거 같아.
현실을 뒤엎을 위인이 아니니 이렇게 글을 계속 쓰면 된다구...
자긴 누구보다 성실하고, 여태 글 한 편도 빼먹지 않은 위인이잖아.

그대를 향해 이렇게 박수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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