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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1일 09시 35분 등록
삶의 전쟁터, 동대문 원단시장


<난중일기>는 구국의 영웅, 명장 이순신이 진중에서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며, 그날그날 일어났던 일이며, 사건에 대한 느낌, 자신의 심정 등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그 속에는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전란 전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사료인 역사의 기록, 그의 사상, 생애, 활동 등과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인간 이순신의 여러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있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이 긴장되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었을 텐데,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텐데도, 그는 한창 배를 타고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던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일기 속에 꼼꼼하면서도 간결하게 담아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저에게도 매일매일이 전쟁을 치르는 것만 같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렇게 긴장되고 힘들었던 추억을 기록했던 시절이 있었음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제가 디자이너라는 꼬리표를 달고 동대문 시장을 휩쓸고 다니던 신입사원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입사할 무렵, 업계 1세대로 불리우며 수많은 기록과 카리스마의 진가를 보여주었던, 당시 육십을 훨씬 넘기셨던 것으로 기억되는 박고문님이 디자인실을 총괄하게 되었고, 신입사원인 저와 동기들은 3개월 동안 회사가 아닌, 평창동 박고문님 댁으로 출근하며 디자인 업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박고문님 댁으로 출근한 첫날, 박고문님은 저와 동기들에게 앞으로 한달 간은 동대문 원단시장에서 보낼 것을 명하셨습니다. 오전 10시쯤 동대문 종합시장에 도착해 뿔뿔이 흩어져 시장을 직접 돌며 시장 경향을 익히고, 원단이나 부자재 등의 재료를 살피고, 스와치를 구해오고, 그때그때 주어지는 과제가 있으면 그 디자인에 적합한 천이나 부자재를 구매해 직접 재단하고 샘플을 제작해 평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동대문 원단시장은 미로 같아서 꼬불꼬불 돌다보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헤매는 것은 물론, 왔던 길을 되돌아 오기 일쑤고, 비좁은 원단가게 사이를 몇 시간 동안 누비고 다니다 보면 목이 칼칼하고, 입은 옷에는 도대체 어디에서 딸려왔는지 모르는 실밥과 원단에서 풀린 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고, 머리 위에는 원단 먼지 부스러기가 달라붙어 있기 일쑤였습니다.


현재의 동대문 종합시장은 그동안 시설이 많이 개선되었고, 지금은 잘 보이는 1층 초입에 안내부스와 의자를 갖춘 만남의 장소라는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제가 신입이었던 1996년 당시에는 의자는 커녕 어디 한 군데 마땅히 앉을 공간이 없었습니다. 1층에 있는 은행에 볼일을 보는 척 하고는 잠시 쉬었다 오거나, 거기에도 자리가 없으면 참다참다 못해 디자이너의 가오도 잊은 채, 창피한 것도 무릅쓰고 계단 한 구석에 잠시 쭈구려 앉아 있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리저리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눈치를 보며 일어서야 했고, 잠시라도 앉아 있을 공간은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야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곳에서 무려 7, 8시간을 보내야 했으니 사람도 너무 많고, 통로는 비좁아서 둘 이상 다니기도 힘든 공간인 동대문 원단시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의 특성상, 시장에서의 원단 사입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원단이나 부자재는 전문 컨버터에게 의뢰해 회사로 가져오게 하면 되는 것을, 굳이 시장에 보내 고생하게 한다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동대문 원단시장은 발품밖에는 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제대로 된 원단이나 부자재, 소재를 구하려면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아무리 볼품없는 원단이 진열돼 있는 곳이라도 놓치지 않고 샅샅이 살펴봐야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자주 부딪히는 것은 물론, 수시로 발에 밟히는 것은 기본이고, 원단을 어깨에 매고 이리저리 옮기며 실어나르는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으려면 재빠르게 행동해야 하는 요령도 갖추어야 했으며, 시도때도 없이 롤 원단을 들이대며 들려오는 ‘비켜요’하는 소리에도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그 비좁은 통로 사이에서 두리번두리번하다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등이 밀리며 타박을 받기 십상이었고, 원단 대포에 언제 머리가 받힐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후 5시쯤 동대문 원단 시장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나면 6시쯤 다시 평창동으로 돌아와 그날그날 받은 업체 명함이며, 수집한 자료와 원단 스와치, 샘플, 느낀점 등을 보고하고, 업무일지를 기록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동대문에 처음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역시 처음 동대문 원단시장에 발을 디딜 당시에는 이른바 초짜티라는 초짜티는 다 내고 다녔습니다. 처음부터 상사나 선배들과 함께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친절해 보이지 않는 상인들의 표정에 괜히 주눅이 들어 당당히 회사 명함을 내밀면 될 것을 쭈볏쭈볏 제대로 물어보지도, 원단 스와치를 요구하지도 못했고, 괜한 긴장 속에 얼굴은 상기되고 뭐가 그리 주눅이 들고 용기가 없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만 나올뿐입니다. 어느 층에 어떤 종류의 원단이 있는지, 어떤 종류의 원단은 어느 곳이 좋은지, 시장 사입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온 몸으로 경험하며 직접 발품을 팔아 얻어야만 했습니다.


현재는 동대문 원단시장이 저의 주무대가 아니지만, 제게는 그 때의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지금까지 제가 일을 해오고 있는데 있어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역시 배울때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며 직접 몸으로 부딪혀 얻어내는 현장학습의 경험도 중요함을 일깨워주신 박고문님의 깊은 뜻도 알게 되었습니다.


동대문 원단시장에는 백화점이나 유명 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가 있습니다. 시장에 처음 나온 듯한 초짜티가 물씬 나는 애송이 신입사원의 모습도 보이고, 디자인에 살고 디자인에 죽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있고, 그 무거운 원단을 어깨 한 쪽에, 또는 지게에 가득 싣고 좁은 통로 사이를 오가며 혹한의 겨울에도 땀냄새 풍기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으며, 멋진 헬맷과 제복을 갖추어 입고 이어폰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는 퀵써비스 아저씨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곳이 바로 전쟁터이지, 전쟁터가 따로 있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많습니다. 이렇듯 동대문 원단시장은 삶의 전쟁터이자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곳입니다.


동대문 원단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합니다. 평범해 보이는 원단이나 부자재들도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치면 특별한 작품이 되고, 평범함 속에서 비범을 찾아내는,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는, 혹은 질서 속에서 무질서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줄 재료의 보물창고인 동시에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주기도 합니다. 제게 있어 동대문 원단시장은 땀내나는 인생을 배우며, 삶을 공부하는 최적의 장소이자 훌륭한 학습공간입니다.   


제 명함집에는 그때 모은 업체의 명함이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몇몇 곳은 세월이 지나 사라지기도 하고 자리를 옮긴 곳도 있으나 대부분은 아직도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어 지금까지도  제가 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몇년 몇월 몇일 언제 방문해 받은 명함이며 어떤 원단을 취급하는 곳인지, 야드당 단가는 얼마인지, 주문하면 얼마나 걸리는지 등 크기가 얼마 되지도 않는 조그만 사각 종이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그때의 기록이 담긴 명함집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마치 추억이 담긴 일기를 보고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사실 동대문 원단시장은 저도 10년이 넘게 들르는 곳이지만 아직도 지리를 다 꿰고 있지 못하고, 여럿이 몰려 다니며 이곳저곳 다니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시장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함께 동행하거나 사전에 필요한 시장조사를 하고 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누가 같이 가자고 부탁하지 않는 한, 혼자 가는 편입니다. 시장 동향을 살피기 위해, 원단 소재와 부자재를 보러 가기 위해, 무언가를 만지고 만들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 일에서 의욕이 없어졌다고 느낄 때 등등 이러저러한 다양한 이유로 동대문 원단시장에 갑니다. 걷기 편한 복장으로 갖춰 입고, 시간을 좀 넉넉히 잡고, 저의 눈썰미를 여기저기에 심으며, 풍부한 인내심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이렇게 하루의 반나절을 투자하면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하는 그 곳에서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전에 없던 기를 충전하고 삶의 에너지를 얻어 돌아옵니다. 동대문 원단시장은 이처럼 삶의 현장인 동시에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입니다. 제 발품의 기록을 탄생시키는 공간입니다. 앞으로도 제 삶에 없어서는 안될, 제 일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소중하고 귀한 공간으로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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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2:17:31 *.204.150.153
혜향이 네가 어떤 모습으로 동대문 시장을 누볐을지 눈에 선하다..
야무지고 다부지고 그러면서도 따듯하고.
지금부턴 너의 디자인 작품들과 글과 함께 할 수 있어 무척이나 기쁘다...^^

이번주는 리뷰도 탁월하고.
글은 레이스때보다 그새 얼마나 좋아졌는지. 계속해서 홧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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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2 07:57:14 *.246.196.63
동대문이 요새 참 많이 바뀌었죠.
제가 사는 동네도 그곳에서 멀지 않아 고등학교때랑 대학교때 동대문에 쇼핑하러도 많이 다녔어요^^
밀리오레나 AMPM 등등 젊은세대를 겨냥한 쇼핑몰이 대로에 그득하지만 아직도 그 뒷편에는 제일평화니 동평화니 동대문 특유의 상가들이 빽빽히 있죠.
쇼핑 후 에누리한 돈으로 새벽녁에 포장마차에서 간식사먹던 맛도 쏠쏠했는데 ㅋ
글을 읽다 보니 아련하게 그때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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