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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일 10시 01분 등록


나의 본관은 풍산이며, 파는 참궁공파로 시조 류절 할아버지의 24대손이다. 풍산 류가 집성촌인 하회마을에 가면 아제, 아지매라고 부르는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순신과 절친하게 지냈던 류성룡 할아버지를 기리는 기념관과 그가 살았던 충효당과 그의 형이 살았던 양진당이 마주보며 잘 보존되어 있다. 집안 항렬로 따지면 어찌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류성룡 할아버지 집안과 우리집안은 친척이다.

 

나는 어렸을 때 하회마을이 그렇게 유명한 곳이지, 서애 류성룡 할아버지가 어떻게 훌륭하신 분이지 몰랐다. 다만 류성룡 할아버지는 동시에 3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만 듣고 자랐다. 손으로 글을 쓰면서 귀로는 또 다른 보고를 들었고 동시에 말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동시에 3가지를 한꺼번에 한다는 사실만으로 놀라워했고 영의정이라고 하면 신하로써 가장 높은 자리인데 우리 집안 조상 중에 영의정을 한 훌륭한 분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가슴 뿌듯해 했다.

 

안동을 가면 늘 들르는 곳이지만 작년 봄 시축제 답사여행에도 아제네 집에 들러 대청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고 초가 끝으로 모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마을을 둘러 보았었다. 그때도 자세한 역사적 배경보다는 유명한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만 다녔었다. 난중일기를 읽으면서 순신이 의지하고 마음을 편히 편지를 주고 받고 꿈속에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하회마을과 류성룡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류성룡 할아버지는 본관 풍산(豊山). 자 이현(而見). 호 서애(西厓). 시호 문충(文忠)으로 1542년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태몽은 한 마리의 이무기가 나타나 부인, 내 꼬리를 한 번만 쳐 주시오. 그러면 나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를 수 있소.’ 하여 꼬리를 치자 찬란한 빛을 발하며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그 꿈을 따 성룡이라 이를 지었으며 그는 어려서부터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면서도 글공부에 열중했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한 후 21살 되던 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여 놓았다.

 

임진왜란 발발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다가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때 이순신을 수군 대장으로 등용시켜 바다를 지키게 하고 권율 장군을 발탁하여 행주산성을 지키게 하였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하였으며,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해서는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 되었으나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와 조용히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선조 40년에 세상을 떠났다.


    
안동답사(080903) 138.jpg    옥연정사.jpg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옥연정사 경내>

 

하회마을 강 건너 부용대 옆 한적한 곳에 자리한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할아버지가 노후에 조용히 지내면서 학문을 닦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던 가운데, 산승 탄홍스님이 자청하여 10년 동안 시주를 거두어 선조19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게 후세를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서애 할아버지는 <징비록>서문에 이 책을 쓰게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 일을 징계해서 뒷날의 근심이 있을까 조심하노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나처럼 못난 사람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때 국가의 중책을 맡았으나, 위태로운 형편을 바로 잡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했다. 그 죄는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처지인데 오히려 시골 밭두렁에 묻혀 구차스럽게 목숨을 이어 가고 있으니, 이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아니겠는가. 이미 나는 이렇게 시골 구석에 묻혀 마음 편히 하고 있으나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은 달랠 길이 없어, 이글을 지어 전쟁 중에 이 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에 보답하지 못한 죄를 씻어 볼까 하는 바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이해하는데 <난중일기>만큼이나 중요한 책이다. 임진왜란시 중요한 직책에 있었던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 삼아 후일 닥칠지도 모를 우환에 대해 경계토록 하기 위해 자기 반성적 글로 잘못과 잘된 점을 진솔하게 쓴 글이다. <난중일기>가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서의 상황 이야기라면 <징비록>이순신 <난중일기>을 쓰던 시기의 조정의 상황과 명나라, 왜의 외교관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난중일기>를 읽고 <징비록>을 읽으면 그 때의 상황이 맞물려 더 자세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이 아들에게 반드시 <징비록>을 읽으라고 할 정도록 높이 평가되었으며 일본에서도 널리 읽혔다.

 

하회마을에서 6km 떨어진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 할아버지가 31세 때에 건립하여 후진을 양성한 위해 새운 서원으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병산서원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매우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서원 경내로 들어와서 만대루에 올라 밖을 보면 그 풍경이 일품이다. 하회마을을 굽이쳐 돌아온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며 자연과 일체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만대루에 올라 서면 시 한 수라도 읊지 않으면 내려오는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병산서원.jpg      안동답사(080903) 123.jpg

                              <병산서원>                                                     <병산서원 만대루>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중국 당나라 두보의 시인 제목 백제성루(白帝城樓)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1614년 선생을 흠모한 사림들이 존덕사를 세워 선생을 배향하였다.

 

류성룡 할아버지와 이순신과는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 살아 알고 지내는 사이로, 이순신의 추천과 후원에 공이 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직접 보내 군사훈련에 참고하게 했다. 이순신 역시 류성룡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때로는 꿈 속에 보일 정도로 각별하였다.

지난 2007류성룡 할아버지 타계 400주년을 맞이하여 병산서원에서 지낸 제사에 이순신 집안인 덕수 이씨 집안에서 제관을 보내 제사에 참여한 기사를 보면 그 인연이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승인 퇴계는 류성룡 할아버지을 평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내셨다라고 하였고, 선조는 바라보면 자연 경의가 생긴다.’ 하였으며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이항복은 이 분은 어떤 한가지 좋은 점만을 들어 이름 지을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이순신류성룡 할아버지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곧은 인품뿐만 아니라 탁월한 군사지식을 갖춘 전략가라는 면에서 비추어 보아도 매우 닮은 데가 많은 듯하다. 당파 싸움으로 문란해진 정치 속에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다간 선조들의 그 정신이 우리에게 깊이 뿌리 내려 있음을 느낀다.  

 

 

<참고문헌>

-         징비록, 유성룡, 서해문집

-         한국의 위인 류성룡, 곽재구, 국민서관

-         징비록, 노대환, 웅진다책

-         하외마을 홈페이지, 성웅 이순신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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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09.06.02 14:58:04 *.218.12.47
서애 류성룡  선생이 조상님이시군요. ^^
저는 '설득과 통합의 리더 서애 류성룡'과 '징비록'을 읽고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경복궁이 불에 타는 꿈을 꾸고 전쟁을 예감하신 일
몸으로 선조를 막고
전쟁 전에 군 편제를 개편하고자 하셨으나 이것도 틀어지구요....(만약에 이것만 됐어도 몇 개의 방어선을 만들고
왜군이 진격하는 속도를 늦출 수 있었습니다.)
천민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제도와 공을 세우면 면천 할 수 있게 하신 일- 나중에 이 제도도 유명무실 해지죠. 기득권층의 이익 때문에 양반은 노비를 면천 시키지 않으려구 사람이 재산이니까요...
대동법 다시 실행하신 일  - 세금을 쌀로 통일한 일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대동법은 없어집니다.(경기도만 실행하던가요?) - 벼슬아치와 그 밑에 빌붙어 사는 놈들의 패악질이 정말 심했죠... 그래서 민초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셨구요,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추천하신 일 - 인재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일이죠.
류성룡 선생은 내 일직이 도를 공부할 것을.... 많이 아쉬어 하셨구요..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 문 밖에서 사람 인기척만 들려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실 정도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으셨죠...
그래서 선조가 불러도 안가셨구요.
류성룡 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 육의전 상인들이 3일장인데 하루 더 연장하여 나흘 동안 문을 닫고 예를 표한 것이 류성룡 선생께서 민초를 얼마나 사랑하신지 알 수 있는 예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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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춘희
2009.06.03 06:59:40 *.111.241.42
제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꼼꼼히 일러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읽은 것을 기억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저도 참 무심한 후손이죠. 이제서야 책을 읽어보고 깊은 관심을 가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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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3 08:50:10 *.12.130.125
자랑스러운 조상님을 두었네...^^
이순신 장군 못지 않게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건져 올린 분이시지...
덕분에 그 분 삶도 한번 더듬어보게 되어 좋다.

우리도 꼭 우리 힘닿는 데 까지 우리의 커뮤니티를 잘 가꾸어가자.

바쁘게 썼다면서 글이 단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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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5 02:35:48 *.40.227.17
춘희 언니~, 피는 몬 속인다니께여~

그날?  바로 그때?  (ㅉㄹ 알져?)  알았잖아여~

한 가지 좋은 점만을 들어 언니야를 말하기에는 느~무 장점이 많은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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