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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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치하에서 해방된 지 6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조국은 해방되었을지언정 우리 주변에는 마음 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동포들(나를 포함하여)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에릭슨의 인성발달단계에서 청소년기에 거쳤어야 할 ‘나는 누구인가’란 의문이 요즘은 장년기의 화두가 되었다. 인간은 청년기에 생업과 양육이라는 생활인의 시기를 마치고 장년기에는 관계의 폭을 넓히며 사회적 자아로 이행한다는데, 인생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죽음을 수용하는 단계인 노년기에도 제때 풀지 못한 숙제 때문에 우리는 전전 긍긍하곤 한다.
에릭슨이 한 칸씩 답을 밀려 쓴 것일까. 이 모든 것을 외부환경의 탓으로 돌리기에 우리는 인생을 많이 알아 버렸다. 사람은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경험을 함으로써 성장하는 법이다. 오밀조밀하게 이어진 인생의 단계를 월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각각의 단계에서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고스란히 결핍으로 남는 게 인생 아닐까.
타향에서나 조국에서나, 칠십 노구
백범은 말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못난 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민족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쉬지 않고 해온 것이다.
고로 나 또한 행위가 아닌 존재로서 나를 믿고 의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꽃비가 내리는 그날이 오늘이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멈추지 않고 해 나갈 작정이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듣기만 하면 곧 그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나이 오십에 '천명을 안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알아 그에 순응하거나,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최선의 원리를 안다는 뜻이며, 곧 마흔까지는 주관적 세계에 머물렀으나, 50세가 되면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인 성인(聖人)의 경지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공자 말처럼 오십까지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천명 - 천복-을 알게 된다면 결코 늦은 건 아니겠지요? ^^
시간과 나이에 대한 당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도움을 받은 해석입니다.
으~음, 전 십년 넘게 남았구요, 오빠도 상당한 시간이 남았네요 ㅎㅎ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근현대사 부분의 시작인데..
아무리 봐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할 수 없다면
식민치하에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우리 역사의 독립투쟁은 '무장투쟁'과 '실력양성' 두 트랙이 서로 공존하며 상호보완을 했다지만
제 영혼의 독립투쟁을 위해선 오로지 '실력양성' 뿐인 것 같아요.
아직 온전히 독립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안일하게 나태히 세월을 보낸다면
그야말로 '망국노의 근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구선생님께서 나의 소원에 쓰신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모습에 우리나라 대신
나를 대입해보며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그런 내가 모이면 선생님의 소원도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믿으면서 말이죠.
아무래도 나보다는 먼저 독립을 쟁취하실 듯하니
가는 길목마다 노란 손수건이라도 꼼꼼히 메어놓구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

김구의 말을 빌리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어요.
변화는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방황의 끝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존재로서 나를 믿고 의지한다면, '나는 이미 변했다'고 깨달을 수 있을까요?
형의 사유 체계는 근본에서 시작하는 모양이에요. '정리되어야, 힘이 나온다'라는 말도 구렇구요.

세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나를 신뢰한다는거지. 사물 그 자체는 호불호도 없고,
시시비비도 없지만 나를 통해 가치가 세워지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성스러운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면 자신을 존중하게 될 뿐더러 또 다른 신인 타인의 존재도 존중하게 될 것
같다. 나를 믿는다는 건 가치를 보는 관점이 외부에서 내부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세상의 변화에 허겁지겁 따라가는 입장에서 내가 산에서 바다로 눈을 돌리면 산이 "나 여깄소" 하고 따라오는 형국이라고 할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