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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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대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그대가 겪은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이 기술되겠지? ‘3가지의 큰 경험’이 무엇인지 골라 신문기사처럼 기술하라.
1) 돈 주고도 살 수 없었던 건강.
바람 앞에 촛불처럼 금방 꺼질 듯 태어났다. 나는 달을 다 채우고 나오지 못했던 것이 원인인지 초등학교 시절까지 사람구실을 하기 힘들 정도로 약한 몸이었다. 그로인해 입원과 퇴원은 나의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늘 조바심으로 키웠던 엄마의 심정을 부모가 되어서야 알았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엄마는 지금 세상에서는 너무나 간단한 수술을 과정을 마치고 마취에 쉽게 깨어나지 못 했다. 눈을 떴을 땐 자신의 항체가 몸을 공격해 하루아침에 전신 류마티즘 장애 3급 환자로 자리에 누워 버렸다. 의료사고란 말도 없던 시절 엄마는 삼십대부터 지금까지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나도 엄마도 다 이겨내고 지금 잘 살아내고 있다.
2) 나의 이른 결혼의 결정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우리 아들이 22살인데 마냥 아이만 같은데 난 23살에 결혼을 했다. 이것 또한 엄마에게 얼마나 충격이었는지를 요즘 우리 아들을 보면서 느낀다. 내년에 결혼 할 여자가 생겼다고 데리고 오면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어려서는 아파서 커서는 이른 결정이 엄마에게 불효를 한 것만 같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도 나에게는 핑크 빛 신혼 시절은 없었다. 근 7년간의 세월을 나는 아픈 아이들을 안고 없고 병원에 출 퇴근을 해야 했다. 나의 이십대 초반의 생활은 하얀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나의 눈물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른 결혼 그리고 아픈 아이들 감당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친구들이 부러워 많이 속상해 한 기억도 남아있다. 하지만 세상은 공평하다. 그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너무나 부러워하고 있고, 나의 이른 결혼은 내가 결정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 나이에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남편과 아이들이 도와주고 오히려 나에게 격려까지 할 정도로 많이 컸다.
3) 삼십대의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
29살 마지막 날 나는 비행기를 탔다. 도착한지 하루 만에 삼십대를 맞았다. 낯선 곳의 아침을 잊을 수 없다. 엄청난 변화였다. 아이들이 조금 건강해져 이제 나만의 생활을 하며 즐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시작이었다. 거기에는 나는 없었다.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적응시키기에 너무나 바쁜 생활이었다. 모든 걸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말이다. 언어와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기에 정신없던 시절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간 곳이기에 모든 일을 결정하고 처리 하는 일들이 쉽지 않았다. 육 개월쯤 이 지나 조금 씩 익숙해져 갈 때 숨을 돌릴 때 쯤 IMF 를 맞았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모든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2. '3가지의 큰 경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하나를 골라 자세히 해석하기.
아침에 떨어지지 않는 아이들을 억지로 떼고 언어를 배우러 다니고 일도 가야했다. 끝내 작은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유아원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두어 놓았다. 내가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는 아이는 이미 목이 쉬었고 탈진 상태였다. 그래도 어디 하나 하소연 하지 못 하고 아이를 업고 집으로 향해만 했다. 자기도 다른 아이처럼 모든 털을 노랗게 해달라고 떼를 쓰며 울었다. 나의 삼십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고 내가 겪은 아픔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나는 건강해야 했고 열심히 일해야 했다. 유학 가서 6개월에 포기를 하고 돌아가야 할 시점에서 9년이란 시간을 버텨내기까지의 드라마는 그리 짧지만은 않다. 나의 인생에서 투 잡을 뛰며 남편 뒷바라지에 아이들을 길렀던 시간은 정말 바빴다. 그러나 인생을 돌아 볼 때 가장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던 때이기도 했다.
갑자기 닥친 IMF로 남편은 공부를 포기 하겠다고 했다. 온 식구가 너무 고생이라며 한국에 돌아가 아이돌보며 그냥 살자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성당에서 신부님을 보필하며 성당 일을 다 돌보는 사무장 일을 했다. 그 3년이란 시간은 정말 가시밭길이었다. 그 삼년의 시간으로 나는 정말 성장을 많이 했다. 성당이다 보니 많은 교포가 모이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가만히 있어도 이야기를 만들고 내 움직임은 곧 그들의 이야기 거리였다. 사람들이 제일 무서웠던 시기이기도 했다. 신자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일을 하며 이런 힘든 일을 하는지 몰랐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다른 많은 일이 있었다. 유학까지 와서 막일은 안하겠다는 나의 자존심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을 받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직업이 그 사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렸다. 그래도 버텼다. 왜 버텼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자존심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성격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만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삼년 신부님의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을 했다. 마지막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힘들 때 옆에서 도와주어 고마웠다고…….”
그 당시에 그 말 한마디 듣기 위해 내가 삼년을 귀머거리, 벙어리 장님을 살아야 했던 거야? 고맙다는 말이 뭐 대수라고……. 하는 마음뿐이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3.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얻은 그 무엇들.
지금 살면서 나는 새록새록 그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달아가고 있다. 높은 고개를 넘고 나니 웬 만한 고개는 아무 생각 없이 수월하게 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나는 배운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내 생각대로 내가 결정한 대로 묵묵히 밀고 나가는 유형에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간장 종지만 했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커졌다는 걸 알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더 이상 큰 파도가 와도 등을 보이지도 않고 부딪히지도 않는다. 그 파도를 타고 넘어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 파도를 넘어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나 생각들이 나에게는 필요했다. 나의 몸을 기댈만한 써핑보드와 같은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고, 그 위에서 중심을 잡고 일어서는 나의 강인한 몸과 정신이 필요했다. 아무 생각도 대책도 없이 몸 하나로 파도와 맞서 싸우며 내팽개쳐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어느새 나는 강해져 있었다. 파도가 벌떡 일어서 달려들어도 나는 그 안에 숨겨있는 터널을 보고 있었다.
나는 어려움을 겪으며 말없이 내 할 일을 하는 나를 보고 주의 친척이나 사람들이 철이 일찍 났다고 성숙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철이 난 척을 하며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시기이니 시키는 대로 조용히 살았던 것이다. 부모의 마음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모든 결정을 내가 해야 했던 시기 나의 삼십대에 나는 진정으로 성숙해졌던 시기였다.
파라슈트의 마지막 부분에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일’ 이라는 부분에 ‘인생에 있어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일까? 라는 물음은 인생의 목표를 확실하게 만들어 준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당신의 임무이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당신의 첫 번째 임무는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직도 이런 구절을 보면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 일은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아니라 이미 결정 되었던 일을 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담금질이 여러 번 거쳐야 강철 연장이 되어 나오듯 나에게는 목표를 위해 필요했던 첫 번째 임무 과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