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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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여보세요."
"저는 OOO 상담원 OOO입니다. 오병곤 고객님 되시죠? 다름이 아니라 저희 회사에서 고객님에게 딱 맞는 신상품이 나와서 안내 드리고자 전화 드렸습니다. 통화 괜찮으시겠습니까?"
보통 이런 전화가 오면 내가 자주 써먹는 수법이 있다.
"저, 화장실에 있는데요."
"네에~~~끄응^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백발백중으로 전화를 끊게 되어 있는 나만의 필살기다.
아, 그런데, 이 상담원은 전화를 끊기는커녕 부탁을 한다.
"저, 오늘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그냥 제 얘기 좀 들어주면 안될까요? 절대 광고 안 할게요."
"네에?"
마침 시간이 약간 여유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네"하고 대답해버렸다.
"저는요, 상담일 한지 6개월됐구요. 제 고향은 OO인데 20살에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녀는 약 20분 가량을 이야기했고 나는 중간중간 간간히 "네"라고 대답했었던 거 같다.
전화 속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오늘 그녀가 실적이 나쁘다고 상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인지라 할 수 없이 전화통을 붙잡았지만 도무지 일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죽 힘들었으면 생면부지의 낯선 남자에게 미주알고주알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을까?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순간 예전에 프로젝트 사무실 근처에 있던 OO통신회사의 콜센터 직원들이 생각이 났다. 나는 회사 동료들과 근처에 있는 주점에 가끔 가곤 했는데 그 곳에는 콜센터 여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 날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소주병이 수북이 깔려 있었고 담배 연기도 자욱했다. 이렇게라도 풀어야 그들의 하루는 이상 없이 지나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라는 것이다. 조직 생활하면서 어떻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표현하고 지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있는 그대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은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나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을 통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람직한 행동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직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숨기며 생활한다. 상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하라고 해서 그 말을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내 경험상 그대로 이야기해서 좋은 결과가 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상사에게 마음에도 없는 아부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안 그런 척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더욱이 오늘날 회사는 '고객만족'이라는 지상명제 아래 직원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고객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화내지도 말라고 주입을 한다. 수익을 가져다 주는 고객을 위해 직원들의 감정은 희생을 당하고 있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항상 의문이 드는 게 있다. "저 상냥한 승무원들은 화날 일이 없을까? 어떤 경우에도 탑승객들에게 친절한 미소로 대하자면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 게 인지상정인데 투철한 사명감으로 뭉쳐서 그런가, 아니면 무감각해져 그런가?" 그녀들의 속마음은 이럴 지도 모른다. ‘고객님, 제가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닙니다.’
구조조정을 겪은 후 회사에 남아남은 사람들의 특성은 어떤 반응에도 무감각해지는 쪽으로 변해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처음에는 자기만 살아 남은 것에 대한 미안함, 일에 대한 압박감 등을 느끼지만 차츰 억울한 일에도 화를 내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기쁜 일이 있어도 무덤덤하게 변해간다고 한다. 무감각은 정신 질환에 가깝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남자들에게서 두드러진다.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남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 나약한 사람이거나 적어도 점잖지 못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캔디 노래 가사처럼 참아낼 뿐이다.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그렇지만 이제는 남자들도 방전된 감성을 충전해야 한다. 남자들은 자신이 감성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야 한다.
감정은 이제 무조건 억압해야 할 그 무엇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감정은 이성으로 통제 받아야 하는 원시적인 충동이 아니다. 인간의 의식을 높은 수준에 이르게 하는 뇌 기능의 중요한 부분이다. 감정을 억압하면 그 감정은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으면서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왜곡되어 표출될 수 있다. 억눌린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할 수 있고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믿는다.
현대 사회에서 감정을 온전히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지만 자신만의 감성 충전법을 개발해야 한다. 어찌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감성 또는 기분을 관리하는 일이다. 휴식을 갖거나 책이나 영화를 보거나 친구들을 만나거나 혼자 명상의 시간을 갖거나 글을 쓰는 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꽤 사교적인 스타일로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가리는 편이다. 술자리는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마음 놓고 감성을 표현하는 매개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자신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기쁨과 슬픔, 분노 등의 감정을 표현하고 느끼는 것은 마음을 치유하는 첫 걸음이다.
감정은 생명을 지닌 존재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도우미다. 때로는 외롭거나 슬프더라도 우리는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감성을 자유케하라. 내 감성에 날개를 달아주자. 우리 자신을 달래는 기술이 기본적인 삶의 기술이다. 순간순간 건강하게 감정을 느끼고 소통시키면 따뜻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맛있는 수다. 울적할 땐 전화신공을 발휘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