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숙
- 조회 수 2332
- 댓글 수 19
- 추천 수 0
물꼬가 터지고, 막힌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보스가 팀별로 특허 출원 신청을 하라고 지시하고는 출국해 버렸다. 우리 팀에선 아무도 하지 않겠단다. 아이디어가 없단다. 팀 패널티를 먹지 않으려면 팀장인 나라도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런데 벌써 20여일 째 정리가 되지 않는다. 머릿속 구상은 다 되었는데, 자꾸만 정리하는 일을 미루고 또 미룬다. 빨리 마무리해서 업로드 해야 하는데 왜 나는 연구와 관련된 일에서는 이리도 지지부진한가? 다른 일 같았으면 벌써 후다닥 해치웠을텐데 왜 연구에 관해서만은 이럴까? 그렇다고 내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학위과정 중에 있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생산성이 높았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완전히 고여서 썩은 물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였다.
오랫동안 제자리 걷기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중립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인가? 왜 나는 전환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가? 분명 내가 스스로 전환을 거부하고 있었다. 발전에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전환거부에 쓰고 있었다. 에너지가 강할수록 고통은 강렬했다. 인위적으로 직장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 봐도 전환거부는 그대로였다. 고통이 한참 진행된 후 나는 전환거부의 이유를 찾기 시작했지만 그리 쉽게 마각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랬다. 오랫동안 나는 하루 종일 불안감을 안고 살고 있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늘 나는 강박환자처럼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불안했다. 열심히 하고 있을수록 더 불안했다. 무언가를 하고는 있었으나 정작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진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던 것은 핵심에서 벗어난 불필요한 일들이었다. 요리사가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시작하지는 않고 주방만 계속 한달 째 닦고 있거나,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화구만 정리하고 또 정리하는 그런 느낌, 뭐 그런 것이었다. 늘 핵심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공회전하는 차량 같았고, 제자리만 열심히 뛰고 있는 마라톤 선수 같았다. 그래 늘 ‘제자리 걸음’이었다. 바퀴를 열심히 돌리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 아니 계속 수렁 속에 빠져 들어가는 느낌, 이런 식으론 진도가 나간다고 해봤자 더 깊은 ‘제자리 걸음’에 빠질 뿐이었다.
살기 위해선 진도 나가야 한다. 이 ‘제자리 걸음’을 끝내고 한발을 내딛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남들은 그냥 가면 된다는데 나는 왜 계속 이 상태인가?
당장 해야만 하는 특허출원 명세서 정리가 안되고 있던 중 나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내가 특허를 만들려고 하면서 너무 내 학위논문에 집착하고, 거기서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너무 크게 범위를 잡고 있었다. 그러니 정리가 안 될 수밖에 없었다. 욕심이 앞서고 있었다. 힘이 너무 들어간 어깨로 공을 던지려고 하는 투수 같은 상태였다. 그때 불현듯 어쩌면 나의 지지부진의 이유가 이 어깨에 들어간 힘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자리 걸음을 계속 할 수밖에 없도록 내 다리를 잡고 있던 그 힘이 나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건 나로서는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새로운 관점이었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리고 곧장 나는 제자리 걷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진 ‘당연했던 사실’을 하나 버렸다. 내 발목을 잡고 있던 내 학위논문을 그날 나는 버린 것이다. 그건 내게 면류관이었지만 그것에 내가 묶여있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만을 야기하는 원천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논문은 내게 너무 소중한 것이었고 그 소중함으로 인해 그것이 나의 한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나의 비극이었다. 그게 나의 다음 연구로의 진행을 방해한 것이다. “섰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주의하라 했던가?” 나는 내 논문으로 인해 전환거부에 빠져있었던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박사학위가 아니라 학위논문이었다. 내 학위 논문은 시대를 조금 앞질러 나온 것이었다. 당시엔 너무 일러서 어디에도 쓸데가 없었다. 그래서 그걸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순 없었다. 학위 받고 나서 5년 쯤 지나니 로봇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고 로봇의 인지기능을 만드는데 내 학위 논문을 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연구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H대학을 나오면서 나는 인지과학으로 로봇의 마인드를 만들어 보이겠다는 주제넘은 야심찬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계획의 출발은 늘 내 학위논문부터였다. 그랬다. 나는 늘 연구의 출발을 내 박사학위 논문에서 시작하고 있었고 그게 문제였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걸 학위 받고 10년 만에 깨달았다는 것이 나의 비극이다.
신이 나를 불쌍하게 보시고 이제 단서를 하나 던져주신 것일까? 우연히 나는 그 당연하게 생각했던 내 가정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팠지만 오히려 그건 축복이었다. 내 이론이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내 생각 때문에 스스로 만든 함정에 갇힌 것이 문제였다. 그건 스스로 만든 우상이었고 나의 명백한 한계였다. 그것에 얽매여 있는 한 나의 생산성은 최악이었고,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들만 만들어 내었으며 그것도 늘 더디게 만들어내었다. 계속 출발점에서 머무는 느낌이었다. 깊은 단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 달리기 선수가 열심히 달릴 때 러너하이가 찾아오듯 연구자에게도 그런 환상적인 느낌이 올 때가 있는데, 나는 그런 감각을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전부 학위논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가 전환거부를 한 것이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왜 그리 어리석었을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많이 진도가 나갔을까?
그것을 느끼게 된 그날로 나는 학위논문을 버리고, 가진게 아무것도 없는, 박사과정을 새로 입학한 학생 같은 마음으로 출근을 했고, 그 마음으로 내가 만들어내야 할 것들을 새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20여일 동안 정리가 안되고 있던 특허 명세서를 살펴보니, 허점과 한계와 장점과 특이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에 힘을 빼자 던지는 공에 파워와 스핀력이 실리는 뭐 그런 느낌이었다. 한 3시간 정도 소요된듯하다. 정리 못하고 있던 특허명세서를 정리하고 선행기술조사서를 만들어 보스의 숙제를 끝내는데 걸린 시간이......보스에게 메일을 쓰고 사이트에 업로드하였다. 20일간 계속 누르고 있던 강박증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내가 비로소 한발을 떼고 앞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10년만에 한 걸음을 뗀 느낌...비로소 제자리 걸음의 고통에서 벗어났음을 알았고, 자유로움을 느꼈다.
물이 흐르고 바퀴가 굴러가는 느낌을 확연히 느꼈다.
그건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던 그것을 버리고나서야 찾아온 자유였다. 그렇다. 이것 말고도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많은 가정과 편견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일까? 무서운 진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나를 전면 부인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을 전면 부정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문제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삶이 완벽하여 더 이상 변화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자는 그대로 살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완벽하지 못한 우리는 변하고 싶어하고, 교정받고 싶어하고 성장하고 발전하길 원한다. 부족하고 문제가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고 고치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정작 버리는 것이 먼저 임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내가 그랬다. 버려야 채워지는 자연의 법칙을 욕심 때문에 오랫동안 거부했었다.
그날 나는 새로운 자연 법칙을 몸으로 체득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 때 거기서부터 구원이 찾아올 수 있음을....
그걸 버리고 나니 별다른 노력없이도 앞으로 나가진다. 비로소 전환이 일어난 것이고 물이 흐르기 시작한 듯하다. 10년간 고여서 썩고 있던 내 ‘욕심의 호수’에 물꼬가 터이고 콸콸 더러운 물들이 쏟아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전환의 길로 들어선 것인가? 공회전을 멈추고 바퀴가 굴러가니 이제 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욕심의 탱크를 내버려야만 차량이 가벼워지고, 그제서야 엔진과 바퀴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부인할 수 없는 자연법칙 하나를 몸으로 배웠다. 축복이다. 할렐루야!

어떤 검술의 명인이 그림의 대가인 유명한 화가를 방문했을 때,
화가가 물었습니다.
"뜰 앞의 매화 나무를 벨 수 있겠소?"
"... "
" 대신, 이 천년 매화만 베지 말고 그 세월도 함께 베어 주시오!"
무사는 칼을 뽑았다가 끝내 베지 못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몇 날을 수행하더니, 비바람이 치던 다음 날 아침,
화백은 마당의 천년매화가 베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방문을 열었을 때는 검객은 떠나고 없었다.
무사는 화선지 위에 천년의 세월을 그려냈다.
그것은 일그러짐 없는 원 하나, 그렇게 검객은 세월을 그려냄으로서
천년매화를 벨 수 있었다.
생각 한 번 바꾸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 생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시간과 가치와 의미를 함께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만큼
고통스러움을 인내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변화가 아닌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허출원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기를 기원합니다.^^

정말 축하드려요. 깨달음이라는 것을 피상적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체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겠습니다.
사부님 말씀을 보니, 올해초에 수영을 배우며 느꼈던 깨달음들이 다시 새롭게 다가옵니다. 물에 떠서 앞으로 전진하고 싶은데 내 마음같지 않게 물만 먹게 되고 힘은 힘대로 들고 마음은 마음대로 짜증이나고. 그런데 어느순간 머리를 스치는 섬광같은 깨달음. 물을 먹을까 두려웠던 그 물에 나를 맡기며 몸에 힘을 빼는 순간 내 호흡을 느끼며 앞으로 앞으로 힘들이지 않고 전진하고 있더군요. 그건 단순히 수영을 하는 것만이 아니 제 삶에 대한 통찰이었습닏. 그걸 또 잊고 살았군요.
언니 덕분에 사부님 덕분에 다시금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 납니다.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삶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하는 수밖에는 없나봅니다. 전 이제는 다시 잊지 않기위해서 어제부터 100일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872 | 칼럼,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하다. [14] | 맑은 김인건 | 2010.09.13 | 2238 |
» | 물꼬가 터지고, 막힌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19] | 박경숙 | 2010.09.13 | 2332 |
1870 | 32+ [10] | 백산 | 2010.09.13 | 2021 |
1869 | 내 마음에서 뽑아 낸 잡초 한 줌 [20] | 이은주 | 2010.09.12 | 2576 |
1868 | 라뽀(rapport) 23 - 사업(事業)을 한다는것 [2] [2] | 書元 | 2010.09.12 | 2116 |
1867 |
하계연수 단상8 - 청동 마부상의 기운 ![]() | 書元 | 2010.09.12 | 2435 |
1866 |
하계연수 단상7 - 중심(中心) ![]() | 書元 | 2010.09.12 | 3043 |
1865 | 아이들과 공동체의식 [10] | 낭만연주 | 2010.09.12 | 2667 |
1864 |
심스홈 이야기 13 - 소파, 새로 사야 하나.. 새 옷으로 갈아 입혀 볼까? ![]() | 불확 | 2010.09.11 | 4313 |
1863 | [칼럼] 안데스의 눈물 [6] | 신진철 | 2010.09.11 | 2837 |
1862 |
감성플러스(+) 23호 - 저마다의 시간 ![]() | 자산 오병곤 | 2010.09.10 | 2316 |
1861 | 응애 31 - 살인의 해석 [8] | 범해 좌경숙 | 2010.09.10 | 3058 |
1860 | [칼럼] 가난한 자의 행복 [1] | 신진철 | 2010.09.09 | 2433 |
1859 | [칼럼] 백수, 자기부터 경영하라 [4] | 신진철 | 2010.09.08 | 2168 |
1858 | 선택, 피해자가 되지 않기 [10] | 이선형 | 2010.09.06 | 2478 |
1857 | 관리자에서 경영자로. [7] | 맑은 김인건 | 2010.09.06 | 2399 |
1856 | Mission [20] | 박상현 | 2010.09.06 | 2338 |
1855 | 소명 [19] | 신진철 | 2010.09.06 | 2237 |
1854 | [컬럼] 위대한 커뮤니케이션 [20] [2] | 최우성 | 2010.09.06 | 2350 |
1853 | 그들의 개인지도 - 대가들에게서 배운 것 [22] [1] | 박경숙 | 2010.09.06 | 2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