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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0일 10시 37분 등록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는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거룩한 식사, 황지우

 

 

혼자 밥먹는 사람은 어딘지 슬퍼보인다. 한끼도 아니고 평생 먹어야 하는 대책없는 밥 앞에서 밥만을 응시한 채 숟가락을 드는 모습은 안스러움을 넘어 더운 목숨을 유지하는 눈물겨운 의식을 떠오르게 한다. 출근 길 전철 안에서 샌드위치를 돌돌 말아 어기적 먹는 숙녀의 모습이나 고급 뷔페에서 접시에 음식을 한 아름 담고 고상한 척 먹는 귀부인이나 김훈이 말한 것처럼 어쩌면 모든 먹는다는 동작에는 비애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혼자 밥 먹기를 죽도록 싫어했던 나도 어쩔 수 없이 혼자 식사를 해결했던 아픈 경험이 여러 번 있다. 군대 시절, 고참의 집합 명령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합을 심하게 받았다. 너무 배가 고파서 관물대에 숨겨 놓았던 작은 크림 빵 하나를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먹었다. 그야말로 눈물젖은 빵이었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한 동안 나 홀로 점심을 먹은 적도 있다. 마흔의 사춘기를 겪을 무렵이었고 새로운 회사의 직원들과 친해지기 전이어서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공원 주변을 적당히 산책하다가 혼자 식사하기 좋은 분식집이나 중국집에 들어가 한끼 해결하는 게 보통이었다. 가끔 부대찌게나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도 2인분 이상을 시켜야 하기에 입으로 김치국만 마셨다. 음식점에 들어가 혼자 자리에 앉아도 주위가 신경이 쓰여서 신문을 보거나 핸드폰을 만지작 만지작거려야 그나마 견딜만했다.

 

몇 년 전 아내가 두 딸과 함께 부산에 있는 처제집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밑반찬을 해놓았지만 밥하기도 귀찮고 라면과 짜장면을 번갈아가며 삼일을 견딘 적이 있었다. 메뉴도 지겹지만 혼자 밥먹는 게 고역이었다. 거룩한 식사라기보다 비참하고 불경스러운 식사라는 기분이 들었다. 조셉 캠벨이 말한 것처럼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이라는 숭고한 마음으로 밥을 먹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혼자 먹는 밥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다. 배고픔을 면하고자 억지로 먹을 뿐이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우아한 세계는 혼자 먹는 밥의 비애를 실감나게 표현한다. 아내와 두 아이를 유학 보내고 혼자 살고 있는 그에게 미국에서 가족들이 소포를 보내온다. 가족들이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다. 그는 밥 해 줄 사람이 없어 형편없는 끓인 라면을 먹으며 대형 TV 앞에 앉아 가족들이 맛깔스러운 요리를 먹으며 행복한 모습을 본다. 잘 지내고 있는 듯하여 미소를 짓다가 서서히 울먹이기 시작한다. 서러움에 복받쳐 울던 그는 먹던 라면그릇을 던져버린다. 왜 그랬을까? 나는 온갖고생을 다 하고 있는데 가족들은 나 없이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구나 라는 생각에 분노와 설움이 복받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다. 바닥에 흩어진 라면을 치워 줄 사람도 없다. 그는 러닝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쓰레기봉지를 가져와 조용히 치우기 시작한다. TV에는 행복한 가족의 영상이 계속 흘러 나온다.

 

우아한세계.jpg 

 

때가 되면 어김없이 먹어야 하는 밥. 먹자고 하는 일인데하며 동료들이 밥 먹자고 보챈다. 가끔은 살기 위해 먹는 건지, 먹기 위해 사는 건지가 헷갈릴 때가 있지만 밥은 각별하다. 밥 먹었니?보다 더 절절한 인사도 없고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보다 살가운 약속도 없다.

 

우리에게 밥은 무엇일까? 밥은 우리를 키워주는 하늘이며 생명이다. 인생의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밥은 너와 나를 이어주는 관계다. 가족을 의미하는 '식구(食口)'는 함께 밥을 먹는 사이를 말한다. 한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는 '한솥밥' 먹는 사이가 된다. 기일과 명절에는 밥을 사이에 두고 망자와 후손들이 재회한다.

 

이제는 혼자 밥 먹는 것을 쓸쓸하고 부정적인 것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가끔 혼자 밥 먹는 행위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본다. 혼자 밥 먹는 시간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다.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며 나는 먹는다는 것의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Ps)추석입니다. 오늘도 외롭게 밥을 먹는 이들에게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는 한가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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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09.20 11:12:34 *.236.3.241
추석을 앞두고 풀어놓은 밥상이
밥풀떼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오다가
심장에 달싹 달라붙은 것 처럼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 

오랜만에 만나 햇곡식으로 먹고 마시고 흥겨워하라는
명절이 '결핍'을 더 명징하게 드러낼 수도 있겠네요.

병곤 선배,  댓글은 자주 못 달았지만
잘 보고 있습니다. Happy 추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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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0.09.22 14:11:46 *.154.234.5
그런 무거운 의도는 아닌디...
묵직함은 그대의 전매특허아닌겨?ㅋ
댓글은 거의 못달고 글만 가끔 보고 있슴.ㅜ.ㅜ
목하 추석 지나고 이 결핍을 채우려고 노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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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9.20 17:28:02 *.30.254.21
나도..해피 추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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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0.09.22 14:15:53 *.154.234.5
처가집이 동두천이라 의정부를 지나갈 때마다 가끔 그대가 생각난다.
알면 알수록 참 나랑 비슷한 구석이 많아.ㅋ~
그대로 인해 변경연이 한 십년 정도 낭만적으로 변한 느낌...
가슴 속 슬픔과 애환을 멋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그대. 멋져부러.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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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9.20 19:16:31 *.131.127.50

먹자고 하는 일... 아니~ 이~ 
살자고 하는 일 ^^

먹기위해서 사는 일은  웃기는 짐성이고
살기위해서 먹는 일은 거룩한 신성이고...
하나는  노동이고 하나는 예술이네 ^^

백수가 밥을 먹을 때는...
머리가 백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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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0.09.22 14:18:13 *.154.234.5
아, 백수가 그 백수?
형은 짐승돌에서 점점 아줌돌로 진화하는 듯하여
진정한 육체적, 영적 매력남으로 재탄생하고 있는 듯...
형을 오래 본 사람으로서 추석 명절 덕담 한 마디...
"역시 살아봐야 안다니께..."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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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09.20 19:51:40 *.42.252.67

매끼의 식사를 거의 개와 먹지.
이들에게는 내가 밥 먹는 시간이 지들도 먹는 시간임을 알아.

아드닥 아드닥 사료 깨물어 먹는 소리를 들으며 먹는 나의 밥은 사료일까? 밥 일까?

이 참에 혼자 밥 먹자고 움직이는 것도 싫은데 사료를 함 먹어 볼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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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0.09.22 14:21:04 *.154.234.5
사료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개밥..ㅋㅋ
전생이 있다면 너는 분명 사람이 아니었을거다에 오백원 건다.
사람도 동물도 전방위적 커뮤니케이션을 넘나는 그대야 말로 진정한 소통자다.
추석이라 덕담 남발중...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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뎀뵤
2010.09.20 20:43:04 *.169.218.126
우아한 세계 못 봤었는데. 오빠 글, 전에 썼던거랑 이거랑 두편 읽고 보고 싶어졌어요. ㅎ
사실,,, 저는 혼자 밥 먹는게 크게 어렵지않은데.
보니까. 밥 먹는데 아무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함께 먹는다는 의미도 자아성찰 같은 거창한 의미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오빠 마흔살 사춘기 얘기에 푸훗 웃다가 찔끔 했습니다.
요즘 같을 때면 제가 출동해서 같이 점심을 먹을텐데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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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0.09.22 14:24:15 *.154.234.5
오호. 뎀뵤야. 은근 잠수타는 듯하면서도 읽을 글을 다 읽는구나.
다뎀빌려고...ㅋ
너를 안지 5년이 흘렀는데 너야 말로 진정한 자유인같은 느낌이 시방 드는 건 왜일까?
팔랑팔랑 바람처럼 날아다녀도 너만의 굳은 심지가 엿보여서일까?
암튼 너의 중심을 잘 잡아줄 꿈지기와 한번 보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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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1 12:35:05 *.40.227.17
병곤 선배님~ ^^

명절이 코 앞이라 그런 거이 맞져..
토실토실한 밤.. 노릿노릿하게 부쳐낸 각종 전들.. 탐스럽게 익은 과실.. 유난히 예쁘게 빚은 송편두 생각나구여.. ㅋ

보통날엔.. 괘한던 라면이나 짜장면은.. 아무래두 좀 그렇져..
승호 오라버니 글에서두 그렇구.. 이번 칼럼에는 먹는 거이가.. 헤헤^^

풍성한 음식..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바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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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곤
2010.09.22 14:27:33 *.154.234.5
불확, 혹시 너 댓글달 때 한잔하고 나서 다는 건 아니겠지?ㅋ
지난 번에는 옹알체 같은데 지금은 약간 주정체의 느낌이 나서..ㅋㅋ
암튼 잊지 않고 친절한 댓글 남겨줘서 고마워.
불확 닉네임을 바꿔야겠다.
신애옹주 어때?
신애 + 옹알 + 주정
ㅋㅋㅋㅋㅋ
뭐튼 해피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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