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뎀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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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약을 먹듯이 택시를 탄다.
매일 아침 내 침대에서는 ‘강미영은 언제 일어날까’ 배 쟁탈전이 벌어진다. 어제 우승팀 ‘지금 일어나야 해’ 팀과 그에 맞서는 도전팀 ‘십 분만 더’ 팀이 치열하게 싸운다. 먼저 ‘지금 일어나야 해’ 팀 ‘벌써 삼 십 분째야’ 선수가 공을 몰고 갑니다. 그러나, ‘십 분만 더’ 팀에 ‘삼일 째 야근’ 선수에게 뺏기고 마네요. ‘삼일 째 야근’ 선수가 ‘발가락 움직일 힘도 없어’ 선수에게 패스! 다시 ‘나를 사랑하자‘ 선수에게 이어지고, 바로 슛을 시도 하네요! 아. 안타깝습니다. 골대 바로 앞에서 ‘아침형 인간이 진정한 자기계발’ 선수의 태클로 다시 ‘지금 일어나야 해’ 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머리는 감고 가야지’ 선수와 ‘아침부터 달리면 땀범벅’ 선수가 공격에 나서보지만 ‘택시 타고 가’ 선수에게 완전히 가로 막힙니다. 이어지는 ‘십 분만 더’ 팀의 공격. ‘다 잘 살아 보자고 하는 일인데’ 선수의 결정적 어시스트. ‘택시비 이 만원 까지껏’ 선수의 슛! 슛! 슛! ‘돈 벌러 다니니 쓰러 다니니’ 골키퍼 선수가 막아 보지만 이미 골은 골대 그물을 출렁이면서 골인! 십 분만 더 팀의 승리! 나는 더욱 이불 속으로 쑥 들어간다.
자체적으로 아침잠 한 시간을 득템한 나는, 꿀맛 같은 늦잠을 자고 느즈막히 택시를 타고 출근한다. 택시 출근길은 너무 편하다. 한 시간 더 잔데다가 버스 정거장에서 동동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버스가 눈 앞에서 사라진다고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타고 가는 내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가 언제쯤 일어날까 신경이 곤두서 있지 않아도 된다. 버스의 급정거 같은 돌발 사태가 발생할 일도 없으니 택시의 뒷자리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몸은 편한데 맘이 불편하다. 세상에서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이 택시비라며 침 튀기며 열 올리는 사람도 있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데 택시비가 아까워서 아예 새벽까지 마신다는 젊은이도 봤다. 그에 비하면 나는 택시를 많이 타는 편이고, 택시비에는 후한편인데도 아침 출근길 택시는 항상 후회와 자책을 동반한다. 어쨌든 사지 말짱한 월급쟁이 회사원이 거금 이 만원을 내고 출근길에 택시를 타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돈 쓰고 마음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한 달에 몇 번씩 반복하는 내가 한심하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이면 똑같은 고민을 하고 반복해서 바보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내가 밉기도 했다. 그러니 택시를 탈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택시를 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침마다 머리는 더 복잡했고 오히려 더 피곤하게 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회사를 옮기면서 아침에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예전 회사의 출근 시간이 10시였는데, 9시로 빨라지기도 했거니와 예전 회사보다 출근 시간이 더 걸린다. 게다가 회사 분위기상 30분 정도는 일찍 출근해야 한다. 말이 두 시간이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긴장감이 더해져 8시에 일어나던 사람이, 5시부터 일어나야 해 일어나야 해를 반복하면서 정신차리려고 애쓰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 보니 택시 출근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고, 매번 고민하면서도 ‘십 분만 더’ 팀을 선택하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급기야 하루 걸러 하루씩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아침마다 택시비를 계산하는 시간은 점검 길어졌고, 머리는 복잡해서 더욱 피곤한 아침을 보냈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자책과 후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러면서도 매번 같은 선택을 하는 내 자신이 자기통제가 안 되는 사람 같아 보였고, 순간의 달콤함만을 쫓는 사람 같아 한심해 보였다. 진짜 속상하고 짜증나는 것은 택시비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보름에 한번씩은 택시를 타자고 정했다. 사실 이것은 한 달에 몇 번씩 타던 출근 택시를 2번으로 줄이자! 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매번 죄책감에 시달리던 마음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좀 놓아주자!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러니 한 달에 몇 번을 타게 되든 두 번쯤은 당당하게 타자고 생각했다. 보약 먹는 셈치고 출근 택시를 타자고 한 것이다. 한 달에 4만원 내고 내 몸과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해 볼만한 일인 것 같았다.
한 달에 두 번씩 택시를 타기로 하고 나서는 거짓말처럼 출근 택시 타는 숫자는 오히려 줄었다. 한 달에 한번만 타거나 아예 안 타게 될 때도 있었다. 보약 택시는 몸만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스스로 피곤함을 가늠해 보면서 다음을 위해 택시 출근을 킵해 두기도 했다. 그래도 내 몸과 마음이 힘들 때, 편하게 비빌 곳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됐다. 택시를 타면 안 된다는 마음이 나를 더 피곤하고 힘들게 했었다.
몸 편하게 하는 일과 마음 편하게 하는 일은 서로 반대편에 있다고만 생각하다 보니 그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더욱 많은 에너지를 썼다. 몸 편하고 마음 편하게 하는 일이 따로 있는 일이 아닌데, 왜 그토록 엉뚱한 곳에서 방황을 했나 싶다.
생각해 보니 한 달이 가고 일년이 가도 내 마음을 위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기만 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너무 인색했다. 오히려 죄책감까지 느끼며 살았다. 어쩔 수 없음에 떠밀려 택시를 타다 보니 어쩌다 한번을 타도 무슨 죄라도 짓는 기분이었다. 참고 견디는 방법만 익혔지 음미하고 즐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참아야 했고, 아픈 일들은 견뎌야 했다. 그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제 한번쯤은 그런 것들을 놓아 버리고 싶다. 조금 더 부지런했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힘들어 하면 되는데. 와 같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부담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정말 보약이 필요한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했던 우리 마음일 수도 있으니까.
보약을 먹듯이 택시를 탄다. 매 철마다 몸보신 한다며 첩첩 약을 지어 먹는 사람들처럼, 보름에 한번씩은 거금 이만원을 내고 택시를 타고 출근한다. 이젠 몸도 마음도 편하게,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보약 택시를 탄다. 내가 몇 년을 쓰러지지 않고 두 다리 꼿꼿이 달릴 수 있는 힘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