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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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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4일 10시 40분 등록

물길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 물길 스스로다.

- 故 이윤기 선생님을 기리며...

 

1.

까칠하게 깎은 반백의 머리, 그 아래로 드러난 하얀 이빨, 검게 그을린 얼굴이, 얼마나 많은 시간 그가 지중해와 유럽의 태양아래 있었는지 가늠케 한다. 아직은 아까운 63세의 나이, 그가 펜을 놓고야 말았다.

 

그의 부고를 받던 그 시간, 나는 ‘제9회 강의날대회’가 진행되던 안동의 하회마을 만송정 솔 숲에 있었다. 새벽하늘 위로 커다란 달무리를 보고 있었다. 내일은 슬픈 비가 내리겠다 싶었는데, 휴대전화의 메시지가 먼저 알고 울었다. 심장마비, 준비하던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 그렇지만 그는 행복했으리라. 소원대로 길 위에서 죽었으니.

 

평생 신들의 이야기를 찾아, 먼 이국땅을 떠돌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세상에 숨겨진 갖가지 암호같은 코드들을 찾아 우리에서 또 다른 세상 보여주는 일을 하였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의 이야기를 좇아, 그는 우리의 삶을 물어왔다. 그의 이름으로 지어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가 그랬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그리고 다시 페테르부르크 여름 궁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손길을 거쳐 가지 않은 신들이 없었다. 그의 눈길은 백화점의 장식품 하나에 마저도 숨겨진 의미를 꿰뚫어 내었고, 그가 본 세상은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도 우리가 잃어버리고 살아온 세계였다.

 

나는 그의 글을 통해 ‘움베르토 에코’를 만나게 되었고, 기호학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해 중세 수도원의 비밀을 파해쳐 가던 베네딕트 수도사인 윌리엄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긴장의 순간으로 나를 불러들였고, 그는 나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손에 땀을 쥔 채로, 등불을 비쳐들고 서 있게 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숨겨진 비밀이 하나씩 풀려가던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그가 옮긴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었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쥐어 주었고, 에게해 푸른 바다를 닮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알게 했고, 또 그를 닮은 히랍인 조르바를 사랑하게 하였다. 그가 그 많은 책들을 옮기고, 적지 않은 글을 쓰면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장지오노로 좋아했고,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살았다. 그렇게 살다 간 그가 말한다.
‘물길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물 스스로’라고.

나는 그렇게 듣는다.
‘삶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대 스스로’라고.

 

흐르는 강물을 사랑했던 그는 이제 스틱스 강을 건너, 이미 망각의 강이라는 레테를 건넜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무뚝뚝하다는 카론에게 쥐어 줄 노자 돈 하나 보태지 못하였다. 아니 어쩌면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를 잊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그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이고, 그가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병상을 찾아들던 하데스의 양해를 구해서라도 하고 싶어라 했던 일, 혹여 신들과 함께 춤을 추는 그의 신화는 아니었을까.

 

2.

그를 따라 ‘수니온’에 다녀오던 길

 

한 순간이었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을 도둑맞았다.
일행들이 아테네를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뒤통수를 내리치는 직감이 있었다. 설마... 하고 뒤돌아 의자다리 밑을 본 순간, 방금 전 그 느낌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참 묘한 느낌이었다. 찰나 같았지만, 그것은 분명 제우스의 날벼락 같이 강하고도 분명하게 뇌리에서 척추를 따라 흘렀다.

일행들을 따라 아테네 공항에 배웅을 나간 자리였다. 선생님은 내게 신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뒤적뒤적 포도주 한 병을 꺼내 주셨다.

“선생님, 참 신기하죠. 지난해 ‘파리스의 사과’에 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제게 만약 그 ‘사과’가 주어진다면 저는 아테네에게 주겠다고 했어요. 아테네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요.” 선생님도 따라 웃으셨다.

“정말이예요. 저도 아마 아테네, 그녀가 제 발목을 잡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일행들을 떠나보내고, 공항에서 터키로 가는 비행스케줄을 조정했다. 그리고선 영사관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이미 시간은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침 휴가철에다, 금요일 오후라서 문을 연 사진관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일단 영사관으로 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걸렸지만, 수완 좋은 김순자 선생님과 젊은 영사관 직원들의 도움으로 겨우 ‘여행허가증’을 받을 수 있었다. 여행사에서 호텔을 따로 잡아 주었고, 한 시간 남짓 버스와 트램을 번갈아 타는 색다른 체험을 하며 아테네 외곽의 바닷가 옆 호텔에 도착했다.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저녁을 대접하고 싶었는데, 김순자 선생님은 신고부터 하시자고 하셨다. 신고하면 어찌되는지를 여쭸더니 사실 물건을 되찾기는 어렵고, 한국에 돌아가 혹시라도 몇 푼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신고는 포기하자고 했다. 나도 좀 쉬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을 애쓰고, 예상치 않았던 일정까지 성심으로 해주신 분의 수고를 덜어드리고 싶었다. 굳이 저녁식사도 마다시며 호텔을 나서면서 조차, 프론트에 나의 저녁식사와 맥주까지 값을 치러버리셨다. 말릴 염치마저 허락지 않으시고선, 그 시원시원한 걸음걸이같은 말투로 한 번 더 ‘혹 심심하면 수니온에 다녀오라’는 오지랖 넓은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샤워부터 했다. 그리고 담배를 하나 피워물고 짐을 뒤져 얇은 공책을 하나 꺼냈다.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를 적어 보았다. 우선 여권, 지갑, 구형 소니카메라, 전자사전 그리고 한국을 떠나오면서 틈틈이 적어 왔던 공책과 아끼던 펜들. 늘 여행길에 기념품을 대신해서 챙겨오던 영수증 그리고 주머니칼. 그리고 그 가방.

정말이지 어느 것 하나 사연 없고,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유난히 쓰던 물건들에 정을 들이면 잘 버리지 못하는 나의 버릇 때문인지 정말 아쉬웠다.

현금이야 쓰다 남은 유로가 150정도, 달러가 30불 정도에 한국에 돌아가서 쓰려고 찾아둔 한화가 15만원 정도였지만. 돈이야. 뭐 그렇다고 치더라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의 상실이 더 컸다. 15년째 써오던 지갑, 더구나 이 지갑은 석 달 전 쯤 한번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지갑이었다. 늘 여행길이면 함께 해왔던 전자사전이며, 아는 사람에게 50만원을 주고 중고가격으로 구입했던 구형소니카메라도 벌써 6년째 손에 익은 물건이었다. 워낙 유행이 빨라져서 지금은 그렇게 크고, 불편한 카메라를 쓰지 않지만, 구입할 당시만 해도 최신식이었고 무엇보다 늘 함께 하면서 더러는 내가 찍히기도 하고, 내가 세상을 보고 담아오던 눈이었다. 가방은 또 어떤가. 10년쯤 전에 살아오던 틀을 깨며 안 해봤던 것을 해보겠다면서, 보이스카우트에서 주관한 스키캠프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그림자같이 챙겨 다니던 것이었다. 주머니칼에도 추억이 있었다. 나를 참 아끼시던 분이 스위스 여행길에 비싸게 주고 산 진품이라며, 상표까지 확인해주시던 물건이었다. 오른손잡이인 나의 바지 앞쪽 오른쪽 주머니에 늘 그 무게감을 느끼던 물건이었는데, 특히 와인을 즐겨먹기 시작하면서는 어느 상황에서건 와인 코르크를 따내던 공신이었다. 덕분에 나는 늘 와인 먹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시를 적고, 짬짬이 글감들을 스케치 해놓았던 공책이며 필기구들까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듯 했다. 여하튼 그냥을 못 헤어질 것 같았다. 가방에서 선생님이 주신 와인을 꺼냈다. 떠나보낸 나의 아바타들을 위해 한 잔, 홀로 남겨진 나를 위해 한 잔, 이스탄불로 먼저 떠난 동료들을 위해 한 잔, 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 아테네.. 그녀와의 밤을 위해 한 잔, 이제 닥쳐올 내 앞의 운명을 위해 한 잔, 그리고 이 의식을 위해 제주를 마련해 주신 선생님을 위해 딱 한 잔만 더.

열어둔 창문 사이로 아폴론의 화살이 사납게 와서 꽂혔다. 알람소리를 대신해서 울어대던 아테네의 여름 전령은 매미였다. 절규하듯 울어 제치는 것이, 오늘 하루도 얼마나 뜨거울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바람을 느껴보았다. 뜨거웠지만, 무덥지는 않았다. 젖은 몸이 금방 말라갔다. 노트북을 켰다. 세상을 향한 접속, 인터넷을 연결하고선 또 다른 세상에 송신을 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에게 신탁을 물었다. 트로이 전쟁을 피하려고 섬으로 여장을 하고 숨어들었던 아킬레스를 찾아내 기어이 적의 땅으로 보냈던 그녀였다.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장사치로 변장을 하게하고, 여인들 속에 숨어 있던 아킬레스를 칼과 방패로 스스로의 운명을 더는 숨기지 못하게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굳이 트로이의 땅으로 가겠다는 애인의 발목을 잡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그랬다.

“당신을 그 땅에 보낼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지요. 여권과 지갑 정도는 잃어야 당신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헤르메스에게 도움을 청했지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굳이 당신을 잡아둔 까닭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포세이돈에게 다녀오세요.”

“포세이돈?”

웬 뜬금없는 ‘포세이돈’이란 말인가. 이 땅 어디에서 바다의 신인 그를 찾는단 말인가. 문득 한 곳이 떠올랐다. 바로 어제 김순자 선생님이 남기고 간 그 곳. ‘수니온 곶’이었다. 사람의 두 다리로 걸어서 끝까지 가볼 수 있는 곳, 그곳이라면... 예감은 적중했다. 그 곳에 포세이돈 신전이 있었다. 부랴부랴 가방을 꾸렸다. 아침 식사 때 챙겨 온 사과 한 알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텔 직원에게 어떻게 가야하는 지를 물었더니, 버스 타는 곳과 요금 그리고 묻지도 않았던 걸리는 시간까지 가르쳐 준다. 싫지 않은 그녀의 과잉친절을 뒤로 하고, 뜨거운 아폴론의 화염 속으로 아니 이미 달아오르기 아테네의 대지 위로 몸을 던졌다.

‘만야’라고 했다. 몇 차례 이름을 되불러주며, 따라 외우는 어색한 나의 발음을 그리스식으로 잡아 주었다. 꽃 이름이라고 했다. 어떤 향기가 나는지를 물었더니 대답대신 그냥 ‘씨-익’하고 웃는 그녀에게 ‘지금 그녀에게서 나는 냄새’냐고 물었다. 선글라스 너머로도 얼굴이 붉어진다. ‘수니온’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그녀는 시종일관 상냥했다. ‘퍼블릭 릴레이션십’을 공부한다는 스물 세 살의 그녀는 내가 하는 일이며, 혼자서 여행을 하는 목적을 궁금해 했다. 내가 아테네에 남겨진 사연을 듣고서는 아테네를 대신해 사과를 하겠다고 했다. 사과를 받을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냥 아테네, 그녀의 뜻일 뿐이고, 나는 지금 그녀의 심부름으로 ‘수니온’에 간다고 했다. 그녀가 나의 사랑을 물었다. 내가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잠시 후 버스가 왔고, 수니온 가까이까지 한 시간쯤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보다 한 정거장 앞에 먼저 내린 그녀가 두어 번 뒤를 돌아본다. ‘씩’ 웃어 보였다. 그냥 한 번 더 ‘bye'라고만 했다. 만남처럼 이별도 쿨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순간, 아테네의 선물일까? 따라 내렸어야 했을까? 라고 물었지만, 아니었다. 아테네는 사랑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었다. 파리스처럼 아프로디테를 선택했다면, 혹시 그녀가 헬레네의 분신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파리스가 아닌 것처럼, 그녀도 헬레네가 아니었다. 한 10분을 더 달려서 버스는 종점에 다다랐다. 굳이 여기가 ‘수니온’이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버스 기사는 시동을 끄고 내렸고, 어디에 숨었는지도 몰랐던 대여섯명의 승객들이 느릿하게 일어선다.

지중해의 최남단에서 만난 ‘수니온’은 황량해 보였다. 육지의 끝이면서, 바다가 시작되는 곳, 그렇지... 이런 곳이라야 포세이돈을 만날 수 있었겠지. 그의 신전도 다른 올림포스의 신들의 신전처럼 무너져 있었다. 척박한 그리스의 땅덩이보다는 푸른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 그들에게 포세이돈의 분노는 목숨을 건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어제 보았던 ‘파르테논’보다는 많이 작았지만, 겨우 십여개 남은 도리안식 기둥만이 과거의 영화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 그들도 질투를 한다. 바다의 신인 그는 아테네 여신과 아테네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아테네 여신으로 결정되고 난 뒤부터 그는 거센 파도를 일으켜 아테네인들을 괴롭혔다. 그의 질투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 지어진 신전이었다. 그래서일까. 벼랑 끝에서 본 지중해는 조용했다. 그도 이제는 성질머리 죽이고 사는 것일까. 나즈막히 그를 불렀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가 나를 그대에게 보냈노라고 전했다. 말이 없었다. 절벽 끝에서 바다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금방이라도 내지를 것 같은 붉은 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사자의 얼굴을 하고서, 다시 한 번 지중해를 향해 내질렀다. 한 번 기가 죽은 포세이돈은 끝내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직도 뜨겁고 건조한 그의 숨길만이 조용하게 스쳐갈 뿐이었다.

터벅터벅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오다 잠시 기념품 가게를 들렀다. 같이 못 온 동료들에게 줄 다섯 장의 엽서를 한장 한장 고르고, 값을 치루면서, 이곳 날씨가 항상 이런지를 물었다. 코밑까지 안경을 걸친 나이 지긋한 그녀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오늘 기온이 41도란다. 요즘에는 항상 이렇다면서, 지난 주에 잠깐 비를 보았을 뿐이란다.

 

카페 그늘로 나와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차려진 메뉴에서 맥주를 찾았다. 세 가지 뿐이었다. 하이네켄, 스텔라, 알파. 영국시절부터 좋아하던 스텔라를 고를까. 아릿한 추억 속에 그녀가 즐겨 먹던 하이네켄을 시킬까 망설이다가 장난삼아 주인에게 물었다. 그는 단연코 ‘알파’를 권했다. 그렇지. 여기는 그리스 땅이지. 그리스에 왔으니, 그리스 맥주를 마셔야지. 호탕하게 웃는 그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다시 공책을 꺼냈다. 가방에 꾸려온 사과를 꺼내 한 입 깨물었다.

트로이를 떠올렸다. 아킬레스가 보였다. 사자 같은 영웅은 이미 오랜 전쟁에 지쳐보였지만, 화려한 투구 속에 그의 눈빛은 여전했다. 그가 말한다.

Achilles: Let me tell you a secret, something they don"t teach you in your temple. The Gods envy us. They envy us because we′re mortal, because any moment may be our last. Everything is more beautiful because we′re doomed. You will never be more lovely than you are now. We will never be here again.

 

아킬레스 : 신전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비밀을 하나 알려주지.. 신들은 인간들을 질투하지. 신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질투하지. 왜냐면 신들은 마지막 순간이란게 없거든.. 이 세상 모든 것들보다 인간들이 더 고귀한 존재인 이유가 죽기 때문이지. 넌 지금보다 더 사랑받을 순 없을걸.. 지금 이 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아.

 

질투.. 마지막 순간.. 세상 모든 것들보다 고귀한 존재, 인간..
넌 지금보다 더 사랑받을 순 없을걸.. 지금 이 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아.

그렇지. 나는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수많은 영웅들이 고작 사과하나로 시작한 전쟁. 여신들의 질투로, 아니 파리스의 운명의 여인 헬레나를 둘러싸고 피를 불렀던 전쟁을 시작했고, 결국 신들까지도 패를 나누어 벌였던 그 전쟁. 아테네는 나를 그 잔인한 기억의 땅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산맥을 따라 그리스 반도가 내달리다가 멈춰선 육지의 끝자락. 그리고 다시 에개해를 만나는 운명의 종착역.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던진다는 이 곳. 미노소스의 황소괴물을 물리친 테세우스의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해 몸을 던진 곳. 그 벼랑 끝에서 내가 들은 말은 ‘사랑’이었다. 육지의 끝에 서야, 바다를 만날 수 있고. 벼랑 끝에서 몸을 날릴 수 있어야, 저 푸른 바다를 품을 수 있고.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목숨들이 죽음을 남기고, 전설이 시작되었던 곳. 지루한 일상을 떠나와 멀리 이곳까지 찾아온 이방인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과 새로운 만남, 거기에 엇갈린 사랑'이었다. 아직도 뜨거운 아테네의 육신같던 정열의 끝에 다다라서야 본 새로운 시작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몽땅 잃고서도,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나, 영웅처럼 살아남을 나의 운명이었다. 신들의 질투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 목숨이었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는 길. 그녀의 치맛자락처럼 주름진 해안을 따라 고불고불 한 길. 그 길 너머 푸른 빛 돌던 애게해로 해가 지고 있었다. 바이런도 그랬을까. 비로소 그제서야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하루 더 그녀의 품에서 지낼 밤이 그리워졌다. 오늘밤이 마지막이겠지.

 

사랑스런 나의 아테네
나는 오늘 당신을 떠나오.
일행들로부터 나를 잠시 떼어놓아
당신의 품에서 이틀을 따로 머물게 한 마음처럼...
나도 당신을 그리워했었다는 것만을 알아주오.
당신이 잡지 않았다면,
나는 포세이돈 신전에 이르던 그 대지의 끝
벼랑 끝에 매달린 수니온의 바닷가
숨겨진 아름다움조차도 모르고 떠날 뻔했지 뭐요.
구석구석 마치 나를 위해 오랜 시간을 빚어 놓은 것만 같았던
당신의 아름다움...
석양에 비치던 그 바닷가의 저녁

파도가 울던 그 바다
뜨거운 하루를 삼켜버리고선
눈물조차 마르지 않던 그 바다도 울더이다.
밀려갔다 또 다시 밀려오던
그 숱한 시간동안
내가 당신을 그리워했던 시간보다
당신이 나를 기다려왔던 시간이 더 길었다는 것
당신은 영원히 사는 존재지만...
나는 당신처럼 그리 오래 살지 못하오.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겠소.

이별은 짧을수록 좋고,
나는 바람이었으니
그저 스쳐간 당신의 연인 중 하나쯤으로만 기억해주오.

이제 헤르메스에게 전하오.
덕분에 즐거웠다고...
그의 후예들의 솜씨에 그저 감탄할 뿐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맺어준 당신과 나의 이틀 밤
내 몸은 다시 떠나지만,
오늘 저녁도 에게해 서쪽하늘에 초승달이 뜨고
붉은 하늘 빛 사이로 비너스가 다시 보이는 시간이 되면
나도 당신의 하늘
뜨겁게 달구어지던 당신의 몸과
한없이 출렁이던 당신의 가슴이 그리워질테니까.
잠시 스쳐 지나갔던 만야의 향기처럼
또 다시 이국의 바다가 그리워지는 시간이 되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리다.
시를 적으리다.

 

3.

펜을 놓은 글쟁이. 더는 쓸 수 없는 목숨. 그가 남기고 간 유품들 속에서 나는 그의 유서를 배껴 적는다.  

“신들처럼 살라고, 아니 신들조차 질투 나는 삶을 쓰라”고.

닮고 싶었던 그의 삶과 새롭게 시작할 나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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