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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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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7일 01시 44분 등록

겨울 이야기(2)

 

1

사장님 잠깐 좀 나와 보실래요.

 

휴대폰을 통해 들리는 김군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새벽 1가 넘어 걸려온 전화에 추리닝 바지 차림으로 두 세 계단을 성큼성큼 내질러 1층 편의점에 들어섰다. 김군이 뭔 일이냐고 물으려던 낌새를 낚아 채 뾰족 입을 내밀고 길 건너를 가리킨다. 출입문을 열고 나가 보니 취객인 듯 누군가가 질펀히 엎드려 있다. 교통사곤가. 아뇨. 멀쩡히 걸어가다가 픽. 한달음에 길을 가로질렀다. 파마머리에 검정색 코트를 입고 검은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인도 한 켠에 치워놓은 눈 둔덕에 그림자처럼 뻗어 있다. 몸을 천천히 돌려 목덜미에 손가락을 대었다. 객사는 면했다. 낯익은 얼굴이다. 일단 119 부르고. 올 때까지 우리 집으로 모시자고.

 

여자를 업었다. 보기보다 몸이 가볍다.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 출입문을 여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맞았다. 어찌 된 일인가. 글쎄요.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우선 응급처치를 해야겠어요. 안방에 여자를 눕히자 어머니가 여자의 손을 바삐 주무른다. 얼굴에 핏기가 없구만. 술 먹은 건 아닌 것 같고.

 

괜찮아요.

발을 주무르던 어머니의 손길이 부끄러웠는지 정신을 차린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정신이 좀 드세요. 갑자기 쓰러졌는데 아픈 데는 없으세요?

감사합니다. 잠시 누워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쯧쯧. 젊은 아가씨가 빈혈이 있나 보네.

119는 돌려 보내는 게 좋겠다던 여자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굴이 참 곱네. 아는 아가씬감. 여자를 유심히 살피던 어머니는 나와 여자를 번갈아 훑으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웃을 때 왼쪽 입술이 위로 말리는 게 꼭 외할머니를 닮았구나. 아뇨 조세핀을 닮았네요. 무의식 중에 나오려는 말을 입언저리에서 막았다. 지난 10년간 그녀는 충분히 힘들었다. 자네는 들어가 쉬게.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잖나. 이 처자는 내가 잘 돌볼게. 알겠습니다. 주무세요. 안방 문을 닫고 나오는데 뜻밖의 소동 때문인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조용히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에 입김이 절로 났다. 이 밤이 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2

방역당국의 구제역 예방백신 접종과 지속적인 방역활동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좀처럼 진정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국내 최대 축산지역인 충남 홍성군에서도 2건의 구제역 발생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현재까지 구제역 발생 지역은 전체 축산지역 중 50%에 달해 시급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온 나라가 구제역 때문에 난리구먼. 장사하는데 지장은 없겠지.

편의점이야 공산품 파는 덴데요.

헤드라인 뉴스로 오른 구제역이 아침밥상의 서두가 되었다.

그나저나 그 아가씨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없어져 버렸어. 사람 인심이 그게 아닌데. 자네도 못 봤지.

안 다쳐서 다행이죠. 가끔 저희 가게에 들르는 사람이에요.

그 색시 어땨.

어떠냐뇨. 헤헤. 제 나이가 몇인데.

나라 법에 몇 살 이상 터울은 시집장개도 못 간다고 하던가. 이 동네 사나 본데 다음에는 전화번호라도 알아 둬.

어머니 꿈 깨세요.

내 아들이라 그런 게 아니고 난 자네를  잘 알아. 병원 들어가기 전만해도 누구보다 똑똑한 사내였다는 거 내가 보장혀. 진작 간 애비를 닮아 호방하고 힘이 넘쳤지. 나 죽고 나면 자네 혼자여. 남자가 끈 떨어지면 남는 건 추접뿐이여.

어머니는 흥분하면 사투리가 심해진다. 그 사투리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최후를 풀고 내 이야기까지 이어지면 끝이 꼭 이렇다. 그녀의 화법에는 슬픔을 증폭하는 힘이 있다. 덕분에 애써 억눌렀던 감정들이 삐죽이 튀어 나왔다. 나는 이국 땅에 다시 태어나 왜 이 모양인가.

IP *.236.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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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7 02:49:25 *.111.206.9
김군 저 아니에요?
나폴레옹은 형의 모습이구요. 위대한 나폴레옹이 담배가게에서 일하는 모습에 강렬한 대조효과가 있습니다. 행동으로 어떻게 전개될것인가, 궁금하군요.  

여자가 쓰러지는 장면에서는 묘한 흥분이 일더군요. 형도 저랑 같은 취향? 

언제, 전체 내용을 한번에 올려주시면 어떨까요? 일주일에 한편씩 읽으니, 내용 연결이 좀...혹은 앞의 줄거리를 앞부분에 요약하면 어떨까요? 

꾸준히 뚝심있게 써가시는 모습에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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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2.07 08:43:09 *.236.3.241
장사때문에 느낄 겨를도 없었겠지만 설 잘 쇴니 ㅎㅎ
애독해 주고 적절한 멘트를 날려 줘서 고맙다^^
전체 내용을 오늘 중에 올리마. 듣고 보니 그러는 게 좋겠다.

작가의 경험이 전혀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나폴레옹에게는 그 나름의 자유가 필요하겠지.
 그래야 나도 배울 게 있지 않을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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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1.02.07 07:14:05 *.10.44.47
오빠..
재미있어요.
준비운동 종료! 사이렌이 문장전체에서 울려퍼지네요.
군살없이 매끈한 그러나 실한 볼륨이 느껴지는 섹쉬한 글...
건이과 오빠 취향과는 상당 거리가 있어보이는
제 취향까지도 싹~ 흡수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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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2.07 08:48:25 *.236.3.241
설은 잘 보냈니 ^^
이 앞에 서술되던 분위기와 매칭이 잘 되는 지 모르겠다.
일주일간격으로 연재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이격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겠지 .

하여간 지금은 줄거리를 구성하는 게 중요한 단계니까 일단 쓰고 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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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1.02.10 06:23:07 *.186.58.22
상현아..이제 슬슬 시작하는 거냐? 뭔가가.. 살살 달궈지는 거 같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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