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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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여인 / [2-4-1 컬럼]
그녀는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40대의 그녀가 응급센터에 실려 온 것은 새벽이었다. 집에서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피를 토하자(객혈), 어린 자녀들이 119로 신고하여 병원에 온 것이다. 내원당시 그녀는 의식이 없었는데, 그것이 뇌의 이상인지, 술로 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본인은 맥주 1병이라고 주장했지만, 의료차트에는 ‘소주 2병 이상’ 이라고 적혀 있었다. 뇌 CT 촬영과 기본적인 검사가 진행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정신을 차렸고, 추가진료를 거부하더니, 바로 집으로 귀가했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병원에 전화하여 ‘자신의 반지가 없어졌으니, 찾아달라!’ 고 요구했다. 뇌 CT 촬영시 귀걸이를 뺀 것은 가지고 있는데, 반지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함께 있던 10살짜리 아들이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반지를 빼갔다’고 얘기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부직원이 환자의 반지를 훔쳐갔다면, 절도행위다.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당시 응급센터에 근무했던 의사와 간호사, 의료기사 등 3교대 근무자를 모두 찾아, 일일이 탐문조사를 해도 반지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1주일 동안 매일 병원에 찾아왔다. 반지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도 있지만, 병원도 책임이 있으니 반지값의 일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생활용품이 아니긴 하지만 일주일 동안 매일 반지를 찾으러 오는 것을 보면 특별한 반지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지는 다이어나 진주같은 값비싼 보석도 아니었고, 구하기 힘든 특별한 반지도 아니었다. 그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18K 실반지였다. 이유를 궁금해 하다가, 반지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병원장에게 직접 해결책을 요구하겠다며 병원장실을 방문했다가 남자비서에게 제지당한 후, 차를 한잔 얻어 마시게 되었고, 반지에 얽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몸이 안 좋았다. 잔병치레가 많았고 병원도 많이 다녔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이는 그녀의 몸보다 더 안 좋았다. 결혼식 때 낀 반지도 가짜였는데, 결혼 10년 만에야 남편에게 처음으로 진짜 반지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그 ‘잃어버린 반지’ 였다. 그런데 남편에게 반지를 선물받은 바로 그날, 너무 기분이 좋아서(?) 술을 먹다가,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왔고, 다음날 아침에 반지가 없어졌다는 스토리였다. 내가 놀란 이유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였다. “아니, 반지를 선물 받았으면 남편과 손 잡고 잘 자면 되지, 무슨 축하주를 피를 토할때가지 먹는 담?”
황당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사랑의 징표라는데, 사실규명에 대한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반지를 잃어버린 탓에 남편에게는 “너는 돈 덩어리야..그럴 줄 알았다. 니가 늘 그렇지..” 라는 욕을 먹고,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혼의 위기에까지 몰렸다며, 경청해주는 비서 앞에서 물까지 비쳤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반지값을 50% 라도 보상해주면, 남편에게 ‘내 탓만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는 것이, 비서실 직원이 전한 그녀의 내심이었다.
다행히, 선명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CCTV 가 해결사 역할을 해 주었다. 그녀의 주장대로 아들이 반지를 빼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시점에, 영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또한 귀가할 때 수납하면서 반지를 착용한 화면이 어렴풋이 영상에 잡혀 있었다. 영상을 보여주면서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별다른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영화 [귀여운 여인]으로 스타가 된 여배우 쥴리아 로버츠는‘사랑은 온 우주가 단 한사람에게 좁혀지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서양인다운 매우 영화스러운 멘트다. 동양은 어떨까? 논어에는 ‘愛之欲基生 (애지욕기생)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게끔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나온다. 사랑이 한 사람에게 생의 의욕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니, 참으로 멋진 말임에 틀림없으나, 너무 학문적이고 표현이 고고하다. 서양의 화끈한 표현력과 동양의 깊은 여운이 짬뽕을 하면 좀 더 멋질 것 같은데..
사랑의 징표인 반지를 찾아, 힘든 가운데서도 사랑을 지켜가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 그렇게라도 사랑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느껴져, 한편으로 가슴이 짠~했다. 어쨌든 그녀가 반지를 찾아서 사랑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그녀가 다시, 나를 놀라게 한 일이 일어났다. 며칠 뒤, 그녀의 고민상담을 들어주었던 남자 비서가 나를 찾아왔다.
걔 :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걔: “저..그 반지의 여인 말입니다.”
나 : “아직도 반지를 찾아달라고 요구해?”
걔 : “그게 아니라...(매우 곤혹스러운 표정) 자꾸 만나자고 연락이 옵니다.”
나 : “뭐?”(화들짝 놀람)
남자비서가 상담 후, 형식적으로 명함을 건네 준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언제 퇴근하냐? 퇴근 후 만나자’며 작업용 문자를 계속 보낸다는 것이었다.‘아니, 남편과의 사랑을 증명하는 반지를 꼭 찾아야 할 때는 언제고? 게다가 그 비서는 조숙해 보여서 그렇지, 20대 후반인데..그녀와의 나이 차이는 무려 16년...이게 무슨 황당 시츄에이션이지?'
사람은 사랑하는 동안은 타락하지 않는다는데, 그렇게 사랑이 얻어지는 것일까? 고객의 민원을 해결하다 보니, 이제는 남녀의 사랑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작금의 직장생활, 심히 피곤했는데...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그녀는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까? 3 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다.
첫 번째, 남자가 그리웠다.
남편과의 관계가 안 좋아서, 남자가 그리웠나?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녀를 상담했던 민원상담 직원도 남자였으나, 나이도 비슷한 자신에게는 오히려 매우 쌀쌀하고 사무적으로 대했다 하니, 이 가설은 무리가 있다. 아니면 남자도 남자 나름이라는 얘기인데?
두 번째, 그의 남성적 매력에 빠졌다.
비서가 매력남이긴 하다. 일단 잘 생겼다. 20대 후반의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고 남성적 매력이 넘친다. 예의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고, 조용하고 신뢰감 넘치는 말투,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친구이므로 충분히 그 매력에 넘어갈 만하다. 근데 16년차, 이건 너무하잖아?
세 번째, 자신을 존중하고 알아줘서 마음이 끌렸다.
가장 정답에 가까울 것 같다. 비서는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르지만, 병원장을 만나고 싶다는 요구에, 30분 동안 진심으로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자신을 존중해 주면서 경청해주는 멋진 매력을 지닌 남성에게 이성적인 호감, 남편에게서 얻을 수 없었던 사랑의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녀가 아닌 다음에야, 그녀의 마음을 알 길은 없다. 세 가지 이유가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그녀와 직접 민원상담을 담당했던 직원은 “아니.사람 차별하나? 나에게 만나자고 하면 술도 사줄텐데? 왜 나한테는 그런 얘기를 안하는 거야?”라며 너스레를 떤다.
예의를 갖춰, 연락하지 마시라고 방법을 알려 준 후, 비서를 돌려보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두 사람이 찌리릿~ 하면서 첫 눈에 불꽃이 튀어, 유부녀와 총각의 신분차이,16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반지를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을 만나게 해준 '운명'이었다고 고마워 하며,'잉그리드 버그만'처럼 말했을까?
"한 번도 사랑다운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를 거에요..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온 우주가 단 한사람에게 좁혀지는 기적’이에요,‘내 우주는 나의 남편! 대니 하나뿐이에요’라며 구라를 떨던 쥴리아 로버츠는, 수많은 남성들과 결혼과 이혼 결별을 반복하며 헐리웃 최고의 스캔들 스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뭐 이 정도면 약과지!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모르고, 인생이 시트콤이구나! 라고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우리는 각자 세상을 보는 시각을 지니고 있고, 또한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다.
사전에는 없는 사전,‘최우성 사전’에 사랑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사랑 : 세상이 빛나 보이는 것,
세상이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것!
오늘은,
나도 사랑하러 가야겠다.
세상이 취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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