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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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밥통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릿한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 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밥벌이도 힘들지만, 벌어놓은 밥을 넘기기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다. 술이 덜 깬 아침에 골은 깨어지고 속은 뒤집히는데, 다시 거리로 나아가기 위해 김 나는 밥을 마주하고 있으면 밥의 슬픔은 절정을 이룬다. 이것을 넘겨야 다시 이것을 벌 수가 있는데, 속이 쓰려서 이것을 넘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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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야만 산다는 것은 비극인지 모른다. 간밤에 마신 술이 채 깨기도 전에 억지로 밥 몇 술을 까칠한 입에 넣고 집을 나서 본 적이 있는가? ‘그래, 넘겨야 일을 하고 그래야 또 넘길 수 있다’고 다독이며 힘겹게 밥을 넘겼다. 출근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다가 문득 내가 넥타이로 조금씩 나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의 숨통을 조금씩 죄고 있다는 이 당혹스럽고 비참한 기분의 정체는 무엇일까?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려 나도 모르게 벼랑으로 내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날의 무리한 회식으로 속은 정확히 일분 간격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호흡을 최대한 가지런히하고 복부에 힘을 준 채 전철에서 하차한 후 조신한 몸짓으로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런데, 아뿔싸~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맥빠지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저희 역의 화장실은 공사 중이오니 다음 역에서 하차하여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나는 괴로움을 무릎쓰고 직장에 출근을 하는가? 밥 때문이다. 직장은 우리에게 밥벌이를 제공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고정된 시간에 출근하여 일정한 시간을 지불한 대가로 밥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오직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인식될 때 우리는 지겨움을 느낀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면서 보내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휑한 느낌이 드는 건 밥벌이만으로는 삶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때가 오면 어김없이 먹어야 하는 밥. 밥 먹는 시간은 리드미컬하게 반복된다. 밥을 먹어야 밥심으로 일을 할 수 있다. 특별히 밥을 먹고 싶을 때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때 먹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는 쉽지 않다. 다이어트를 하거나 스트레스로 밥맛이 뚝 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숙제처럼 먹어야 하는 게 밥이다. 내가 먹지 않아도 자식 새끼 입에 풀칠은 당연히 챙겨줘야 한다. 직장 동료 문상을 가서도, 병문안을 가서도 꼭 챙겨야 하는 게 밥이다. 상주도, 중환자도, 문상객도 잠시 슬픔을 밀어 놓은 채 삼켜야 하는 게 밥이다. 그러니 밥보다 더 슬픈 것이 어디 있을까? 도리가 없다.
얼마 전 30대 젊은 여류 작가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 사건을 신문 기사에서 읽었다. 그녀는 며칠 째 굶은 상태에서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쪽지를 남겼다고 한다. 그녀는 쪽지를 통해 “그 동안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고 이웃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기사를 읽는 순간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밥의 숙명 비슷한 게 식도를 타고 두 눈위로 떨어졌다. 밥은 누구나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밥만이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다. 밥은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인 것이다.
이제 밥은 예전처럼 자연에 있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굴러 다닌다. 내 밥, 네 밥이 서로 뒤엉켜 있다. 치열한 경쟁을 무릎쓰고 내 밥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니 밥벌이가 기분좋을 리 없다. 고통스럽고 지겨운 일이 되었다. 밥벌이를 할수록 점점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밥벌이를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일의 재미를 잃어버린 지는 오래되었다.
밥벌이가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다. 삶의 목표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밥벌이는 당연히 존재할 뿐, 밥벌이가 끝내 목표는 아니다. 밥벌이를 해결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이 욕망이 실현되어야 밥벌이의 모순이 해결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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