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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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리역에서
때도 아닌 버얼건 대낮에 두 마리가 붙어 그 짓을 하고 있다. 사람들 눈길이며, 소란스런 발길도 괘념치 않고, 아이들 보기에 남사시럽지도 않은가 보다. 눈도 껌뻑거리지 않고, 거친 숨소리도 들리질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도 여전히 두 마리는 붙어 꼼짝없이 그 짓을 하고 있다. 하늘 보기가 겁나지 않고, 사람 눈 꺼리지도 않았다. 무안한 것은 도리어 내 쪽이었다. 얼굴이 후끈거렸다. 하기야.. 조물주가 처음 지은 뜻대로 사는 것일 뿐인데.. 외려 그것이 부끄러움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부정하며 사는 것이 사람뿐일지도 모른다. 구절리역에서 처음 만난 것은 사람보다 커다란 여치 두 마리... 봄이 무르녹는 오월의 햇볕아래 짝을 짓고 있었다. 등에 짊어진 수컷의 무게를 감당하기 쉽지 않을 터인데, 암컷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할 뿐이다.
멀리 노추산 봉우리가 오장폭포를 거쳐 이곳으로 이어지는 송천松川을 끼고, 철길과 물길이 곧추 나란히 뻗어 흐른다. 좁은 계곡 사이로 하늘은 겨우 한 뼘이나 보일까.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이곳의 해걸음에 마음이 슬슬 바빠진다. 언제까지 주저앉아 여치들의 사랑 놀음을 시기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구절리 290-4번지. 기차가 끊긴지 오랜 역사驛舍에서는 더 이상 표를 구할 수 없었다. 여기서 아우라지까지는 이십리 길이다. 넉넉한 사내걸음으로도 시간 반은 가늠해야 한다.
철로를 건너 한길로 나섰다. 산모퉁이를 끼고 돌아내리는 송천의 물줄기를 타고 걸었다. 슬슬 사그러들기 시작한 햇볕에 불어난 송천의 물빛이 부서져 들어온다. 여울이 길었다. 산과 산이 가깝고 폭이 좁은 계곡 사이, 여기저기 굵은 바위들을 감아 흐르는 송천은 거친 소리를 내었다. 간간히 지나는 차가 아니라면, 계곡에는 엊그제 내린 비로 불어난 송천의 울음소리 밖엔 들리지 않았다. 세상 밖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 길 뿐이다. 철길과 물길, 그리고 사람과 차가 다니는 길이 계집아이의 따놓은 머리채처럼 가끔씩 서로의 몸을 포개어 놓여 있었다. 그 길 위로 낯선 사내의 그림자 하나가 길게 가로질러 드리웠다.
강물이 소리를 잃었나 했더니, 물줄기는 건너편 소나무 숲을 멀찌감치 안아 돌고 있었다. 잠시 느린 걸음으로 돌단풍이 비친 벼랑 밑에 작은 소용돌이 치는 침묵을 지켜보았다. 두어번 맴을 돌다가는 이내 물속으로 모습을 감추곤 했다. 바닥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짙은 초록이다. 슬쩍 스치고 지나는 바람에 물비린내가 묻어나는 듯 싶었다. 어지러웠다. 슬며시 엉덩이를 뒤로 빼고,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찔한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저 맴도는 침묵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다리가 풀렸다. 이제 겨우 반시간 걸음에 주저앉은 이를 비웃듯 물줄기는 오육십보 눈길 끝에서 다시 잰 걸음질을 시작한다.
건널목 하나를 건넜다. 철길이 물길을 넘고, 도로를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다시 물길을 건너 이어지는 다리 너머로 작은 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싸릿골이다. 해는 이미 봉우리 뒤편으로 숨어들었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거친 소나무 숲과 마을 가까이 아직 연한 이깔나무 숲이 제법 그럴듯하게 엉겨 붙어있다. 비밀스럽다.
칠십년 전쯤이었다고 한다. 어느 해 가을 사내는 싸릿골에 가자고 하였다. 그러자는 말을 차마 뱉지는 못하였지만, 물 건너 살던 여량리 처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밤새 원망스레 하늘이 울더니, 아침이 오기도 전 새벽부터 계곡은 어제보다 더 큰 울음소리를 내었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물길 끝까지 달려온 발걸음만 동동거리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뱃사공은 보이질 않았다. 애만 닳았다. 속을 끓이기는 강 건너 그림자도 마찬가지였다. 고함을 질러보지만 이내 요동치는 아우라지 물길 소리에 삼켜지고, 소리는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아리랑 고개는 또 어디고.. 왜 나를 넘겨달라 했을까.
오월... 세상은 이미 봄이라지만, 사그러진 햇볕은 더는 강바람을 데우지 못하였다. 애닳던 사연도 잠시... 흘러간 강물은 다시 되돌아 오지 않았다. 노란 동박꽃도 다 떨어지고, 낙엽에나 쌓였을 열매 주울 이유도 더는 없다. 봉우리 너머로 해도 넘어간 싸릿골엔 정적이 감돌고, 길게 산그림자가 마을을 찾아들기 시작한다. 아마 그도 외로움에 지쳤나 보다.
철길을 건넜다.
땡! 땡! 땡! 땡!
건너온 철길 뒤쪽에서 종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미 끊어진 기찻길이라고 했지만, 아직 하루에 몇 차례씩 관광열차가 지나는 모양이다. 노란색 기관차가 구부정하게 휘어진 철로를 따라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난간에 서서 저물어 가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이들의 모습이 지나간다. 꼬리에 길게 레일바이크를 물었다. 그제서야 구절리로 오르던 버스 생각이 났다. 하루 왼 종일 고사리를 꺾었다던 아주머니 셋은 버스에 오르며 오늘 하루 레일바이크 손님이 얼마나 되는지를 기사에게 물었다. 이른 저녁까지 예약은 다 찼지만 작년에 반도 안 된다는 것이 대답이었다. 징검다리를 낀 황금연휴.. 사람들은 기차대신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넌 모양이다. 아주머니들은 방이 모자라 쓰던 방까지 내주어야 했던 지난 해 이야기를 되씹고 또 씹었었다.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끊긴 줄만 알았던 저 기찻길이 아직도 주민들에겐 목숨줄이었다.
귓전을 울리던 종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지만, 금방 기차가 돌아오던 철길에 눈을 돌렸다. 두 줄이 나란히 뻗은 저 길을 따라가면 아우라지역에 닿을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피아노 건반 같은 침목을 건너 밟다가 때론 철로 위에 양팔을 벌리고 걸어도 보았다. 방금 지난 기차가 혹시라도 금새 되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귀를 철로에 대고 맥을 짚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쯤 따라 걸었을까. 바람개비가 늘어선 어디쯤을 지나 굴이 나왔다. '아리랑 고개'라고 쓰여 있었다. 잠시 망설였다. 다시 찻길을 따라 가자면 또 한참을 애돌아 가야 했다. 터널이 얼마나 깊을까. 굽어진 철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이미 어둑해지는 저녁하늘보다 컴컴했다. 안쪽에서 바람이 휙-하고 불어왔다. 짐승의 아가리 같은 목구멍이 낯선 그림자 하나를 집어 삼키었다.
터널 안은 생각보다 좁았지만, 그렇게 어둡지는 않았다. 주황색.. 연두빛이 비치는 조명등이 지나치는 그림자를 천정까지 키웠다가 다시 철길 위로 길게 늘여놓곤 하였다. 침목 사이 자갈 밟히는 소리가 바스러지기도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였다. 오줌이 마려웠다. 차라리 소리를 질러보고, 뛰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자칫 짐승을 놀래키기라도 하면 터널 안이 뒤틀리고 금새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갱도 안에 갇혀 죽은 목숨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다 알지 못한다. 거적도 덮이지 못하고, 들것에 실려 나오던 이는 지난 밤 막걸리 집에서 시집 보낼 딸래미 걱정을 했었다. 아침까지도 도시락 보자기를 들고 히죽 웃어 보이며 농담을 던지던 사내였었다. 명을 재촉하는 길인 줄 모르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들어가야 했던 목구멍이었다. 더러 제 발로 걸어 나온 자들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쉽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막장 인생이었다. 진폐에서 폐암으로 이어지는 정해진 길을 따라 하나씩 둘씩 가장을 잃고 떠나는 빈집들이 생겼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또 어디에선가 새로운 걸음들이 찾아들었다. 어느 도회지 언저리를 헤매다가 결국 여기까지 흘러들었을 것이다. 그들도 모두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그 길을 따라 지금은 레일바이크가 달린다. 허기진 짐승은 잔뜩 석탄가루 뒤집어 쓴 쾡한 눈동자에 히뜩한 웃음대신 썬글라스를 끼고, 연신 카메라의 플래쉬를 터뜨리는 젊은 연인들을 집어 삼키곤 했다. 관광책자 어디에도 막장 인생들의 삶은 남아있지 않았다. 잊고 싶도록 배고픈 삶이었을지도.. 지워버리고 싶도록 잔인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원도에는 유독 터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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