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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3일 17시 50분 등록
남자의 로망 - 평강공주를 꿈꾸는가

   그가 집에 없다. 일주일의 짧은 출장이지만 아이들이 깊게 잠든 밤에는 그의 부재가 더 실감난다.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던 문의 걸쇠를 모조리 건다. 새벽에 나갔다가 늦은 밤 돌아오는 사람이지만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집은 안전하다. 낮에도 그렇다. 그는 회사에서도 우리 집을 지키는 파숫꾼이다. 나에게 그의 부재는 문단속이다. 그가 없는 긴 밤낮, 혼자 집을 지키려니 밤이 유난히 길고 허전하다. 

  오래전 길었던 그의 출장이 떠올랐다. 
어느 날 신랑이 진지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상의할 일이 있다 했다. 이어진 이야기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일을 통해 알게 된 사람의 지인이 동남아에서 사업을 하는데 현지에서 일을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한국과 현지를 왔다갔다 해야 하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자금과 기타 관리를 맡아주길 원한다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회사를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다. 찬찬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과 몇 번의 만남을 했고 한국에 있는 자택에 초대를 받은 상태였다. 내가 반대하면 더 이상 진척을 시키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많이 흔들려 있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을 때 많이 혼란스럽고 걱정스러웠다. 작은 아이는 아직 돌도 안 된 갓난아기였고 나도 일을 하고 있었다. 혼자 보내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여러 고민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둘 다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옮기기엔, 낯설고 더운 나라로 훌쩍 떠나기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더구나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운영하는 개인회사가 아닌가. 말리고 싶었다. 겁도 덜컥 났다. 그렇지만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진지한 의논상대가 되어 생각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같이 결정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그의 생각의 경로를 따라가고 싶었다. 


  며칠에 걸친 집중적인 대화를 통해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서로 확인하고 그의 고민과 생각을 알아갈 수 있었다. 우린 둘 다 아이들 공부 때문에 떨어져 사는 것을 반대하는 것처럼 일 때문에도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조기유학이나 기러기아빠도 싫었고 이산가족도 싫었다.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는 ‘식구’로서 함께 살고 싶었다. 나도 신랑도 ‘Out of Sight, Out of Mind'를 굳게 믿었다.


  그는 회사에 고용된 직원으로 평생 사는 것보다 작더라도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은 많은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했다. 하고 있는 일은 나름대로 전문분야이고 회사 내에서 업무를 바꿀 생각은 없지만 지금의 일로 경력을 쌓아 국내에서 독립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제안 받은 일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확장하면서 사장을 도와 바로 옆에서 일을 배우고 현장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했다. 돈도 배경도 없는 자신에게는 한국보다 그곳이 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번이 인생의 몇 번 찾아오는 기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한 번도 사업가의 아내로 사는 꿈을 꾸어보지 않았다. 가족을 고생시켰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영업이 싫었다. 안정적인 삶이 좋았다. 그렇지만 그동안 보아온 신랑은 아버지와 달랐다. 책임감과 인내력이 강하고 성실했다. 동시에 주관이 강하고 딱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보통은 친절했지만 사람이나 일에 있어서 냉정한 면도 있었다. 지금보다 범위가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업을 한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일지 몰랐다. 최소한 자신의 일을 감당 못하고 아내나 아이들에게 쏟아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기회’라는 단어였다. 때로는 가족이 굴레가 되기도 한다. 종종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되며 동시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이유도 된다.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다. 내가 결혼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접어두고 미뤄둬야 하는 꿈이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끔 회사, 집, 아이들에 묶여 있는 내 삶이 한심스러워 한숨이 날 때, 그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에게 가족보다 강한 굴레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은 내가 매일 살아가는 의미가 되고 존재의 가치가 된다. 나와 그 모두 ‘가족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보다 ‘가족 덕분에’ 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기를 바랐다. 가족이란 족쇄 때문에 한숨짓는 밤보다 가족이란 원동력으로 힘찬 아침이 많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우리 서로가 꿈의 지원자이고 싶었다. ‘기회’일지 모를 싹을 무작정 자을 순 없었다.

  이번 제안을 같이 제대로 검토해 보기로 했다. 마치 회사의 신규 프로젝트처럼 진지하고 재미있게, 그렇지만 객관적으로 접근하기로 약속했다. 중요한 전제조건에 무리 없이 합의하자 다음 의논은 쉽게 진척될 수 있었다. 기본적인 스왓분석(SWOT)을 함께 하면서 할 일을 분담했다. 그는 사장을 만나고 국내외 자료를 찾아보면서 회사와 현지 사업의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고 나는 현지의 생활환경을 조사하기로 했다. 회사 일을 하는 틈틈이, 또 저녁과 주말에 자료를 찾아보고 서로 조사한 내용을 놓고 늦도록 토의를 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즐거웠다. 우리는 대화가 통하는 한 편이자 동료였다.


  조사하고 분석한 내용을 놓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도 들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부담이 크다고 했다. 굳이 선택할 길이 아니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요구되는 일 자체가 그의 강점분야와 일치했다. 회사는 작았지만 탄탄해 보였고, 오너는 적당한 나이의 인격자로 느껴졌다. 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판단은 한국에서는 무리였다. 생활환경 또한 장단점이 혼재했다. 가족이 모두 함께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결정은 쉽게 내려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가 여전히 가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나는 찬성했다.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최대한 일 년 안에 사업에 대한 판단과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생활환경에 대한 결정을 내릴 것, 또한 기간이 오픈된 왕복비행기표를 받아갈 것을 요구했다.


  무작정 그를 믿고 따랐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젊었고, 아이들도 아직 어렸다. 나도 일을 하고 있었다. 만약 잘못 생각한 것이었거나, 기회가 아니었다고 판단했을 때 몇 걸음 뒤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그려보았고 감당할 수 있다고 합의했다. 반대로 도전해보지 않는다면 그 미련과 아쉬움은 평생 마음 깊은 곳에 남을 것이란 것도 알았다. 삶은 매 순간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내 인생이기에 선택과 결정은 모두 자신의 몫이다. 여러가지 핑계와 이유를 대지만 그것조차 자신의 선택이다. 선택과 결정에는 여지없이 후회가 따른다. 후회에는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 두 종류가 있단다. 확 저질러버린, 섣부른 행동에 대한 후회는 짧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 간다고 한다. 고민고민하다 주저앉은 행동에 대한 후회는 평생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책도 있으랴. 하물며 '가족 때문에'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는 어쩌면 평생 우리 관계에 독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찬성했다.


  그는 결정이 서면 언제든 접고 돌아오라는 희망찬(?)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인터넷은 도시에서만 가능한 나라였기에 현장에 나간 날에는 며칠씩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떤 날은 영어로 된 짧은 메시지만 전해왔다.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그를 믿고 기다렸다.   


  그는 딱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긴장이 풀리자 병이 났다. 큰 병은 아니었지만 탈진과 설사로 꼬박 한 달을 앓았다. 물과 음식과 더위에 힘들었나 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은 사업과 사람에 대한 실망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었을지도 몰랐다.   


  우리가 그려보았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차츰 마음을 추스르며 몸조리를 했다. 한 달의 몸조리 후에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난 열심히 회사에 다녔다. 매달 양쪽 부모님들께 드리던 용돈도 거르지 않고 똑같이 드렸다. 그가 외적인 상황에 압박받지 않길 바랐다. 천천히 건강도 회복하고 최대한 눈높이에 맞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싶었다. 석 달 후 그는 다시 회사원이 되었다. 그도 나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함께 그 시간을 이겨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리랑카 한 번 갈까?’ 둘만의 농담에 그는 웃으며 자지러진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을 안다. 나도 그도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꽤 손해를 보았지만 돈보다 큰 경험을 얻었다. 또한 경험보다 훨씬 큰 유대감을 선물로 받았다. 그 경험과 유대감은 다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우리는 밥과 꿈을 함께 나눌 평생동지가 되었고 서로에게 깊어졌던 것이다.


  내일이면 그가 짧은 출장에서 돌아온다. 그는 7년 만에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그의 꿈이 어떻게 싹트고 자라왔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지금 내를 움직이는 내 꿈과 그의 꿈은 둘이되 둘이 아니다. 함께 꾸는 우리들의 꿈이다.  



*  스왓분석(SWOT) - 어떤 기업의 내부환경을 분석하여 강점과 약점을 발견하고, 외부환경을 분석하여 기회와 위협을 찾아내는 분석법. 강점·약점·기회·위협(SWOT)의 4요소를 사용해 분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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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5.24 13:29:55 *.236.3.241
2장 넘는 분량을 차분하게 잘 풀어준 것 같다.
지루하지 않고 잘 읽혔는데, 사족을 달자면
그의 부재를 딱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 상징같은
게 있으면 메시지가 좀더 임팩트있게 전달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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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10:27:56 *.230.26.16
그러게요. 오빠 댓글보고 다시 손을 좀 보았는데 그닥 임팩트는 자신없네요. ㅠㅠ
암튼, 다시한번 글을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역시 고쳐쓰는만큼 조금씩 나아지는 거 같아요.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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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1.05.24 21:03:46 *.34.224.87
훌륭한 내조구나!
스왓분석을 같이 하면서 미래를 같이 전망했으니..
남편이 그 기회를 놓쳤었다면, 무척 힘들어 했겠지..
지혜로운 선....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제목은 바꾸면 좋겠다.
남자의 로망? 새로운 도전? 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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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13:25:41 *.30.254.21
제목 쥑인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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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09:47:22 *.230.26.16
'남자의 로망' 좋네요. 아마 제 입장에서 나온 제목이어서 그랬나 봐요.
다각도로 제목이나 사안을 보는 훈련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감사 ^^

내조라 하니 좀 많이 민망하네요. 
철저히 제 입장에서 시작했던 거 같아요. 내가 납득하고 싶어서. 그를 이해하고 싶어서. 
이제 생각하니 그정도로 잘 봉합이 되서 참 다행이다 싶어요. 모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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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1.05.25 11:03:11 *.42.252.67
읽다보니까 너의 의도는 아니겠지만, 은근히 남자들이여~
여자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 하나를 먹으니 아내 말을 들으쇼.
꼭 도전하고 해봐야 되는 길이있고, 가지 않고 고생하지 않아도
보이는 길이 있소.
결국 부드러운 혀가 강한 이를 이긴 혀의 지혜로움이 엿 보인다.
고로 넌 부드러운 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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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12:01:32 *.230.26.16
항상 나의 주장이 '싸우지 말고 이기자'이긴 하지요 ㅎㅎㅎ
그런데 그가 더 고수예요 ^^;;
고수간의 싸움은 끝내줘요. 아, 부부싸움 얘기도 써야하는데,
요건 한번 싸우고 나서 최대한 생생하게 쓰려고 아껴두고 있다우,
그러니 언젠가 부부싸움 칼럼이 올라오면 정말 싸운거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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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5 14:26:22 *.124.233.1

잘 읽었어요 선배님..

때로는 가족이 굴레가 되기도 한다.
종종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되며
동시에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이유도 된다.

'행한 행동에 대한 후회'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 두 종류가 있단다.

아내와 함께 읽어보고 싶은 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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