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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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 최승자
이 순간
그대를 불러 놓고도
가슴이 메이는 것은
그대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새우는 아픔에 겨워
창문 열고 하늘 바라보다
두 눈을 감았던 건
그대 앞에서
울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대 지금의 삶이 순간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 생에 있어 전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나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는
가시나무새였기에
입을 다물었습니다
불러 보고 싶은 그대를
차마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움 하나 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그리움 하나가 명치 끝에 걸린 듯 답답하다.
그리는 모습 하나가 사무친다.
그리움은 동경이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다른 말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숨 떨어지면 그리움은 끝이다. 그리움은 동경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의 총체다. 그것이 되고 싶은 것이든 갖고 싶은 것이든 먹고 싶은 것이든 모든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의 총화로서 그리움은 내가 죽을 때까지 떨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동경으로서의 그리움 하나가 있다. 미래의 나의 모습이다. 지금은 다다르지 못하고 있으나 매일처럼 가슴 사무치게 하는 그런 그리움이다. 스스로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지만 불안을 그림자처럼 태어나게 한다. 관심과 불안의 교차지점은 조화를 가누지 못하고 '양극성장애' 처럼 상승과 하강을 자초한다.
스스로에 대한 관심은 끝이 없고 유의미한 듯 하다가도 빤하기도 하고,
불안은 심한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처럼 어지럽다가도 한 순간 파란 하늘에 획을 긋는 빨랫줄처럼 지평선 하나만 덩그러할 때도 있다.
그리움에 살지만 그리움은 명치 끝 저리는 아픔을 주기도 한다.
초록이 깊은 계절이다.
부는 바람을 따라 초록이 일렁이듯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가 수런거린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내가 추억하는 과거는 무엇을 담고 있으며, 오늘을 만들어준 어제의 의미는 무엇에 있을까. 그리고 세월이 지나 먼 훗날 나는 '오늘'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무엇으로 추억할 수 있을 것인가.
시일이 지나면 내 마음 속 그리움 하나가 현실을 축복처럼 즐길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른 자리에 서게 되면 막연하게 '그러리라' 짐작했던 따위의 생의 의미 말고,
살아냈던 또렷한 삶의 흔적들을 통해서 삶의 유의미함을 깨칠 수 있을까.
5~6년 전, 삼십 대를 보내면서 지난 청춘을 생각하니 식어버린 라면 국물처럼 뭔가가 허전했다.
나의 이야기는 무엇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생의 '무의미함'들이 혼탁하게 섞여 있었다.
시간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만 있는 나의 청춘을 확인하는 서글픔은 나를 어지럽게 했다.
꿈과 이상을 물질적 부의 상징으로 대체한 정신, 성숙이라 부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타협, 현명이란 이름으로 단련된 영악함 같은 것들이 스스로에게 진행되고 있었고 삶은 제 얼굴을 잃어버렸다.
내가 정의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 삶이 그리웠다.
내 속에 있었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해 애초에 없는 것처럼 비워버린 그 자리가 그리웠다.
그런 그리움의 시작으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삶의 외양도 많이 변했지만 내부의 모습도 많이 달라진 듯하다.
과거는 단지 회상과 추억만이 아닌 해석으로서 내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이것은 기억의 윤색(潤色)이 아니다. 지나쳤던 내 마음의 소리를 엿듣고 그것들로부터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새벽 시간의 모닝페이지를 통해서, 선현들의 책 속에 있는 행간의 의미를 통해서, 스승의 뜻 깊은 가르침과 동기들의 고민에 나를 대입해 봄으로써 잃어버린 나의 흔적들을 찾아가고 있다.
더불어 미래는 이루지 못할 꿈을 아쉬워하는 어쩌지 못할 시간이 아니다.
나의 직업을 그리고, 살고 싶은 삶을 조각하며, 오늘 사무치는 그리움이 비감(悲感)과 애상(哀想) 속에서도 전망(展望)을 예시하는 그런 한 마장의 가슴 부푼 설렘이다.
하지만 현재는 아픔이다.
과거의 미약함을 원망해야 하고, 미래의 불안함에 가슴 조려야 한다.
이상과 현실의 적절한 섞임을 위해서 '연구원을 통한 이상탐구'와 '파트타임의 직업을 통한 생계유지'라는 선택을 했고, 나의 시간은 이들 두 개의 기둥이 시침과 분침으로 하루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것은 적절하기도 하지만 부적절하기도 하다.
바람에 찢긴 종이연이 전봇대에 묶여 상승과 하강 둘 다를 못하게 된 것처럼 현실의 시간은 답답함을 필연으로 끌어안고 있다.
그리움으로 인한 마음앓이는 이렇듯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다양한 얼굴로 나를 만난다. 하지만 나의 그리움은 관념이 아니라 실존이기에 나는 그것이 주는 삶의 '앓이'를 달게 받을 수 있다.
"내가 대학교수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숙명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찮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것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카를 융의 최후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 중에서-
오늘이 주는 그리움의 아픔이 '지나가는 것'이 되고 '실은 하찮은 것'으로 생각되어 오늘을 멋지게 해석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고 있다.
썰물의 끝이 밀물의 시작이듯, 희붐한 새벽 빛과 같은 오늘의 시간이 초록이 깊어지는 계절의 시작임을 알고 있다. 생이 깊어져 초록이 되고 그래서 그 안으로 바람이 통하고, 숨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고.
<끝>

그리고 우리에게 칼럼의 처음 과제로 주셨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라는
주제에 대해서 저의 글을 다시 읽고 처음의 마음을 보살폈습니다.
제 보폭에 맞추어 조금씩 가야하는데 자꾸 마음이 앞서는 조급함이 있습니다.
태어남이 어머니의 혼신어린 보살핌이 전제되어야 미약하게나마 태동하듯이,
내가 무엇 하나 태어나게 하려면 제물처럼 시간과 공을 들여 그것 하나를 보살펴야하는데,
그래서 내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걱정과 불안이 그리고 존재의 미약함이 자꾸 다시 태어남을 의문시하게 합니다.
지원했을때의 마음을 사부님과 면접을 보면서 간절했던 마음을
다시 한번 마음 속에서 뛰어놀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