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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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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5일 22시 01분 등록

강을 거슬러 하늘로 오른 걸음, 천상데미

백운계곡 쪽이었다. 멀리 산자락 골짜기 사이에서 흰 구름이 피어올랐다. 벌써 시작한 모양이다. 소나기에 젖은 아스팔트는 후덕지근한 열기를 식히려는 듯이 연신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진안에서 마령을 넘어 다시 백운으로 이어지는 국도 30번. 오토바이는 내리막길에서 70킬로미터까지도 속도를 내었다. 거센 바람의 저항에 내 몸이 몸부림을 쳤다. 오토바이가 굉음소리를 내었다. 겨드랑이 사이로 감겨드는 바람이 자꾸 추근댔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돋아 나올 듯 간질거리고 숨이 막혀왔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이미 바람이었으니.. 바람이 되어라... 바람처럼.. 다시 바람처럼...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핸들을 놓고 싶었다. 그대로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팔만 뻗으면 금새라도 날개가 솟고, 저 구름처럼 나도 날고 싶었다. 무게를 잊고 싶었다.

남쪽으로.. 백운 마령 성수를 사람들은 백마성이라고 불렀다. 장수 수분리에서 금강과 갈라진 물길은 임실과 남원 그리고 남도의 구석구석을 흘러 곡성 구례를 지난다. 박경리는 떠났지만 서희와 길상의 삶을 찾는 발길들은 오늘도 평사리로 이어질 것이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강을 건너 하동 땅 화계장터에는 파전냄새가 피어 오르고 있을테다. 지리산 버들치 시인이 산다는 악양도 지나면 섬진강은 광양에 이르러서야 한숨을 덜어놓는다. 219km. 오백리 걸음이다.

742번 지방도로 갈라져 작은 마을을 지났다. 길은 외길이었지만, 얼마나 더 가야할 지 몰랐다. 정자나무 아래 모여든 아주머니들에게 길을 물었다. 낯선 걸음에 눈길들이 쏠렸지만, 저마다 답은 분분했다. 데미샘이 있는 신암리까지는 아직 이십리 걸음이 남았다고 했다. 큰 방죽이 있고, 거기서도 또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장수읍으로 이어지는 느티나무 가로수 길은 짙은 초록의 그늘이 드리웠고, 곧게 뻗은 아스팔트 위로 오토바이 소음이 채워졌다. 그 끝에 갈림길이 나왔고,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섬진강 발원지 데미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또 한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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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데미 쪽이었다. 골짜기를 따라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던 구름들이 바람을 탔다. 그러다 문득 솟구치는 바람을 만난 모양이다. 금방 전까지도 느릿했던 몸놀림들이 수직으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회오리처럼 감기던 몸들이 꿈틀거리며 오르기 시작했다. 한 마리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두어 마리인지도 모르게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분명 하늘로 곧추 솟구쳐 오르던 용을 보았다. 카메라를 꺼낼 생각도 못한 채 그 잠시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을 다시 믿기 어려웠다. 구름은 계속 피어올랐지만 더는 용오름은 없었다.

작은 개울을 넘어 골짜기로 이어진 길은 후덕지근 했다. 그것은 이제 막 정사를 끝낸 연인의 몸처럼 땀에 배어 있었고, 아직 더운 숨소리가 가라앉지 않았다. 산대나무 잎 끝에 맺힌 빗방울들이 땀방울처럼 젖어들었고, 이따금씩 후두둑 떨어지는 신갈나무의 눈물들에 목덜미며 팔뚝이 차가웠다. 골짜기를 타고 들어가는 숲길 옆으로 잠시 전 소나기로 불어난 개울이 제법 거칠게 울었다. 산 속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다시 비를 쏟아 낼 듯 먹구름이 번져들고 안개를 피웠다가도 곧게 솟은 단풍나무 잎새로 햇볕이 번져들기도 했다. 바람은 이곳까지 닿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사태가 진 듯 굵은 너덜바위들이 얽힌 골짜기 한 켠, 단풍나무 그늘 아래 작은 비석이 보였다. 데미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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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았다. 그렇지만 그저 달다고 하기엔 혀가 너무 짧았다. 시원답달하다고 해야 할까... 어찌 말도 담을 수 없는... 그냥 혀에 맴돌던 말들이 녹아버렸다. 담배 생각이 났다. 너덜 바위 아래쪽으로 덜 젖은 바위를 골라 걸터 앉았다. 잠시 전까지 투덜대던 무릎이 한 시름을 덜고, 배낭 보따리의 무게도 내려 놓았다. 섬진강이라... 고려 말 광양 쪽으로 노략질을 해오던 왜구들을 쫓아낸 금개구리들의 전설이 지어낸 이름이다. 고려 초만 해도 두치강이라 했고, 백제 때는 모래가 많아서 다사강, 다시 단군시절에는 모래내라고도 불렸다. 시절따라 변하는 이름처럼 물맛도 달랐을까. 사람들이야 무어라 부르던... 강은 제 갈 길을 찾아 흘렀다.

어디에서 왔을까. 사람들은 데미샘 위쪽으로 이어진 봉우리를 ‘천상데미’라 불렀다. 섬진강의 가장 긴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온 걸음이 하늘로 이어졌고, 전라도 사투리로 봉우리를 데미(더미)라 불렀다. 어느 청량음료 회사 제품 때문에 알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낯설던 이름이었다. 데미샘에서 다시 천상으로 이어지는 길, 하늘은 이미 비구름을 벗고 녹음진 단풍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비쳐 들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산대나무 길을 헤집고 오른 능선너머로 멀리 장수 쪽 하늘이 아직도 뿌연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또 다시 길을 나서고, 숱하게 돌아오면서도 매번 걸음이 낯설다. 30번 국도가 용담호수를 넘어 불로치 터널로 사라져 가려는 순간, 뉘엿뉘엿 해가 잠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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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1.108.38

프로필 이미지
우성
2011.07.18 12:40:24 *.30.254.21
너는 이미 바람이었으니
바람처럼...

만 시간의 수련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놀라운 성실성을 보여주는 진철아..
갈데까지 가보자...
프로필 이미지
미옥
2011.07.18 12:50:52 *.237.209.28
갈데까지 가보자!!
모두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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